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배송작전 4
백두산의 서문방향으로 나란히 자리한 호텔들 가운데서 유독 장백호텔 주변으로는 새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숲 속에 파묻힌 주변의 절경 탓에 새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이 호텔의 맨 꼭대기 층에 위치한 장백산천지회의 본부사무실,
오늘도 중절모자부터 양복이며 양말까지 온통 백색으로 치장한 왕 회장이 편안한 안락의자에 앉아서 최고급 쿠바산 시거 연기를 무지막지하게 뿜어대고 있었다.
왕 회장이 북경으로 전화하고 있는 동안 옆자리는 언제나처럼 그의 심복 훠치산이 시거연기의 테러공격을 받으면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늘 아침부터 벌써 세 번째 전화를 걸고 있었지만 허 원장은 의도적으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왕 회장이 전화기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려던 바로 그때였다.
허 원장의 차가운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왕 회장이 아직도 나에게 볼일이 있었던가요?”
“원… 원장님! 조선족 만세사건은 사실 우리로서도 중과부적이었습니다,
우리도 한다고는 했습니다만 조선족들이 그렇게까지 떼거지로 몰려나올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암튼 조선족들은 독종들입니다!
고구려족의 후예라고 하더니만 그 정도로까지 독종들인지는 정말 몰랐습니다!”
이 정도로 대응했으면 가타부타 상대의 답변이 있어야 하겠지만 허 원장은 또다시 침묵모드로 돌입했고 왕 회장은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다.
“원장님! 화가 많이 나신 건 알겠지만 사실 제 말이 틀린 건 아니지 않습니까?”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지만 왕 회장이 재차 재촉해도 침묵만 이어질 뿐 허 원장으로부터는 어떤 말도 들을 수가 없었다.
상대방이 이렇게까지 나올 때는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인데 왕 회장으로서도 잠자코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긴 침묵 끝에 허 원장의 화난 목소리가 왕 회장의 귓전을 강타했다.
“이것 보세요 왕 회장!
난 이번에 당신의 그 깔끔하지 못한 일처리 때문에 상당한 곤란을 겪고 있는데 당신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참 쉽게도 말을 합니다 그려,
고구려가 어쩌고 어쨌다고요?,
고구려는 우리 중국의 변방에서 활동했던 중국의 소수 민족에 불과했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었단 말입니까!
이런 기초적인 사실조차도 간과하는 당신의 그 천박함이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들고 말았어요,
당신도 입이 있으면 한번 말을 해봐요?
지금껏 당신이 제대로 처리한 일이 뭐가 있었소?
걸핏하면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징징거리기나 했지 도대체 뭐 하나라도 똑 부러지게 처리한 일이 있었느냐 말이요!”
그래도 동북 3성에서는 난다 긴다 하는 자들도 인정해 주는 장백산천지회의 우두머리인데 이렇게까지 무안을 주다니 전화기를 잡은 왕 회장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하지만 어쨌든 북경과 동북지방은 갑과 을의 관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북경의 상황을 재빨리 간파한 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전화기를 공손한 자세로 바로 잡으며 머리를 최대한 낮게 조아렸다.
평소 점잖은 샌님 스타일인 허 원장이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을 땐 북경의 분위기가 살벌하다는 뜻이다.
이럴 땐 무조건 머리를 최대한 숙여서 폭풍우를 피하고 봐야지 머리 빳빳하게 쳐들고 까불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것은 오랜 세월 북경과 거래를 해오면서 축척된 왕 회장 나름의 처세술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원장님! 저의 불찰을 용서해 주십시오!”
2미터에 육박하는 큰 덩치의 왕 회장이 허리를 조아린 채 쩔쩔매는 모습은 훠치산에게는 오금을 저리게 하는 광경이었다.
다시 허 원장의 음성에 노기가 증폭되었다.
“당신의 엉성한 일처리로 인하여 현재 북경에서의 내 처지가 어떤지는 당신 같은 무성의한 자들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오,
동북공정이 무슨 어린아이들 장난인 줄 아시오!”
이렇게 말한 허 원장이 일방적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으려던 바로 그때였다.
“원장님! 잠깐만요, 한국정부의 기획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한국정부가 뒤에서 순진한 조선족들을 부추겨서 벌인 기획사건이었습니다!”
“뭐요? 방금 당신이 한 말을 책임질 수 있어요?
확보된 물증은 뭡니까?”
“지금 그 증거를 모으고 있는 중입니다,
빼도 박도 못할 빼박증거를 곧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 봐요 왕회장! 당신의 일 처리 방식이 매사에 그 모양이지 않소?
한국대통령이 출국할 때 십만이 넘는 조선족들이 떼로 몰려나와서 대통합코리아 만세를 외쳤단 말이요!
조선족 자치주를 분리 독립시켜서 코리아연방에 통합하겠다는 정치행사를 그것도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버젓이 벌였단 말이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모두 한국정부의 사주를 받은 사건이 분명하다면 당연히 우리는 한국에 일격을 가할 무기를 가지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심증만 있을 뿐 증거는 없다는 것 아니오?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차후 이 따위의 전화질은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그리고 불쑥불쑥 북경으로 날아오지도 말고 내가 찾을 때까지 근신하고 있으시오!”
귓전을 강타하는 '탁!' 소리와 함께 전화는 끊어졌고 왕 회장은 한동안 굳어버린 자세 그대로 서 있었다.
동북 3 성지역에서 당정군의 고위인사들조차 왕 회장을 함부로 하지 못했던 그 파워의 원동력은 바로 북경과의 연결고리였다.
그중에서도 허 원장을 통한 인사 청탁은 단연 핵심 무기였다.
그런데 허 원장과의 관계가 뒤틀려버렸다는 소문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하루아침에 자신의 입지가 추락할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이 같은 난감한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하루속히 배은하를 잡아들여서 조선족 만세사건을 사주한 집단이 한국정부임을 실토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것만이 자신의 존재 필요성을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다.
“훠치산! 아이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지금부터는 훠치산이 직접 나가서 현장을 지휘한다, 알았나!”
“예! 회장님”
깍두기머리에 거친 인상이며 한 눈에도 삼합회의 주먹대장으로 인식되기에 손색이 없던 훠치산이었지만 지금 왕 회장 앞에서는 겁먹은 생쥐처럼 머리를 조아린 채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연변일대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배은하를 잡아와! 단 죽이지는 말고 말이야,
내가 직접 저희 아비처럼 처단할 테니까 반드시 산채로 잡아와란 말이야!
그전에는 내 눈에 띌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너마저도 내가 죽여 버릴 수 있으니까!”
이렇게 해서 공안은 공안대로, 천지회는 천지회대로 서로가 눈알들을 부라리며 온 연변일대를 이 잡듯이 헤집고 다녔다.
특히 행동대장 훠치산이 직접 내려온 이후로 그 도가 지나치다 할 정도로 자치주 전역을 들쑤셔댔다.
그들의 그림자가 아직 구룡촌 마을까지는 미치지 않았다지만 그것도 이제는 시간문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