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린 3
대통령은 길림성의 부서기장이 준비하겠다는 만찬도 극구 사양한 채 가벼운 차림으로 연길시장 나들이에 나섰다.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 동포들의 현장모습을 몸소 체험해 보고 싶다는 명분으로 최소한의 수행원만으로 이동했다.
강산이 두 번이나 변한 이십여 년 전의 기억이었지만 몸이 기억하는 대로 윤 비서관은 익숙하게 앞장서 걸어갔다.
윤 비서관의 목적지는 근방에서는 제법 맛집으로 소문난 우리 동포가 운영하는 작은 순두부집이었다.
탁자 대여섯 개가 전부인 이 작은 식당의 손님들 대부분이 우리말을 사용하는 동포들이어서 대통령 일행은 정겨운 마음으로 빈 탁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았다.
대통령은 이제 겨우 이틀 밤을 중국에서 보냈을 뿐인데도 마치 오랜 세월 억눌려 살아온 사람처럼 엄청난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 압박감 때문에 마음 편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고 이제야 편한 마음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하게 되었다.
대통령은 기다리던 순두부 뚝배기가 나오자 익숙하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순두부 속살 위에서 거품을 일으키며 끓고 있던 벌건 고추 다진 양념 위에다 통째 밥 한 그릇을 집어넣은 뒤 숟가락으로 쓱싹 말았다.
대통령이 연신 땀까지 흘리면서 밥 한 그릇을 뚝딱 비워버리자 일행들은 놀라운 표정으로 대통령을 바라봤다.
윤 비서관은 은하의 안내로 처음 이 집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려 보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에서 고향집과도 같은 편안한 안도감을 느꼈다.
그렇잖아도 이 식당에서 은하와 성주 일행을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윤 비서관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을 때 한국 대통령임을 알아본 주변의 동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시장 여기저기서 입소문을 듣고 모여든 동포들로 인하여 삽시간에 식당 밖까지 꽉 들어차게 되어 통행이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이때 자리에서 일어난 대통령이 환하게 웃으면서 한 명 한 명의 손을 잡아주며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나이 많은 노인들에게는 ‘건강하셔야 됩니다!
곧 우리나라가 대통합 코리아연방으로 큰 통일을 이루게 될 텐데 그때까지는 건강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통일된 우리나라를 꼭 보셔야 합니다!’라고 인사했다.
이 말을 들은 노인들은 대통령을 격하게 포옹하면서 울기도 하고 함께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굳이 고조선 고구려 발해까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청일 간의 간도협약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분명한 우리 민족의 영토로 존재했었다.
언제나처럼 이 땅에서 당당하게 살아가고 싶었지만 일제의 농간으로 어느 날 갑자기 남의 나라에 얹혀사는 신세가 되어버린 설움이 복받쳤을 것이다.
온갖 악전고투를 겪으며 힘겹게 살아가던 땅에서 생전 처음으로 우리나라의 대통령을 만나게 되었으니 어찌 감격스럽지 않았겠는가!
모두가 함께 만세 부르고 눈물 흘릴 때 대통령도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기 위하여 안경을 벗었다.
밖에서 이 감동적인 장면을 지켜보던 은하와 창우는 더 이상의 진입을 포기한 채 군중들 사이에 파묻히고 말았다.
이때였다. 군중들 사이에 끼여 있던 한 앳된 아가씨가 감정에 겨운 나머지 울음을 터트렸다.
뜻밖에도 영숙이 울면서 주변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내일 대통령님 공항 가실 때 장백산천지회가 썩은 달걀을 마구마구 던져서 우리 대통령님을 망신 준다고 했습니다!
썩은 달걀을 한 트럭이나 던진다고 했어요! 사실입니다!
제가 직접 들었습니다, 사실입니다!”
이 젊은 아가씨의 당찬 고발은 운집해 있던 수백 명의 동포들에게 치가 떨리는 분노를 자아내게 했다.
평소 우리 동포들에게 온갖 패악질을 일삼던 장백산천진회다.
