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배송작전 5
은하는 모처럼만에 밥상다운 아침상을 마주했다.
어젯밤 무사히 검문을 통과하여 집에 도착한 경선 모녀에게서 그간의 사정을 전해 들은 은하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으로 밤새 뜬눈으로 지새웠다.
“두 분께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저 때문에 안 하셔도 될 고생을 하시게 되어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경선엄마가 측은한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봤다.
“한국에서 편하게 사시던 분이 우짜다가 이런 고초를 겪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소마는 우리가 도와줄 테니 어서 여기서 빠져나가소,
우리야 뭐 이 집에서 다시 살게 된 것만 하더라도 감사한 일 아이던교!”
경선은 어젯밤 은하를 처음 본 이후 어딘지 모르게 자신과 분위기가 비슷한 은하에게서 친근감을 느꼈다.
“같은 동포들 사이에는 서로 도와야지요,
그래도 배 사장님 덕분에 빚도 청산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여인숙을 떠 돌지 않아도 되게 생겼으니 오히려 우리가 고맙지요”
아침밥상을 물리자마자 두 모녀는 남들 보란 듯이 평소와 다름없이 마루에 앉아서 콩 가리는 일을 시작했다.
내일 장춘시장에 메주콩을 납품하기 위해서는 콩에 섞여있던 이물질들을 가려내는 작업은 필수 작업이었다.
반면에 은하는 혹여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띌까 봐 방 안에서 꿈적도 하지 않은 채 어서 오늘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조선족 자치주의 김일경 공안국장은 자신의 모가지가 경각에 달렸던 처지라 몹시도 초조한 상황이었다.
빨리 배은하를 잡아들여야 한다며 산하 여덟 개의 시현 공안국장들을 아침저녁으로 닦달했다.
그런데 배창우와 향토연구소를 중심으로 샅샅이 훑고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그 흔적조차 확인할 수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김 국장이 무슨 좋은 생각이 떠올랐던지 업무용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박호소장 연결해!”
연길시내의 중심가를 관할하는 파출소는 자치주의 공안들이라면 누구라도 근무하고 싶어 하는 파출소였다.
그래서 같은 조선족으로서 자신의 중고등학교 직속 후배이기도 한 박호를 이곳 소장으로 발탁한 당사자가 바로 김 국장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박 소장은 김 국장의 충복으로 통했고 김 국장도 편하게 속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 있는 유일한 부하였다.
“이봐 박 소장! 아무래도 우리가 번지수를 잘못짚은 것 같아, 이미 연길시내를 벗어난 것 같단 말이야”
“외곽으로 숨어들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말인데 외곽의 시골마을들을 중심으로 그 계집이 숨어들만 한 연고지들을 집중적으로 찾아봐!
잘 알고 있겠지만 이번 사건 해결 못하면 내 모가지는 물론이고 박 소장 당신 모가지도 장담 못하는 것 잘 알지?”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형님하고 저는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 아닙니까!”
“이건 극비사항인데 조만간에 조선족 자치주가 해체된다는 이야기까지 나돌고 있어,
그렇게 되기 전에 우리가 먼저 공을 세워서 단단한 기둥뿌리 하나정도는 붙들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다간 이번 태풍에 살아남기가 힘들게 생겼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샅샅이 한번 뒤져보란 말이야!
그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니까!”
전화기를 내려놓은 박 소장이 다시 한번 배은하의 가족과 관련된 서류파일들을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가만있어봐라 떠난 지는 오래되었지만 구룡촌 마을이 배창우 배은하의 고향마을이라면 이곳으로 숨어들지 않았을까?
검문소를 빠져나가면 곧바로 국도를 탈 수 있단 말이야, 그렇다면 어쩌면 여기가?
맞아 바로 여기가 포인트가 될 수 있겠어!’
점심 무렵부터 조금씩 휘날리던 눈발이 저녁이 되자 온 연길시내를 뒤덮을 만큼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검문소의 교대근무를 마치고 파출소로 돌아온 이 경사와 세 명의 견습 경원들이 입구에서부터 모자며 옷에 잔뜩 묻은 눈발을 털어낸다고 분주하다.
“이 경사! 오늘은 뭐 특이할만한 사항 없었어?”
출입문을 열어놓은 채 아직도 옷에 묻은 눈발을 털어내고 있던 이 경사가 박 소장의 질문에 특별한 일이 없었다는 듯 평이하게 대꾸했다.
“한국에 체류하다가 F4비자로 다시 들어오던 사십 대 남자가 두 명 있었고 그것 말고는 별일 없었습니다”
이 경사의 방금 이 말에 박 소장의 동공이 커지기 시작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른손으로 손짓하며 빨리 와서 보고하라고 이 경사를 재촉했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자 하늘은 서서히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하지만 온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은 백색의 눈발들로 인하여 벌판은 여전히 하얀색 천지다.
마루에 앉아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감상하던 은하 곁으로 경선이 다가오며 쪼그려 앉았다.
“언니!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어느덧 마흔일곱 중년의 여인으로 변해버렸지만 여전히 은하는 이십 대의 청순한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다.
“옛날생각! 어릴 적 오빠하고 눈 오던 날 여기 이렇게 앉아서 멍하니 앉아있던…”
경선 역시 나지막한 돌담 너머로 펼쳐진 백색의 들판을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는 나보다 열 살이나 위인데도 전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요,
언니의 처녀 적 모습을 본 적은 없지만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제 말이 맞죠?”
실제로 은하는 이십 대부터 즐겨 입기 시작한 청바지와 귀밑까지 내려온 뒷 머리를 큰 핀으로 묶는 스타일까지 세월의 변화와는 무관하게 당시의 스타일을 그대로 간직했다.
“응 오래된 습관이야,
꾸민다는 건 왠지 어색하게 느껴져서 여태 화장도 잘 못해, 난 그냥 편한 게 좋아”
경선이 자신의 거민신분증에 붙은 사진과 은하를 번갈아 바라보면서 살포시 웃었다.
“다행이에요, 어두운 데서는 의심하지 않겠어요,
내 사진과 언니 얼굴의 윤곽이 비슷해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하지 못하겠어요!”
그러면서 자신의 신분증을 은하에게 건네며 말했다.
“무사히 검문소를 통과했으면 좋겠네요”
경선의 신분증을 건네받으며 은하가 경선의 두 손을 다정하게 감쌌다.
“고마워! 기회가 된다면 꼭 은혜를 갚고 싶어”
은하의 이 말에 경선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언니도 참! 이 정도의 일로 무슨 은혜까지!
내일 무사히 여기를 떠나더라도 가끔씩은 놀러 올 거죠?”
이번에는 경선의 어깨를 오른팔로 감싸면서 말했다.
“그럼 내 고향인걸 당연히 돌아와야지”
그런데 정작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왠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잠자리에 누워서도 이런저런 생각들로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은하는 꼬박 뜬눈으로 새벽을 맞이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