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76)

아버지의 벽 5

by 맥도강

자신보다 아래로 보았다가 여섯 살이나 많다는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전혀 동요하는 기색 하나 없이 그의 말투는 아랫사람을 대하듯 여전히 당당했다.

“학자까지는 아니고요, 동북아역사재단에서 연구원으로 있습니다.”

내 신분을 확인한 창우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자세히 훑어봤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우리 아버지 하고는 소통이 잘 되시겠구먼.

난 그딴 일에는 솔직히 말해서 관심이 없습니다.

옛날 고구려가 조선역사면 어떻고 또 중국역사면 어떻습니까?

이제 와서 길림성이 옛날에 고구려 땅이었으니 되돌려달라고 하면 중국이 되돌려준답디까?

난 그게 다 배부른 학자들이 떠드는 말장난이라 생각하는 사람이오.

아, 내 이 말은 취소하리다. 선생 앞에서 함부로 떠들고 말았소.

어쨌든 난 현실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지 케케묵은 옛날애긴 별로 취미가 없단 말입니다.”

창우의 말이 어찌나 직설적이고 거침이 없던지 내 신경을 적잖이 자극했다.

그렇잖아도 내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 안절부절못하던 은하로서는 나를 자극하는 오빠의 직설적인 표현에 더욱 초조한 기색이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대로 가만히 있었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우와 논쟁을 벌이고 싶지는 않았지만 묵묵부답으로 가만히 있는 것도 재단의 연구원으로서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작심을 하고서 그동안 참고 있었던 말을 토해냈다.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미래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으로부터 자긍심이 드높았던 고구려, 그리고 그 고구려를 계승했던 발해는 모두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를 일으킨 쪽은 오히려 중국입니다.

우리 민족의 혼이 담긴 우리의 역사를 저들의 역사라고 우기면서 역사왜곡을 시작한 쪽은 바로 중국이란 말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맞이해서도 우리가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사가 중국사라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중국의 속국도 아닌 우리나라가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히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간도 땅이 과거 우리 민족의 땅이었으니 지금 당장 이 땅을 모두 내어놓으라는 영토분쟁을 하자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다만, 우리 민족의 역사를 지킴으로써 우리 민족의 혼을 보존하려는 것입니다”


창우는 더 이상의 확전은 피하려는 듯 다시금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며 그 독한 40도짜리 들쭉술을 또다시 단번에 비웠다.

벌써 혼자서 한 병을 거의 다 마셔가고 있었다.

술에 취하여 기분이 좋아졌던지 창우의 표정은 좀 전보다는 많이 쾌활해졌다.

“자, 이제 우리 딱딱한 동북공정 이야기는 나중에 우리 아버지 하고나 하기로 하고, 나와는 건설적인 이야기를 좀 합시다.

어쨌든 선생의 신분은 확실합니다 그렇죠? 그럼 됐습니다. 결혼은요?”

그의 평소 성격이 이러했던지 창우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단도직입적인 대화에는 익숙하지 않았지만 그의 기분에 따라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미혼입니다”

“고매한 학자시니 공부하신다고 늦어질 수가 있지요.

아 요즘 마흔 넘은 노총각들 흔하지 않습니까?

문제는 기반은 잡았는데 결혼을 못했느냐, 아니면 기반을 못 잡아서 결혼을 못했느냐, 뭐 그런 것이 중요한 문제지 않겠습니까?”

창우는 내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그의 스타일대로 시원스럽게 말을 전개했다.

그러면서도 대화의 핵심을 향해서 달려가는 중이다.

나 역시도 배 교수의 거대한 벽을 창우를 통해서 무너뜨릴 수도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의 말에 고분고분 장단을 맞추어주었다.

“윤 선생, 우리 은하를 어떻게 생각하시오? 아, 뭐 여자로서 내 동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런 말입니다.”

“부끄럽습니다만, 은하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창우는 안심이 된다는 듯, 나와 은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떡였다.

창우가 육포 안주를 씹으며 은하에게 질문을 던졌다.

