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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고려연방 (69)

우리민족의 고토 2

by 맥도강

나는 계속해서 그녀 주변을 서성거리고 있었으므로 케이블카를 탈 때는 맨 마지막 순서로 함께 탈 수 있었다.

고소공포증이 있었던 나는 케이블카가 무서운 속도로 급경사를 올라갈 때 엄청난 공포감에 휩싸였다.

내 얼굴은 이미 창백한 색깔로 변해 있었고, 내 몸은 통나무처럼 굳어 있었다.

순간적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오금이 저려오면서 현기증이 몰려왔다.

옆에 앉은 은하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마음을 편안히 가져보라고 했다.

케이블카는 안전한 시설물이니 걱정하지 말고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마음껏 감상해 보라고 했다.

그러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거라고 하면서…

고운 머리칼을 흩날리며 오색물결로 펼쳐진 단풍의 절경을 마음껏 탐닉하던 은하의 자태에서 포근함이 느껴졌고 엄습해 왔던 공포감도 이내 사라졌다.


이때 난 처음으로 그녀에게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은하의 채취에서 우러나는 향기는 가을 산에 올랐을 때 간혹 맡을 수 있던 자연 그대로의 향기다.

심신을 나른하게 만들면서도 온갖 잡념이 사라진 후의 평온함, 이것이 바로 은하의 향기였다.


연변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는 은하는 경제적인 자립을 하고 싶어 기회가 많은 북경으로 올라왔다고 했다.

그런데 근무하던 출판사가 부도가 나는 바람에 그녀의 오빠가 추천해 준 관광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인 관광객을 상대하는 관광 가이드 생활을 하게 된 지는 삼 년쯤 되었다고 한다.

은하는 날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존경하는 선생님 대하듯 했고, 난 마치 은하의 보호자인 냥 친동생을 대하듯 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내 마음을 철저히 숨겼기 때문이지 은하는 이미 내 마음속의 여인으로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1년 전, 학기를 모두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온 뒤에도 우린 이메일을 주고받았다.

대부분 평면적이고 상투적인 대화였지만 나는 메일을 읽을 때면 언제나 그 속에서 은하의 모습을 보았고 그녀의 향기를 느꼈다.

그건 어찌 보면 나의 그리움이 만들어 낸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

시월 초인데도 연변의 밤공기는 제법 찬 기운이 섞여있다.

담배한대를 더 입에 물고, 근처의 나무벤치에 앉았다.

은하에게 와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또 온다는 언질도 없었는데 마냥 기다리고 있는 나 자신이 안쓰럽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쯤 북경에서 일하고 있을 은하가 단지 나를 만나기 위하여 연변으로 온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다.

도착한 지 30분쯤 지났을까,

체념하고 일어서려는데, 어디선가 나의 뇌리에 기억되어 있던 기분 좋은 냄새가 다가오고 있다.

화장이나 향수와 같은 가공된 물질에서 연출되는 그런 차원의 냄새가 아닌 자연스럽게 우러나는 기분 좋은 냄새, 사랑스러운 그녀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그 향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은하였다.


기적 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났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내가 본 은하의 모습 중 가장 아름다웠다.

“선생님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살짝 흩날리는 머리칼을 뒤로 쓸어 넘기면서 특유의 연변 말씨로 은하가 가벼운 목례를 하고 서 있다.

그녀의 눈망울엔 어느 사이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목소리에도 눈물이 배어있는 듯했다.

“선생님, 많이 뵙고 싶었습니다.”

순간 나는 들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던져버리며 와락 그녀를 껴안았다. 난생처음으로 고루한 가식 따위는 모두 걷어치우고 오직 본능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은하의 눈물이 내 가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다.

밀착된 가슴과 가슴으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우리 두 사람의 감정이 동시에 분출되는 순간이다.


은하의 두 어깨에 내 양손을 얹은 후 똑바로 그녀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리고 또다시 힘주어 껴안았다.

잠시 후 손수건을 꺼내 은하의 눈가와 볼 주위에 흘러내린 눈물을 닦아주자 그제야 자신의 흩뜨려진 머리칼을 정돈하고는 수줍은 미소로 내 시선과 마주했다.

“은하가 안 나오는 줄 알았지.

하긴 내가 몇 시에 도착한다는 말도 안 해주었으니 은하가 나와줄 거라고는 기대하진 않았어.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냥 기다렸던 건데…”

“사실은 하루 종일 공항에서 기다렸습니다.

몇 시 비행기로 오실 줄을 몰라서 인천공항에서 출발하는 첫 비행기가 낮 열한 시에 도착한다기에 그때부터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녀의 눈가에 맺힌 이슬이 그녀를 더욱 사랑스럽게 만들었다.

그녀에게서 나는 짙은 향기 때문에 내 심장은 터질 듯 진동하면서 제대로 말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도 한참을 찾았는데…”

“용기가 나지 않아서 저쪽 기둥 뒤에서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서…”


잠시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량한 느낌마저 주던 그 나무벤치에 우린 나란히 앉았다.

왼손으로 은하의 손을 잡은 채 또 오른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감쌌다.

“은하, 보고 싶었어. 벌써부터 이런 말을 하고 싶었지만 내가 워낙이 주변머리가 없어서 내 감정을 잘 표현하질 못해.

그러나 이제부턴 은하에게만은 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아.”

“저도 선생님 참 많이 좋아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신 뒤로는 제 마음을 이기기가 어려웠습니다.”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우리 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는 달리 생각이 나지 않아 무작정 걷자고 했고 한 팔로 은하의 어깨를 감싼 채 걷기 시작했다.

연길시내까지는 택시를 타야 했지만 가로등이 켜져 있는 구간까지 만이라도 은하와 걷고 싶었다.

“연길에는 언제 왔어?”

“선생님께서 연길로 오신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북경에서의 생활을 완전히 청산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어제저녁에 내려왔습니다,”

“그럼 완전히 내려온 거네?”

“네, 그렇잖아도 선생님이 계시지 않는 북경생활은 무의미하게 생각되어 심적인 갈등이 심했습니다.

연길로 다시 내려오라는 아버지의 성화도 빗발쳤고요. 그래서 이번 참에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남들이 보면 우리 두 사람을 아주 오래된 연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린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걷고 있었다.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코스모스들도 우리의 사랑을 축하해 주려는지 가을바람에 흔들리며 춤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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