그런데 이번에는 연변을 방문한 고국의 대통령을 망신주기 위해서 썩은 달걀을 한 트럭이나 던질 계획이라고 하니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영숙의 폭로에 이어서 곧바로 누군가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내일 대통령님 공항 가실 때 우리 동포들이 모두 나와서 배웅합시다!”
고함을 지른 사람은 성주였다.
‘연변조선인향토연구소’의 청년단원들과 함께 식당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성주가 큰 소리로 외쳤고, 주변에 모여있던 수백 명의 군중들이 일제히 환호하면서 호응하기 시작했다.
“맞소! 맞소! 우리 동포들이 모두 다 나옵시다!”
“천지회 간나들이 썩은 달걀을 못 던지게 우리가 막아줍시다!”
“간도땅을 방문한 우리나라 대통령을 우리가 보호합시다!”
성주의 선동에 군중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럴 때 청년단원중 한 명이 식당에서 의자 하나를 잽싸게 들고 나와 성주 앞으로 가지고 왔다.
의자 위에 올라선 성주가 다시 한번 더 기세 좋게 외쳤다.
“내일은 팔십만 우리 동포들이 모두 나와서 만세운동을 벌이는 날로 정합시다!
연변국제호텔에서부터 연길공항까지 나란히 서서 대통합코리아연방을 지지하는 만세운동을 벌입시다!
우리나라 대통령에게 썩은 달걀을 던지기 위해서 동원되는 천지회보다도 우리가 몇 배로 더 모일 수 있다면 대통령님을 지켜드릴 수 있습니다!”
연설을 마친 성주가 대통령을 바라보았을 때 순두부집 앞에 모인 수백 아니 어느새 수천으로 불어나버린 군중들은 일제히 환호성과 함께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다.
환한 표정으로 대통령이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오더니 성주가 내려온 의자에 올라갔다.
“동포 여러분 반갑습니다!
난생처음으로 여러분들을 뵙고 있습니다만 왠지 낯설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 이 땅은 오천 년 전부터 우리 선조들의 숨결이 서려있는 우리 민족의 영토이기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이 말달리던 고구려의 광활한 벌판이 바로 여기 간도 땅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발해 이후 이 땅의 영유권을 두고서 여러 혼전이 있었습니다만 317년 전, 드디어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짐으로써 양국의 국경을 명확하게 확정 지었습니다,
동위토문 서위압록! 동쪽으로는 토문강이요,
서쪽으로는 압록강이 양국의 국경임을 백두산정계비에 또렷이 새겼습니다,
그래서 토문강과 연결된 송화강의 동쪽에 위치한 여기 동간도 지역, 지금 여러분들이 계시는 바로 이 땅이 분명한 우리 민족의 영토로 합의되었던 것입니다!”
“옳소! 옳소!”
모국의 대통령이 여기 조선족 자치주를 우리 민족의 영토라고 선언했으니 현지의 분위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있던 동포들은 북받친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눈물을 흘리면서 격정적인 동작으로 환호성을 질러댔다.
하지만 저 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이들의 표정은 달랐다.
적지 않은 수의 부하를 대동하고 나타난 왕 회장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면서 시거연기를 뿜어댔다.
함께 서 있던 길림성의 장 서기장을 바라보며 삼합회의 두목다운 거친 언사를 내뱉는다.
“저기 저 작자가 미쳐도 보통으로 미친 게 아니구먼,
맘껏 지껄여 보라지! 내일이면 톡톡히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줄 테니까”
“왕 회장! 그래도 주변국의 대통령이신데 작자라는 표현은 좀…
미친놈이라면 모를까, 크하하하하”
두 사람은 내일 벌어지게 될 극적인 장면들을 상상하면서 맘껏 키득댔다.
왕 회장의 입장에서는 북경의 사주를 받고 실행하는 거사였기에 딱히 걸림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왕 회장을 둘러싼 그의 수하들도 내일 일어나게 될 재미난 일들을 상상하면서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