“은하야, 아버지는 뭐라고 하시던? 반대 안 하시던?”

그 대답은 사실 내가 해야 될 것 같았다.

배 교수로부터 ‘절대 교제불가’라는 엄중경고를 받은 사람은 바로 나였으니까 말이다.


내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단번에 마신 후 또다시 창우에게 잔을 채워주고서도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차마 은하 앞에서 배 교수가 했던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잠시 동안의 어색한 침묵이 흘렀을 때 창우는 짐작하겠다는 듯 일부러 한껏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은하야, 아버지는 걱정하지 마라.

주변에 한국 남자들에게 신세 망친 연변처녀들이 늘려있다 보니 걱정하시는 게 당연하지.

윤 선생!, 나도 다년간 대외무역사업을 하다 보니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안목은 있수다.

척 보면 알지. 윤 선생은 진품이요!, 내가 보증하지요.”

창우는 그 말과 함께 오른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고 그의 말과 행동에서 우린 폭소를 터트렸다.

나에 대한 창우의 호감은 배 교수가 가지고 있는 편견의 벽을 넘어서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나도 창우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왠지 모르게 오래된 묵은 사이처럼 어느 사이에 우린 마음의 문을 열고 있었다.

“그런데 윤 선생, 동북공정이라는 거 말이오.

내가 당원이라서 주워들은 게 있었어하는 말이 오만, 선생말대로 그거 한가로운 역사논쟁이나 하자는 게 아닙니다.

중국에서는 민감한 정치문제란 말이외다. 선생이 이걸 좀 이해해 주신다면 뭐 서로 간에 얼굴 붉히며 지낼 필요까진 없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창우는 동북공정이라는 민감한 주제에 대해서도 분명한 입장정리를 했다.

나를 자신의 가족으로 받아주는 대신, 그가 처해있는 입장을 고려하여 달라는 주문이었다.

부자지간에 이 문제로 심각한 갈등상이 존재했던 것도 배 교수의 언행으로 자신에게 미치는 불리한 상황 때문이다.

즉, 당으로부터 얼마 전에 받았다는 주의처분이 갈등의 주요 요인이었던 셈이다.

창우의 거침없는 주장은 계속되었다.

“역사학자들은 당의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서 열심히 역사책들을 뒤지고 있습니다만, 실제로 이 사업을 주도하는 건 공산당입니다.

윤 선생이 하는 일에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겠지만, 중국 당국의 처지를 헤아리면서 접근하는 게 쉽게 말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뜻입니다.

사실 내가 우리 아버지와 만났다 하면 다투는 것도 바로 이 문제 때문인데 내 처지는 손톱만큼도 생각을 안 해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외다.”


창우가 계산을 하고 있던 사이 은하와 난 식당 밖으로 나와 연변 하늘가를 빼곡히 수놓은 별들을 바라보았다.

윤동주 시인이 감탄했듯이 정말 초롱초롱한 색색의 별들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서울에서 바라보는 밤하늘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숫자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그래서 윤동주는 별을 헤아리면서 그 많은 밤을 지새웠는지도 모르겠다.

이때 지배인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남자와 십여 명의 아가씨들이 떼로 몰려나와 창우를 극진히 배웅하고 들어갔다.

아마도 홀에서 서빙하는 아가씨들의 절반 이상은 뛰쳐나온 것 같았다.

그런 모습에서 대북한 무역의 실무사업을 관장하는 창우의 영향력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

“참, 윤 선생. 이번 주 토요일에 사업차 백두산에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가는 게 어떻겠소?

다음날이 일요일이니 1박 2일로 이참에 아버지도 모시고 함께 다녀옵시다.

우리 아버지는 백두산이라면 껌뻑 넘어가시는 분이시거든!

사람 간에는 자주 만나야 정이 드는 법이지 않습니까?”

창우의 제안은 배 교수와 내 사이를 어떻게든 원만하게 풀어보려는 호의였고 나 또한 창우와 같은 생각이었으므로 창우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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