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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고려연방 (48)

중국의 역린 2

by 맥도강

오래된 연구소의 목문이 삐꺼덕 소리를 내면서 생각지도 못한 반가운 손님이 창우와 함께 들어섰다.

“은하 누나!”

이십여 년 전, 성주가 연변대학 사학과에 재학 중일 때 지도교수였던 배 교수의 연구실에서 처음 은하를 본 이후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런데 강산이 두 번이나 흐른 뒤에도 또다시 가슴이 콩닥거렸다.

“잘 있었지! 아버지의 흔적이 지워지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성주가 이렇게 잘 지켜주고 있으니 얼마나 마음 든든한지 몰라, 정말 고마워!”


회의실로 사용 중인 중앙 홀에는 예닐곱 명의 연변대학 동포학생들이 다음 달 초로 예정된 4분기 학술모임을 앞두고서 행사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성주의 안내로 중앙 홀을 지나 안쪽 내실로 들어섰다.

내실로 들어선 은하가 옛 생각이 났던지 작은 방안 여기저기를 살펴보면서 살포시 미소 지었다.

익숙한 듯 이불장위에 놓인 방석부터 꺼내 가지런히 놓은 후 마치 자신이 주인이라도 되는 듯 주방으로 가 찻상을 준비했다.


주객이 뒤바뀌어 버린 모습이 어색했던지 성주가 일어서려고 하자 창우가 제지하면서 말했다.

“오늘은 그냥 내버려 둬! 은하가 옛날생각이 나서 그러는가 본데, 그래도 요즘은 연구소에 활력이 넘치는 것 같아서 보기가 좋네?”

“네, 독도전쟁 이후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남과 북이 힘을 합쳐서 쪽발이와 코쟁이 놈들을 한방먹이지 않았습니까?

또 자유왕래로 남북 간의 통일 분위기가 달아오르자 이곳 동포사회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습니다!”

성주가 최근의 동포사회 분위기를 신명 나게 말하고 있었을 때 준비한 찻상을 들고 은하가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단정하게 반무릎 자세로 앉은 은하가 녹차 잔에 뜨거운 물을 조심스럽게 따르더니 나름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은 저 그냥 들어온 게 아닙니다,

지금 대통령님을 모시고 있는 윤 선생님의 당부 말씀이 있고 해서 들어왔습니다,

두 분이 도움을 주셔야 되는 사안이라…”

은하가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면서 더욱 낮은 소리로 말했다.

“다음 달 중순쯤에 대통령님께서 중국을 방문하실 거래요,

어쩌면 마지막 일정으로 이곳을 다녀가실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만약 일정이 그렇게 정해진다면 연길공항에서 출국을 하게 되실 텐데 가급적 우리 동포들이 많이 나오셔서 환송을 해준다면…”


“형님! 난 매형의 의도를 알 것 같아요, 여기가 어딥니까?

동북 3성 가운데서도 조선족 자치주의 한복판 연길입니다!

우리 재중동포들이 출국하려는 한국대통령을 환송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것은 중국공산당을 통쾌하게 한방 먹이겠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일격을 가하겠다는 한국정부의 전략으로 봐야 됩니다!”

그제야 창우도 이해가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윤 서방이 하는 일이라면 우리야 뭐…

그런데 벌써부터 으스스한 생각이 드는구먼,

어쨌든 극도로 조심해야 될 거야!

당국이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소수민족의 이탈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는 법이 없거든!”


은하를 통해서 은밀하게 전달된 디데이 일자는 12월 20일 오전 11시 30분,

장소는 연변국제호텔이다.

이제 ‘연변조선인 향토연구소’의 모든 관심사는 다음 달 한국대통령의 연길 방문에 대비한 물밑작업에 집중됐다.

창우는 행사준비에 보태라며 적지 않은 목돈을 쾌척했고 은하도 연구소의 청년단원들과 함께 거의 매일 일손을 보탰다.


성주는 연구소의 가장 큰 행사인 마지막 분기모임을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으로 움직이면서 행사의 사이즈를 대폭적으로 키웠다.

배 교수 시절부터 분기모임의 횟수를 따져본 결과 족히 100회는 된다고 판단하고 대대적인 제100회 특집 행사의 홍보전략을 마련했다.

관건은 인원동원이었다.

최대한 많은 동포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서는 딱딱한 학술토론회의 형식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색다른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고민 끝에 생각해 낸 회심의 빅카드가 있었지만 연구소의 역량으로서는 능력 밖의 일이었다.

이럴 때 은하가 나섰고 은하를 통하여 윤 비서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드디어 디데이를 하루 앞둔 오후시간,

연구소 홀의 정 중앙에 나란히 연결된 탁자에는 이십여 명의 청년단원들이 둘러앉아서 마지막 행사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한편에 끼어 앉은 은하도 바쁜 일손을 보태고 있었을 때 성주가 인쇄소에서 얻어온 색색별의 파지종이를 트럭짐칸에 잔뜩 실어왔다.

궁금해하는 청년단원들에게 파지 한 줌을 허공에 뿌리면서 말했다.

“어때? 대통령님 지나가실 때 우리 동포들이 휘날려줄 오색종이, 폼 나지?”


그런데 창문 밖에서 이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장백산천지회의 건달 서너 명이 갑자기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그중 키 작은 녀석 하나가 기분 나쁜 표정으로 껌을 씹어대면서 실내에서 아무렇게나 침을 마구 뱉어 됐다.

“너희들 여기서 뭐 하는 거니? 파지 쪼가리를 뿌려대면서 무슨 수작놀이를 하는 거니?

의! 성주! 내가 너희들 지켜본다고 했지?

조금이라도 말썽을 부리는 날엔 너희 조선족들 완전히 박살 내 버린다고 했어? 안 했어?”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었던 청년단원들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혈기왕성한 일이십 대의 청년단원들이 모두 일어나 눈알들을 부알이니 방금까지의 기세등등하던 천지회 패들도 일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쌍방이 뒤 엉겨서 한판 붙을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성주가 겨우 만류하면서 사태가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 패거리 중 한 명이 은하를 골똘히 살피는 눈치였고 자칫 은하의 존재가 드러날 수도 있어 내심 성주의 신경을 건드렸다.

다행히 더 이상의 소란 없이 천지회 패들이 돌아갔을 때 청년단원중 한 명이 미러링 케이블을 이용하여 스마트폰과 TV를 연결시켰다.

그러자 국내성을 방문한 한국대통령이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장면들이 CNN 방송을 통해서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중국의 언론매체들은 한국 대통령의 방중 사실조차 언급하지 않았지만 해외방송에서는 한중간의 역사전쟁을 비중 있게 다루었다.


국내성에서 대통령이 보여준 행보는 간도 땅에서 이방인처럼 살아가던 우리 동포들의 심장을 뜨겁게 달구었다.

중국의 오십오 개 소수민족가운데 유일하게 본국과 국경을 맞대는 소수민족이 바로 조선족이다.

만약 이들이 본국에 통합되기를 바라는 독립투쟁이라도 벌인다면 그 불길은 순식간에 번져나가 중국은 심각한 내전상태에 빠져들 수도 있었다.

이런 가정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당국은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고, 그 사정을 모르지 않았던 자국 내의 언론들은 자의 반 타의 반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입소문이란 것이 발이 없어도 천리를 간다고 하지 않던가.

대통령의 방문소식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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