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벽 3
“자 보시오! 개편된 역사교과서에서 고구려사를 아예 통째로 빼버렸어요.
세계사에서 고구려사를 완전히 지워버렸단 말입니다.
윤 선생, 어디 한번 말해보세요.”
더 이상의 논쟁을 회피하기 위해서는 배 교수의 주장에 토를 달아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배 교수의 항의에 나로서는 딱히 반론을 제기할 수도 없었다.
자신의 주장이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집요한 공격은 계속됐다.
“이것 보세요. 고구려사는 통째로 빼버린 대신 고조선과 발해는 중국사라고 하면서 아주 비중 있게 다루고 있어요.
솔직히 말해서 발해사만큼은 한국에서도 그동안 소홀히 다루어왔던 게 사실이지 않습니까?
오히려 북한에서 우리 민족사의 중요한 역사로 지켜왔기 때문에 그나마의 명맥을 유지해 왔던 것이지만 말입니다.”
배 교수의 이 말은 사실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언젠가 서 교수님께서도 오늘날 우리 학계의 가장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로 반도사관을 지적하셨다.
일제강점기, 일본사람들에 의해서 주입된 식민사관의 하나로 자리 잡았던 것이 반도사관이다.
간도를 중심으로 광활한 대륙에서 태동했던 우리 민족의 웅대한 북방역사가 엄연히 존재함에도 이것은 소홀히 다룬 채, 우리 민족의 사관을 반도 내로 협소하게 바라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특히 발해에 대해서는 한국사로 다루는 것에 대해서조차 편향된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치부해 버리는 시각이 존재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서 교수님께서는 늘 강조하셨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는 협소한 반도가 아닌 광활한 대륙중심의 역사임을 항상 명심하라고!
배 교수의 열변을 듣고 있자니 그가 왜 이렇게까지 흥분하며 열변을 토하는지 이해할 수 있었고 난 그저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됐든 이제 배 교수의 질책은 끝이 났고 난 자세를 고쳐 잡았다.
“부끄럽습니다만 이제부터라도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자료수집 목적으로 제가 여기에 온 것도 우리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수님께서 보실 때에는 여러모로 부족하시겠지만 앞으로 지켜봐 주시고, 많은 지도편달을 바라겠습니다.”
한동안 창문을 열어 두었더니 방안 가득히 찬 기운이 들어와 제법 쌀쌀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였다.
마침 은하가 일어나서 창문을 닫고 앉았다.
얼마나 열변을 토했던지, 배 교수의 얼굴은 입술 양 옆에 고인 허연 침으로 인하여 더욱 보기가 안쓰러웠다.
간혹 톤을 높일 때는 목청에서 빽빽~ 소리까지 났는데 그 열정 하나만큼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배 교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창문을 다시 조금 열더니 또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내가 즉시 주머니 속에서 라이터를 꺼내 그의 담배에 불을 붙여주자 그는 훨씬 누그러진 태도로 변했다.
“윤선생, 나도 나이를 먹다 보니 사람을 알아보는 안목이 생겼어요,
선생의 첫인상이 신의도 있고 인품도 웬만한 것 같으니 선생이 여기 계시는 동안 학술적인 교류나 하면서 지내도록 합시다.
사실은 나도 몇 년 전까진 연변대학에 있었소.
나도 윤선생과 같이 사학을 전공했는데, 지금은 뭐 향토연구소네 하면서 내 잘난 맛에 살고 있소만."
“감사합니다 교수님. 저의 연구과제도 동북공정이 조선족 자치주에 거주하는 우리 동포들에게 미치는 영향분석입니다.
교수님의 연구 성과가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앞으로 많은 지도편달 바랍니다.”
이제 그만 일어서려는데 잠시 앉으라고 하면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은하에게 담배심부름을 시켰다.
나는 눈치도 없이 재빨리 와이셔츠 주머니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그에게 권했지만 저 타르의 한국산 담배는 싱거워서 못 피운다며 굳이 은하를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다.
은하가 없는 사이 나에게 긴히 하고픈 이야기가 있었던 모양이다.
은하가 방문을 닫고 나가자 내 눈빛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소곤거리듯 말문을 열었다.
“난 우리 은하의 눈빛만 봐도 그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훤히 알 수 있지요.
은하는 내 앞에선 거짓말을 못합니다.
아이 엄마가 너무 일찍 세상을 버리는 바람에 내손으로 똥 기저귀 갈아주며 키운 아이요.
딸아이의 아비로서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이런 말하기가 쉽지는 않소만, 선생을 바라보는 우리 아이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아서 염치 불고하고 하는 말이오만, 선생! 우리 은하와는 대체 어떤 사이요? 솔직히 말해주면 고맙겠소.”
이 중요한 순간에 난 또다시 꿀 먹은 벙어리처럼 바보가 되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방바닥만 쳐다봤다.
“내 짐작이 맞는군.
선생, 이 사람의 말을 선생이 어떻게 생각해도 좋소만, 내 진정으로 부탁하오. 선생이 마음을 돌려주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아이가 불행해져요. 선생과 우리 아이는 격이 맞지가 않아요.
우리 아이는 어린 나이에 적잖이 정에 굶주렸겠지만 그래도 참 맑게 자라줘서 나로선 여간 고맙지가 않아요.
넓은 세상은 우리 아이에게는 맞지가 않아요, 상처받기 딱 좋은 곳이란 말이오.
그래서 북경에 있는 아이를 무작정 내려오라 했지.
우리 은하만큼은 가슴에 상처받는 일없이 평범하게 살기를 바라는 아비로서의 바람이니 선생이 너그러이 이해해 주기 바라오.”
이렇게까지 말하는 동안에도 난 아무 말도 못 한 채 방바닥만 쳐다보고 있었다.
배 교수는 녹차 한 모금을 더 마시더니 나못지않은 풀 죽은 모습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물론 윤 선생 본인은 우리 은하에 대한 감정이 그렇지도 않은데, 내가 너무 앞서나갔다면 선생한테 내가 큰 실례를 범했소만…”
순간 난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격이 맞지 않는다는 표현으로 완곡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말은 은하와의 관계에 더 이상의 진전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은하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내가 가졌던 벽,
이제야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던 그 벽이 또다시 우리들 앞에 떡하니 버티고 섰다.
배 교수가 말하는 격이 맞지 않다는 표현 속에 담긴 그 격차는 과연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열네 살 차이라는 나이를 염두에 둔 말일까?
아니면 연변처녀와 한국남자라는 결코 조화롭게 동화될 것 같지 않은 인식의 차이를 염두에 둔 말일까,
은하와 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엄청난 벽은 결코 쉬이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참으로 험난한 벽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