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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고려연방 (26)

위기의 순간 5

by 맥도강

윤 비서관이 가방을 어루만지면서 황색봉투에 담긴 파일을 느껴봤다.

어떤 답변이 들어있을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지만 정 위원장의 판단 여부에 따라서 한반도의 운명이 좌우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한반도가 끔찍한 핵전쟁 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또 어쩌면 기적적으로 전쟁을 회피하는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수도 있었다.

만일 한 번도 경험하지 않은 최악의 핵전쟁이 발생한다면 양국이 보유한 핵무기의 량이나 수준으로 볼 때 한반도를 넘어서 그동안 인류가 이룩한 문명을 통째 파괴할 수도 있다.

단 한방으로 독도전쟁을 종결시킨 NK차르봄바급의 수소폭탄들이 쌍방으로 날아든다면 삽시간에 생지옥으로 변하게 될 터인데 그전에 이 위험한 치킨게임을 멈추게 해야 한다.


미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며 정 위원장은 자신만만하게 얘기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치킨게임에 임하는 자의 만용일 뿐 내심으로는 그도 이 끔찍한 전쟁을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치킨게임의 결과는 누구라도 상상할 수 있는 대재앙이 분명하기에 그로서도 회피할 수만 있다면 분명히 회피하고 싶을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북한의 최고지도자에게 먼저 브레이크를 밟아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했다.

한반도가 작금의 이 위기상황을 극복하여 기적적으로 전쟁을 회피할 수만 있다면 어쩌면 평화통일이라는 위대한 전리품까지 챙길 수 있음을 은연중에 말하면서 말이다.

삼일특공대는 제2단계의 한반도실행계획으로 진입할 때까지는 가급적 통일을 암시하는 발언을 자제하자고 주문했지만 대통령의 생각은 달랐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두 정상 간에는 처음부터 솔직한 마음으로 상호 교감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대통령의 요청에 대한 답변이 지금 이 황색의 봉투 안에 담겨있었다.


드디어 경의선도로 남북출입사무소가 눈앞에 다가왔다.

활발하게 돌아가는 개성공단의 상황을 증명이나 하려는 듯 입출경하려는 차량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런데 출입구의 북쪽지점에서 범상치 않은 장면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스포츠형의 짧은 머리에 짙은 선글라스를 쓴 십여 명의 장정들이 마치 먹잇감을 찾는 장산곶매의 매서운 눈빛으로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공터에 대기 중인 헬기의 시동이 완전히 꺼진 것으로 봐서는 꽤 오랫동안 기다렸던 모양이다.


드디어 그들이 찾던 사냥감을 발견했던지 장정들이 양 사방으로부터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때 최 실장과 윤 비서관이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돌변했다.

놀랍게도 표적은 남쪽 손님의 차량을 앞뒤로 호위하던 보위부차량이었다.

신속하게 두 차량을 둘러싸더니 강제로 운전석과 조수석의 차문을 열어젖혔다.

보위부 요원들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던 이들의 가슴팍에 나붙은 인공기배지를 통해서 이들이 북한의 또 다른 권력기관 소속임을 짐작케 했다.

손쓸 틈도 없이 제압 돼버린 보위부 요원들이 양손을 머리 뒤로 깍지 낀 채 차에서 내리자 이내 상황은 종료되고 말았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보위부 요원들이 저항하기를 스스로 포기하면서 발생한 일이다.


운전석에 올라탄 장정들이 차량의 방향을 돌려서 그들의 일행이 대기하던 공터로 몰아갔다.

우역곡절 끝에 이제 막 입경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또다시 예정에 없던 황당한 상황에 부닥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최 실장과 윤 비서관이 서로를 바라볼 때였다.


방금 일어난 이 쇼킹한 사태의 책임자인 듯한 중년사내가 웬 서류봉투를 신줏단지 모시듯 하면서 다가왔다.

짙은 선글라스 때문에 그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지만 서류봉투를 들고 있는 폼새만 아니었다면 체형이며 걸음걸이가 대단히 거만한 자세였다.

이 중년의 사내보다도 한 발짝 앞서서 걸어오던 사내가 재빨리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서류봉투를 가슴에 안고 조심스럽게 차에 오른 사내가 선글라스를 벗으며 옅은 미소를 띄웠다.

그가 뒤를 돌아보자 두 남쪽손님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새벽녘까지 정 위원장의 집무실에 함께 있었던 림광철 정찰총국장이었다.

“공화국을 찾아온 귀한 손님들을 놀라게 해 드려서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수다!

우리 공화국 대원수님의 답신을 급히 가지고 오느라 다소 소란스럽게 되었소”


윤 비서관으로부터 황색의 서류봉투를 건네받은 최 실장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위원장님의 답신은 여기 이렇게 이미 받지 않습니까?

대체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겠군요!”

굳은 표정의 림광철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며 자신이 가져온 황색서류봉투를 최 실장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귀측에는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측의 사정으로 대원수님의 답신서가 바뀌게 되었소,

들고 계신 것은 별다른 내용이 없는 것이니 그냥 돌려주시오!”


최 실장이 윤 비서관을 바라보면서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그에게 되돌려주었다.

그러자 건네받은 황색 서류봉투를 면밀하게 만지작거리던 림광철이 회심의 미소를 지어 보인다.

“기렇치! 뜯어봤구먼, 이 반동 새끼래 내 그럴 줄 알았지!”

한 시간 전, 최 실장이 박철로부터 서류봉투를 건네받은 직후부터 단추가 제대로 닫히지 않았던 이유가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정 위원장의 답신서를 박철 보위부장이 임의로 뜯어봤다는 것인데 그것을 확인하는 증거가 바로 두 개의 단추였다.

최근 박철의 이상 행보를 유심히 관찰하던 림광철 정찰총국장이 사전에 정 위원장에게 보고하면서 오늘 그에게 미끼 하나를 던졌다.

정 위원장의 답신서가 담긴 서류봉투의 단추는 한 번 열리게 되면 두 번 다시는 닫히지 않는 특수단추였다.

그 사정을 알 리 없던 박철이 정 위원장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고 말았다.


박철이 열어본 정 위원장의 답신서에는 북남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자는 평이한 내용들 일색이었다.

이 답신서의 내용만으로는 남쪽의 제안사항을 파악할 수 없었던 박철이 최 실장을 통해서 세부내용을 알아내고자 그 난리법석을 떨었던 것이다.

림광철이 남쪽손님들에게 겸양쩍게 웃으면서 하는 말이다.

“아무렴 남조선의 대통령께 드리는 우리 공화국 대원수님의 답신서인데 이런 고장 난 봉투에 담아서야 돼 갔소?

방금 내가 전해준 그 봉투 속에는 우리 대원수님의 각별하신 의지가 담겼으니 잘 전달해 주시라요,

최 선생! 윤 선생! 그럼 우리 다음에 또 봅시다!”

볼일을 마친 림광철이 차에서 내리자 남쪽손님을 태운 검정색의 중형 승용차는 마치 고단한 땅을 속히 벗어나고 싶다는 듯 쏜살같이 출입구를 빠져나갔다.


남쪽 손님들의 떠나가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림광철이 헬기에 탑승하기에 앞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휴대폰을 공손히 든 채 한참을 그렇게 긴장된 자세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림광철의 이런 모습은 정 위원장에게 통화할 때만 보이는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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