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린 1
국내성에서 한국대통령의 의전 책임을 부서기장에게 떠넘긴 채 홀연히 현장을 떠나버린 장더장 당서기의 행위는 그야말로 무책임의 극치였다.
그런 그가 황급히 당도한 곳은 장춘 외곽에 위치한 고풍스러운 전통찻집.
찻집 안쪽의 구석진 자리에 위치한 작은 룸은 밀담을 나누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자리다.
“왕 회장! 느닷없이 나타난 한국대통령 때문에 졸지에 내 모가지가 달아나게 생겼소,
대통령이 북경에서도 한바탕 난리를 친 모양이던데 여기까지 내려와서 저 난리를 치고 다니니 내 목인들 온전할 수가 있겠소?”
탁자 위에 벗어놓은 하얀색 중절모를 어루만지던 왕 회장이 걸걸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장 서기장! 이럴 땐 말이요,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생각하는 버릇을 가져봐요,
혹시 압니까? 그 속에서 해답이 보일지!
이런 때일수록 제대로 된 공을 세워서 북경양반들 묵은 체증을 시원하게 뚫어줄 생각을 해보란 말이오!”
오히려 공을 세워보라는 왕 회장의 달콤한 제안에 장 서기장이 구미가 당기던지 자리를 바짝 당겨 앉았다.
“오호라! 천지회 차원에서 벌써 비책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그려”
찻잔을 내려놓은 왕 회장이 주변을 살피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하려고 했을 때 그의 표정에선 비장감이 묻어났다.
“내일 한국대통령이 공항으로 이동할 때 지나가는 도로변에 우리 아이들을 대기시켜 놓을 테니"
이 정도까지만 듣었을 뿐인데도 장 서기장이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테러는 안 돼!
명색이 주변국의 대통령인데 수습이 안 되는 상황으로 내어 몰리면 내 모가지가 열 개라도 감당이 안 되지!
북경에서도 이런 방식은 원하지 않아요! 절대로 안 돼요 안돼!”
장 서기장이 호들갑을 떨면서 반대하고 나서자 왕 회장이 피식 웃으며 시거에 불을 붙였다.
“테러는 안 되지! 누굴 바보로 아시나?
그렇잖아도 북경에 앉아서 지시만 해대는 영감탱이도 수위조절을 당부하던데 내 말은 테러를 하자는 게 아니라 그냥 개망신을 주자는 거지,
한국대통령이 북경대에서 함부로 지껄인 대가치고는 너무 저렴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말이야!”
그제야 장 서기장의 표정이 돌변하면서 왕 회장 쪽으로 더욱 귀를 밀착시켰다.
“어떻게 말이요?”
왕 회장이 시거연기를 천장으로 쏘아 올리며 호기롭게 말했다.
“안 그래도 썩은 달걀 한 트럭분을 따로 장만해 두었거든!
때마침 외신기자들도 잔뜩 몰려와 있으니까 홍보는 우리가 신경 안 쓰도 될 것 같고, 한참 폼 잡고 대통령차량이 지나갈 때 썩은 달걀을 퍼부어서 개망신을 주자는 거지!,
풋하하하! 한국대통령이 우리 땅에 와서 한 짓이 있는데, 고구려 광개토왕 코스프레를 하면서 출국하게 해서는 안 될 것 아니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 꼴이 정말 우스워지지 않겠어!”
“옳거니! 그건 안 될 말이지!
한국대통령이 동북지방까지 와서 고구려족 영웅놀이를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
썩은 달걀을 퍼부어서 개망신을 주자는 그 말만 들어도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갑니다,
됐어요! 됐어, 그것으로 갑시다!”
그런데 이들이 나누던 은밀한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 사람이 있었다. 옆방에서 찻잔을 정리하던 조선족 동포아가씨 종업원 영숙이었다.
하지만 영숙으로서도 정작 이 대화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었기에 누구로부터도 주목받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5성급 호텔인 연변국제호텔에서 여장을 풀었다.
길림성의 영빈관이 있는 장춘시까지는 이동시간만 해도 족히 다섯 시간이 소요되는 먼 거리라 대통령의 요청으로 가까운 연길시에서 1박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일 오전 연길공항에서 곧장 출국하는 것으로 일정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 모든 것들이 자연스러워 보였다.
윤 비서관의 머릿속에서 대통령의 방중 이벤트가 기안되기 시작한 것은 뉴프레지 대통령으로부터 중국지상군이 참여하는 성탄절폭죽놀이의 실체를 전해 들은 직후였다.
윤 비서관은 삼일특공대로 하여금 특단의 대응책을 주문하면서 동시에 은하에게도 별도의 역할을 부탁했다.
11월 초의 어느 날 저녁, 조용히 연길공항에 내린 은하는 택시를 타고 오빠 창우의 집으로 향했다.
도로가에 흐드러지게 꽃 피웠을 코스모스 군락지도 어느덧 새까만 씨앗들만 남긴 채 사라져 가고 있었다.
반쯤 내린 차창을 통해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은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그리운 고향의 냄새 그대로다.
벌써 이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 길을 지날 때면 코스모스 향내 맡으며 윤 비서관과 함께 걷던 추억이 소환되어 절로 미소 지어졌다.
같은 시각, 성주는 딱히 볼일도 없으면서 한적한 저녁시간을 택하여 무작정 연길시내를 걸었다.
기수와 경태마저 떠나버린 ‘연변조선인향토연구소’를 홀로 지키는 성주의 옹고집은 그의 스승 배 교수에 대한 의리 때문이다.
민족극장 앞을 지날 땐 지금도 배 교수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올 것만 같아 문득 성주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배 교수는 이곳 동북 3 성지역을 고구려가 지배하던 우리 민족의 고토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동포들에게 주인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했다.
머지않은 시기에 다가올 한반도 통일의 시기에 연변조선족 자치주까지를 아우르는 한민족의 대통일을 주장하면서 열변을 토했다.
물론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주장이었고 바로 이 주장 때문에 장백산천지회가 겨눈 흉탄에 죽음을 맞이하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연길시장 안쪽 한 편의 구석자리 우두커니 서있던 ‘연변조선인향토연구소’의 빛바랜 목간판이 보일 때까지 성주는 지나간 일들을 회상하면서 걸어왔다.
교수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서라지만 사실 홀로 연구소를 지키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부쩍 활력이 넘쳐났다.
일본에 빼앗길 위기에 처했던 독도를 지켜낸 사건은 이곳 동포사회를 뭉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저기서 우리 역사에 대한 초빙 강의도 늘어나고 연구소 주최의 분기세미나도 활력이 넘쳐나자 성주를 주시하던 장백산천지회의 눈초리도 더욱 매서워졌다.
창우는 아버지가 장백산천지회의 흉탄에 비명횡사하자 그토록 충성하던 공산당으로부터 출당조치를 당하게 되어 크게 낙담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연길시내에서 부동산업자로 변신하여 제법 기반을 다졌다.
창우 특유의 친화력은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이곳 사회분위기와도 잘 맞아떨어져 공산당원이라는 특별한 타이틀을 박탈당하고도 뚝심 있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다.
창우는 동포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던 ‘연변조선인향토연구소’를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으로 아버지의 뜻을 거역한 미안함을 다소나마 덜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