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배송작전 6
이웃집 수탉의 홰치는 소리를 신호로 모두는 잠자리에서 일어나 바삐 움직였다.
명분은 장춘시장에 메주콩을 팔러 가는 것이지만 실상은 살벌한 전쟁터에 나아가는 것과 진배없었기에 그만큼 긴장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은하와 경선은 서로의 옷을 바꿔서 입었다.
경선이 시장 갈 때 입는 복장이었지만 길림성의 혹독한 겨울날씨를 이겨낼 수 있을 만큼 몇 겹으로 끼워 입었다.
은하와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복장상태를 바라보던 경선이 놀리듯이 하는 말이다.
“이렇게 입으니까 백두산을 종주해도 까딱없겠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색했던지 은하도 멋쩍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경선이 씌워주는 귀덮개모자까지 쓴 후에야 마당으로 나왔고 이제는 정말로 떠난다는 생각에 옛집의 이곳저곳을 자꾸 쳐다보게 되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을 모두 담아서 가겠다는 듯 부엌이며 작은 화단이며 은하의 눈길이 바삐 움직였다.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를 켠 채 아직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새하얀 눈길 위를 밟으며 경태의 더블캡 트럭이 다가왔다.
경태와 기수가 마당에 서있던 은하를 발견하자 하마터면 반가운 마음에 큰 소리로 부를뻔했지만 이내 마음을 진정시키고 눈인사만으로 상봉식을 대신했다.
차에서 내린 두 사람은 메주콩을 담은 40킬로짜리 포대자루 여덟 개를 단박에 트럭의 짐칸에 실었다.
이제 출발이다.
기수도 조수석에 오르고 있었을 때 경태가 슬그머니 경선에게로 다가갔다.
경선이 수줍은 얼굴로 머리를 숙이자 경태가 잠바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낸 작은 선물포장 꾸러미와 명함 한 장을 경선의 손에 쥐어준 뒤 차에 올랐다.
이 모습을 차에 타고 있던 경선엄마도 유심히 보고 있었지만 경태는 이 한마디 외에는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운전했다.
“쉿! 지금은 질문 안 받으니까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경태의 유별난 행동을 지켜보던 일행들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으며 긴장감을 풀어냈다.
경태가 주고 간 선물꾸러미에는 연길시내의 초콜릿 전문 가게에서 산 작은 초콜릿 상자가 들어 있었고 예쁜 카드도 한 장 끼어있었다.
‘경선 씨 때문에 내 마음에도 오랜만에 희망의 새싹이 피어났어요,
달랑 건강한 몸덩이 하나뿐이지만 경선 씨와 만나보고 싶습니다’
함께 전해준 명함에는 ‘태선용달사’ 대표 최경태라고 적혀 있었다.
어제 종일 고민하여 탄생한 ‘태선’이라는 이름 속에서 그의 확신을 망치질해 버렸다.
경선은 어느새 마음을 빼앗겼던지 멀리 떠나가는 트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남녀 간의 감정이라곤 아예 메말라 버린 줄 알았는데 심장에선 쿵쾅거리는 요동소리가 좀체 진정되지 않았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다섯 시를 갓 넘긴 시각,
국도 진입로 입구에 설치된 검문소가 가까워졌다.
이 검문소만 무사히 통과한다면 곧장 국도를 타고 약속된 장소인 소목청까지는 족히 세 시간이면 당도할 수 있다.
“정지! 모두 내리시오!”
검문소를 지키는 공안은 모두 두 명이다.
아직 신입티를 벗지 못한 견습경원이 모두를 차에서 내리게 했고 차에서 내린 일행들의 신분증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얼굴을 빼꼼하게 들여다봤다.
그러던 사이 제법 고참 티를 내던 다른 공안이 느릿느릿 짐칸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신분증검사를 통과한 경태가 너스레를 떨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다.
“구룡촌 마을 하면 메주콩 아닙니까?
이 모녀가 농사지은 메주콩을 장춘시장에 내다 팔러 갑니다,
우린 용달인데 가야 할 길이 멀어서 그러니까 빨리빨리 좀 처리합시다!”
짐칸의 물건이 메주콩임을 확인한 공 경사가 앞으로 다가와 피식 웃더니 운전석의 문을 확 열어젖혔다.
그러더니 단박에 차량에 올라타고는 매서운 눈매로 차량내부의 여기저기를 세세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은하의 신분증을 확인한 진 경원이 얼굴 대조를 하기 위해서 다시 은하를 쳐다봤다.
순간 일행들은 극도의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지만 정작 은하는 태연하게 미소 지으며 진 경원에게 ‘수고가 많습니다!’라고 따듯한 인사말까지 건넸다.
검문소의 조명등에서 의도적으로 떨어진 위치에 서있던 은하는 흐릿한 불빛의 도움으로 무난하게 통과되었다.
처음부터 은하의 손을 꼭 부여잡고 있던 경선엄마가 기지를 발휘한 덕분이다.
신분증검사를 모두 마친 진 경원이 공 경사를 바라보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두려운 마음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은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었지만 공 경사는 기어이 뒷문까지 열어젖혔다.
