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벽 4
배 교수의 사무실에서 나온 후 은하와 함께 딱히 정해둔 목적지도 없이 거리를 걷고 있다.
가로수가 잘 정돈된 거리는 고풍스러운 주변의 경치도 볼만해서 은하와 걷는 데이트코스로는 아주 훌륭했다.
그러자 여기가 중국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어색하게 느껴진다.
모든 것이 우리나라의 어느 시골 읍내 같은 친숙한 옛 고향에 와있는 기분이다.
우린 오래된 연인 사이처럼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고 정해둔 목적지도 없이 시내를 향해 다시 길을 걸었다.
바람이 한바탕 불어오자 낙엽들이 바람을 따라서 몰려간다.
그중 하나가 은하의 머리 위에 앙증맞게 내려앉았다.
은하의 머리에서 떼어낸 잎사귀는 아직은 낙엽이라기보다는 노란색으로 물들다 만 설익은 낙엽이었다.
아마도 친구들을 따라서 엉겁결에 나무에서 내려온 모양이다.
그것을 살짝 떼어내 은하에게 주었더니 마치 소녀처럼 냄새도 맡아보고 입에도 물어보면서 신기한 표정이다.
하는 모양새가 꼭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마냥 귀엽기가 그지없다.
이때, 은하의 가방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대화내용으로 보아서는 그녀의 오빠인 듯하다.
오빠가 우리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으니 연길시내에 있는 극장식 식당 해당화에서 만나자고 했다.
주위는 이미 어둑어둑 해졌을 때, 우린 약속시간에 맞추어 북한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북한아가씨들이 식당 앞에서부터 우리를 안내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제법 아담한 분위기의 작은 무대가 나타났다.
무대 위에서는 전자오르간과 기타를 연주하며 어여쁜 아가씨들이 노래에 맞추어 흥겹게 춤을 추고 있다.
아직 초저녁인데도 벌써부터 테이블의 절반이상이 손님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때 무대 앞쪽의 원탁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있던 남자가 은하를 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 아는 체를 했다.
배 교수보다는 다소 작아 보였지만 그 체격이 단단해서 야무진 인상을 풍기는 사내였다.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모양새로 보아서는 여기 연변 사회에서 행세깨나 하며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가 나를 바라보면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시오? 나 은하 오라비 되는 배창우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한국에서 오셨다고요?”
“예, 그렇습니다, 윤준노라 합니다!”
그는 가벼운 눈웃음과 함께 손에 잔뜩 힘을 주고 내 손을 잡았다.
자리에 앉아 물 한 컵을 비우는 사이, 어느새 주문한 요리들이 테이블 위에 수북이 쌓이기 시작한다.
잉어찜을 비롯한 해물요리와 산해진미들이 한 접시 한 접시 들어오자, 물수건으로 손을 닦던 창우의 얼굴이 뿌듯한 표정으로 바뀌어갔다.
“조선식당은 어디를 가나 요리 맛은 일품인데 요리하는데 시간이 너무 걸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 집에서 최고로 맛난 음식으로 미리 주문을 했댔습니다.
윤 선생, 시장하실 터이니 일단 들면서 얘기합시다. 은하도 많이 들어?”
과연 창우의 말대로 요리 맛은 일품이었다.
천연조미료로만 요리를 했다고 하는데 은은하게 우러나는 깊은 맛이 내 입맛에도 잘 맞았다.
창우가 따라주는 북한 술은 상호가 백두산 들쭉술이라고 적혀있었다.
창우가 한껏 뽐내면서 거드름을 부려댔다.
“선생, 이 술이 말이요. 2000년 6.15 정상회담 때 김대중 대통령과 정 위원장이 함께 건배했던 술인데, 북한에서는 최고로 치는 술이지요.”
창우의 건배 제의로 한잔씩 들이켰을 때 은하는 술이 너무 독한지 얼굴을 잔뜩 찡그리더니 잠시 입가에 대는 표정만 짓고는 살며시 내려놓았다.
이때 본격적인 공연이 시작되었다.
조금 전까지 홀에서 서빙하던 아가씨들도 공연에 합류하자 극장식당 안의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 갔다.
“윤 선생, 저 미모의 아가씨들이 북조선에서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서 선발된 엘리트 출신들이란 말입니다.
중국에 파견된 외화벌이 아가씨들이 이곳 연변 관광지마다 몇 군데 있는데 말입니다,
모두가 당성이 투철한 아가씨들이죠. 아무나 안 내보내지요. 그랬다간 큰일 나니까요.”
은하로부터 연변조선족 자치주 대북 무역사업의 실무를 관장하는 과장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막상 그의 입을 통하여 북한의 실정을 듣게 되자 또 다른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들은 북한의 내부사정에 정통한 사람만이 전할 수 있는 소식들이다.
