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의 고토 1
다시 23년의 시간을 거슬러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던 화창한 어느 가을이다.
오후 일곱 시, 비행기는 연변 상공을 날고 있다.
하늘에서 바라본 연변시가지는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이라지만 아직은 중국에서도 작은 도시답게 소박한 불빛들에 둘러싸인 황량한 느낌이다.
사학을 전공한 사람으로서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원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 민족의 영원한 고토 간도 땅을 밟게 되는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사실 내 마음을 설레게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여인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몇 시간을 참았던 담배가 간절하기도 했지만 그녀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으로 수속을 마치자마자 서둘러서 공항건물을 빠져나왔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다.
역시 은하는 보이지 않는다.
건물의 맨 꼭대기, 굳이 한글과 한자로 병기한 연길이라고 적힌 대형 간판에서 발산되는 불빛만이 주변을 밝히고 있을 뿐 허허벌판에 혼자 있는 기분이다.
어쩌면 그건 스산한 바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처음 방문한 곳 치고는 웬일인지 다른 나라에 왔다는 생각보다는 오랜만에 고향땅을 밟는다는 편안한 생각이 드는 건 어쩐 일일까.
아마도 여기 간도 땅 일대가 오천 년 전부터 우리 민족의 땅이었던 까닭일 테다.
우리 선조들이 세운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는 모두 간도 땅을 활동무대로 삼지 않았던가.
국내의 정치적 논쟁에 휩싸여 어렵게 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하던 날,
서 교수님께서는 내손을 힘주어 잡으시며 또 한 손으론 당신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고 계셨지,
교수님께서 흘리시던 눈물의 의미와 내손을 꼭 부여잡으시며 하시고자 했던 그 말씀의 의미를 난 잘 알고 있다.
영토침입과 역사날조를 통해 티베트를 완전히 복속시킨 서남공정이 끝나자 곧바로 시작한 중국의 동북공정은 정면으로 우리 민족을 겨냥한 프로젝트였다.
미국 중심의 세계화 질서에 맞서기 위해 대중국 건설이라는 중화제국주의의 숨겨진 음모로 추진하는 것이 바로 중국 변경지역의 소수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역사공정 작업이다.
이것은 동북아시아의 질서를 그들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것으로서 그렇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우리 민족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와 중화 제국주의에 효과적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보다 충실한 연구를 바탕으로 적절한 정책을 신속하게 수립하여 정부정책에 반영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교육부산하 기구로 설립된 민관합작 연구기관이 바로 내가 몸담고 있는 동북아역사재단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백척간두에 선 우리 민족의 운명이 재단의 양어깨에 걸려있음을.
서 교수님의 추천이 없었더라면 내가 재단의 창립멤버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란 사실상 어려웠다.
우리 학계의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 중 한 분이신 서 교수님은 재단의 전신인 고구려연구재단의 창립 이사로도 활동하셨다.
이번에 고구려연구재단이 동북아역사재단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또다시 창립이사로 동참하게 되셨다.
나에겐 학문적 스승이며 아버지와 같은 분으로서 이번에도 연로하신 교수님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졌다.
그 덕분에 난 재단의 출범과 함께 중국문제를 전담하는 연구 2실에서 일하게 되었다.
재단의 연구원으로서 나에게 부여된 첫 과제는 ‘동북공정프로젝트가 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미치는 영향 분석’이라는 주제의 자료수집 활동이다.
이러한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 자료수집차 6박 7일간의 일정으로 연변으로 출장을 오게 되었고, 며칠 전 은하에게 이메일로 이러한 사실을 알렸다.
과연 은하가 나와 줄까? 은하의 메일에는 마중 나오겠다는 말은 없었다.
나 또한 몇 시쯤에 도착할 것 같다는 이야기도 없이 그저 오늘쯤 연길공항에 도착할 것 같다는 성의 없는 메일만 보냈을 뿐이다.
왜 그랬을까? 일 년 내내 은하를 그리워하면서도 그렇게 성의 없는 메일을 보냈는지 내가 생각해도 도무지 모를 일이다.
마음속 한가운데 슬며시 여인으로 자리 잡고 있는 은하였지만 그 누구에게도 내 마음을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특히 은하에게만큼은.
이런 걸 짝사랑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니 마흔둘이나 먹도록 처량한 독수공방 신세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생각해도 난 정말 바보 멍청이다.
남이 만들어 주지 않으면 스스로는 그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는 정말 한심한 인생이다.
자학하는 기분을 떨쳐버리려고 머리를 세차게 흔든 후 다 피운 담배를 구둣발로 지근지근 밟아버렸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굳이 변명하자면 은하는 이제 겨우 스물여덟의 아름다운 꽃처녀,
난 허우대만 멀쩡할 뿐, 이 나이 되도록 모아놓은 돈도 없고 이제 겨우 말단 연구원신분의 무능력자가 아닌가.
재작년 이맘때였다. 북경대학에서 교환연구원 신분으로 유학할 당시 은하를 처음 만났다.
그것도 시간강사로 세월만 축내며 모교를 전전하고 있던 나에게 경력이라도 쌓으라며 어렵게 기회를 만들어준 서 교수님의 배려 덕분이었다.
사실 특별한 실력도 없으면서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한마디로 주변머리 없는 나로선, 졸업 후 남들 다 나가는 사회에 진출하는 게 두려웠다.
사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갈 용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육지책으로 선택했던 방법이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지만 끝까지 학교에 빌붙어있는 것이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서 교수님은 본의 아니게 나의 지도교수역할을 하고 계신다.
교수님 입장에서는 악연이라면 악연이겠지만 한번 지도교수면 영원한 지도교수라 하지 않던가.
교수님 바짓가랑이만 잡고서 살아온 인생이었기에 당시 난 북경대 국제관계대학원에서 박사 후 과정의 연구 활동을 할 수 있는 행운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은하는 북경에서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관광가이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연히 만리장성에 놀러 갔다가 한국인 관광객을 인솔하고 온 은하를 처음 만났다.
수줍음 많은 조선시대의 여인을 생각게 하는 참한 얼굴에 목까지 기른 머릿결을 예쁜 머리핀으로 단정하게 꼽은 자태,
늘 입고 있는 청바지와 잘 어울리는 단정한 몸매,
그리고 몸에 뵌 듯 한 자연스러운 지성미를 가진 그런 아가씨였다.
그녀를 보자마자 별안간 내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렸고 왠지 모르게 낯설지 않은 느낌으로 다가왔다.
마치 잃어버린 나의 분신을 만난 것처럼 공허하기만 했던 내 가슴을 꽉 채워주는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