이번에는 차에 올라타지는 않았지만 허리를 구부려서 시트 밑까지 확인을 한 후에야 돌아섰다.
좀 전에 경태가 했던 말이 신경에 거슬렸던지 경태를 쏘아보면서 퉁명스럽게 말했다.
“때가 어느 땐데 빨리빨리를 말하는 거요?
당신은 지금 계엄령이 발동됐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지?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잘 모르시면 그냥 입이나 다물고 있던가!
쓸데없는 소리를 나불랑 거려서 당신들한테 좋을 게 없을 텐데 말이야”
공 경사가 싸늘한 표정으로 쏘아붙이자 일행은 또다시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였다.
잔뜩 겁을준 공 경사가 차량 번호를 수첩에 기록한 후 검문소 안으로 들어가 파출소에 전화하고 있을 때였다.
은하가 경선엄마의 어깨를 손으로 감싼 채 진 경원에게 사정하듯 말했다.
“우리 엄마가 몸살기가 있었어 그러는데 우린 이제 그만 차에 타도되지 않겠습니까? 부탁드려요!”
진 경원이 공 경사 쪽을 한번 살피더니 마지못해서 고개를 끄덕이자 은하는 경선엄마를 먼저 뒷자리에 오르게 한 후 같이 차에 올랐다.
그런데 공 경사가 파출소에 전화를 걸었을 때 하필 전화를 받은 당직자는 그저께 저녁 기수와 경태를 검문했던 바로 그 이 경사였다.
“차번호를 보니까 한국에서 돌아온 그 떨거지들 같은데 소장님이 요주의 대상으로 관찰해 보자고 했으니까 공 경사! 내가 소장님한테 연락해 볼 테니까 그때까지는 그 떨거지들 보내주지 말고 잡아두고 있어 봐!”
전화를 마친 공 경사가 자신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검문소의 문을 나오자마자 삐딱한 시선으로 일행들을 쳐다보더니 어깨에 차고 있던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손전등의 불빛을 비쳐가면서 재차 얼굴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기 시작했다.
차에 타고 있던 은하가 차창을 내린 채 그대로 앉아있자 공 경사가 은하를 쏘아보면서 대뜸 큰 소리로 소리쳤다.
“누가 차에 타라고 했어! 빨리 못 내려요!”
마치 중죄인이라도 된다는 듯이 공 경사가 정색한 얼굴로 고함치고 있었지만 은하는 차분한 표정으로 경선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가 추운 데서 오래 서있었더니 몸살이 오려나 봐요,
몸이 안 좋아서 그러는데 사정 좀 봐주셔요, 부탁드려요!”
간청하듯 은하가 말하고 있었지만 공 경사의 완강한 태도는 막무가내였다.
어서 내리라고 손짓까지 하면서 두 여인이 내리기를 거칠게 재촉했다.
그럼에도 차 안의 여인들이 경태와 기수 쪽을 바라보며 미적거리고 있자 공 경사의 얼굴이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경태가 다시 나섰다.
민첩하게 공 경사의 오른팔을 끌고 한적한 곳으로 데려가더니 바지주머니에서 꺼낸 지폐 몇 장을 공 경사의 가죽잠바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바쁜데 편의 좀 봐주시오!
장춘시장까지 가려면 시간이 촉박해서 그럽니다,
또 저 아주머니의 몸 상태도 안 좋은 것 같으니…”
피식 쓴웃음을 짓던 공 경사가 순식간에 경태의 양팔을 뒤로 꺾어 검문소 쪽으로 끌고 가며 진 경원에게 고함쳤다.
“진 경원! 수갑 가져와!
이 새끼 아무래도 수상하다, 파출소로 끌고 가야겠어!”
공 경사의 눈빛은 잔뜩 독이 오른 늦가을 독사눈처럼 변해있었다.
그런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다시 은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년도 의심스러워!”
진 경원이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수갑을 풀고 있던 사이 경태가 기수를 바라보며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미리 약속해 두었던 다음 작전에 돌입하자는 신호였다.
기수가 슬금슬금 공 경사의 뒤로 다가오더니 오른발로 그의 허리짝을 세차게 밀쳐버렸다.
‘퍽’하고 공 경사가 앞으로 꼬꾸라지자 기수가 다시 날렵하게 달려가 길가의 도랑으로 공 경사를 굴러서 떨어뜨렸다.
2미터 깊이의 도랑에 굴러 떨어진 공 경사가 신음소리를 내는가 싶더니 이내 그 충격으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처음부터 정 과장은 바로 이런 비상상황을 대비하여 몸놀림이 재빠른 기수에게 그 역할을 따로 주문했었다.
불가피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는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대처하여 은하를 데리고 속히 현장을 벗어나라는 지시였다.
공 경사가 일격을 당하여 쓰러지자 이에 놀란 진 경원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공안 봉을 빼들고 기수를 향해서 다가왔다.
기수의 머리통을 후려갈기기 위해서 한발 한발 다가오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에선 잔뜩 겁먹은 표정이 역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