이번에는 그가 옆자리에 앉아있는 은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그나저나 우리 은하 오랜만에 보는 사이 많이 예뻐졌구나.
너 바쁘다고 전번 추석 때도 못 내려왔었지?
나도 한 일주일 조선에 출장 갔다가 오늘 오후에야 왔댔어,
짐은 원래 쓰던 너 방에서 풀었지?,”
“예 오빠, 앞으로도 오빠 아파트에서 계속 신세 좀 져야겠어요,”
“신세라니!, 철이 공부나 좀 봐주고 그러면 우리야 좋지 뭐, 예전처럼 편히 지내자고,
몇 시간 전에 최 씨 아저씨가 사무실로 전화 안 해주었으면 우리 은하 온 지도 모를 뻔했더랬어.
아버지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으니 한번 들리라고 전화가 왔더라.
그때 네 얘기도 들었어. 윤 선생도 같이 와 있다고.”
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은하는 오빠에 대한 섭섭함을 따지겠다는 듯 의자를 빠짝 당겨 앉았다.
은하의 눈빛이 매섭게 돌변했다.
“오빠, 인제 그만할 때도 됐지 않았습니까? 아버지를 오빠가 좀 이해해 주면 안 되겠습니까?
난 아버지가 너무 측은해서 아버지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은하가 정색하며 따져 묻는 상황에서도 창우는 그저 가벼운 미소로 은하를 바라볼 뿐이다.
“그래그래, 우리 은하 마음은 이 오빠가 잘 알지. 이제 은하가 내려왔으니 아버지를 잘 모셔야지.
요즘 들어 웬 술을 그리도 드시는지 최 씨 아저씨가 걱정을 많이 하더라.”
창우의 넉살 좋은 언변으로 자칫 딱딱할 뻔했던 분위기가 해소되었으나 은하는 오빠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도 나지만 오빠가 아버지 하고 잘 좀 지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와 다투지 말고 제발 우리 사이좋게 지내요.”
이때 창우가 젓가락으로 잉어찜 살을 큼직하게 집었다.
그것을 왼손바닥으로 받치며 은하의 입 가까이 가져갔지만 은하가 사양하자 자기 입으로 밀어 넣은 후 우직 우직 씹으면서 대답했다.
“너도 왜 잘 알잖아. 난 아버지와는 도무지 사고방식이 맞지가 않아.
도대체 그놈의 동북공정이 뭔지, 그게 터진 후론 더 내속을 뒤집어 놓고 있단 말이야.”
창우의 입에서 동북공정이라는 단어를 내뱉을 때는 그동안 보여 왔던 창우의 부드러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의 눈빛에서는 갑자기 날이 서기 시작했고 그 순간 나 역시도 경직되었다.
부자지간 대립하고 있는 전후사정을 알 수 있는 상황이기도 했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어쩌면 나 역시도 당사자라 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연히 나의 신경도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내 입장도 좀 생각을 해주어야지 말이야,
아버지가 동북공정이니 간도땅 찾기 운동이니 하면서 연변 지식인들을 충동질하고 다니는 문제 때문에 지난달에는 내가 당으로부터 주의처분까지 받았단 말이야.
향토연구소에서 주최하는 무슨 분기토론횐가 뭔가 때문에 한족 아이들하고 대판으로 패싸움이 나서는 온 연변사회가 시끄러웠단 말인지.
이거야 원! 자식 앞길을 가로막겠다고 작심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나?”
창우의 목소리는 자제력을 잃었는지 점차 흥분되었다.
그제야 내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은하가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변했다.
창우도 동생의 쩔쩔매는 모습이 안 돼 보였던지 이내 냉정을 되찾고 슬쩍 화제를 돌렸다.
“윤 선생, 미안합니다. 귀한 손님 앞에서 가정사문제로 큰 소리를 내고 말았소이다.
실례가 됐다면 용서해 주시오. 그나저나 올해 몇이나 자셨소?”
“예, 금년에 우리 나이로 마흔둘입니다. 부끄럽게도 주책없이 나이만 먹었습니다.”
이때 무대에서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와 사람들이 모두 무대 앞으로 몰려나가 춤을 추는 통에 내 말을 못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그가 다시 물어왔을 때 내가 마흔둘이라고 재차 이야기하자 의외라는 듯 짐짓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목소리는 한층 높아졌다.
“나보다도 아래로 보았는데, 동안입니다 그려. 요즘 어리게 보인다는 말이 최고로 치는 칭찬이지 않습니까.
나보다 여섯이 위시구먼. 역사를 전공하시는 학자이시라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