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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대고려연방 (73)

아버지의 벽 2

by 맥도강

내가 은하아버지의 질문에 답하는 사이, 은하가 다시 들어와 소복이 쌓인 재떨이를 휴지통에 비우고는 책상 위며 주변을 물걸레로 깨끗이 닦았다.

그리고 준비된 자그마한 찻상을 가져와 방 한가운데에 놓았다.

그제야 방안이 뭔가 정돈된 느낌이 들었다.

은하가 따르는 차의 향기가 방안 가득히 퍼지자 어딘지 모르게 불안했던 내 마음도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은하아버지의 권유로 마신 차 맛은 북경에서 자주 마셔서 익숙한 중국차와는 확실히 그 맛의 차원이 달랐다.


“어떻소? 백두산 자락에서 자라는 야생차요. 올봄에 내가 직접 따왔지.

시중에서 파는 중국차와는 그 맛의 깊이가 근원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지요.”

난 고개를 끄덕이며 역시 그렇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우리 은하와는 어떻게 만났소?

윤 선생의 연배를 보아하니 결혼은 하신 것 같은데…”

자신이 진짜로 묻고 싶은 궁금증을 더 이상은 못 기다리겠다는 태도다.

은하가 나에 대해서 설명했던 요식적인 설명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 간의 관계를 확인하고 싶은 아버지로서의 보호본능이었다.


배 교수의 질문에 답변하기 위하여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작년 이맘때까지 북경대 국제관계대학원에서 교환연구원으로 1년간 공부하고 있을 때 알게 됐습니다.

제 나이는 우리 나이로 마흔둘입니다만 부끄럽게도 아직 미혼입니다.”

“아버지 제가 말씀드릴게요.”

초조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은하가 대신 끼어들어 설명하려고 했으나 배 교수는 엄한 표정으로 제지했다.

나로부터 직접 들어서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할 참이다.

“은하는 가만있거라. 윤 선생한테 묻고 있지 않느냐.

선생, 과년한 딸아이를 일가친척 하나 없는 생면부지의 북경에 보내놓고 아비로서 어디 마음 편할 날이 있었겠소?

사실 한국관광객을 상대하는 관광가이드라는 직업이 좋게만 볼 수가 없지요.

오늘 또 이렇게 느닷없이 선생을 모시고 나타나니 내 솔직히 당황스럽소.

그러니 아비로서 궁금한 점이 어디 한둘이겠소? “


은하로부터 한국 남자들에 대한 편견이 얼마나 심각한지는 익히 들어 알고 있지만 우리 둘 사이의 관계를 명확하게 파헤치려는 그의 추궁에 나는 진땀을 흘렸다.

배 교수는 그의 황소 같은 큰 눈동자를 드러내며 서슬이 퍼럴 만큼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윤 선생한테 이런 말하기가 좀 그렇소만,

여기 연변에서는 한국에서 성공한 총각이네 홀아비네 하면서 순진한 처녀들을 망쳐놓고 도망가는 작자들이 한둘이 아니었소.

실정이 그렇다 보니 액면 그대로 윤 선생을 대하지 못하는 내 심정을 이해하여 주기 바라오.”


사실, 한국과 중국이 공식적으로 수교한 십여 년 전부터 연변지역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이곳 동포들을 농락하여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사기 사건들이 많았다 한다.

지금 그의 표정에선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응어리진 한국인들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나 역시도 그 경계의 대상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었다.

좌불안석의 표정으로 앉아있던 내가 안 돼 보였던지 은하가 아버지의 경계심을 다소라도 풀어보려고 다시 나섰다.

“아버지, 윤 선생님은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분 들하고는 다르십니다.

대학에서 한국사를 가르치는 교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시인이시고요.”


이 말을 들은 배 교수가 천천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흥미롭다는 듯 하는 말이다.

“교수시라고요? 전공이 한국사시고?”

아버지의 지독한 편견을 조금이라도 허물어 보기 위하여 은하는 내가 배 교수와 같은 지식인임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과는 다른 내용이 있었으므로 내가 나서서 교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닙니다. 쑥스럽습니다만 모교에서 시간강사를 잠시 했을 뿐입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시를 쓰는 사람도 아니고 가끔씩 습작정도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중국의 역사왜곡을 전담하는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 2실에 소속돼 있습니다.”


나로부터 직접 나의 정확한 신분을 확인한 배 교수는 다소나마 경계심을 내려놓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는 무거워 보이는 뿔테안경을 벗어 앉은뱅이 나무책상 위에 올려놓은 후 손수 녹차 한잔씩을 따라주었다.

또다시 담배 한 대를 꺼내어 입에 물고는 창문을 응시하며 말했다.

“순전히 공무 차 날 찾아온 손님한테 내가 너무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윤 선생, 용서하시오.”

그의 표정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공무차라는 말로 오늘 만남의 선을 분명하게 긋고 있었다,

그의 말속에서 내 신분과는 관계없이 한국 남자인 이상 자신의 딸과는 엮이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선생이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원이시라 하니 하는 말이지만, 한국에서 하는 일을 보면 참으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오.

북한이야 중국이 생명줄을 딱 틀어쥐고 있으니 가타부타 말할 처지가 못 된다지만, 한국에서는 대체 동북공정에 대한 국가적인 의지가 있기나 한 거요?”


어쨌든 화제가 바뀌었으니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지만 방금 이 질문은 질문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시비에 가까웠다.

녹차 한 모금을 더 마신 후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천천히 대꾸하기 시작했다.

“동북공정에 대한 한국정부의 입장은 확고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산하의 국책연구기관으로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출범한 것입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는 앉은뱅이책상 위에 수북이 쌓여있는 중국의 역사교과서들을 손바닥으로 내리치면서 노려봤다.

순간적으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기 있는 고구려 발해 관련 역사서와 관광안내 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이것들이 최근에 새로 발행된 중국아이들을 가르치는 역사교과서예요.”

이미 여러 차례 꼼꼼하게 읽어본 후 문제의 내용들을 일일이 형광펜으로 표시해 두었던 모양이다.

해당 페이지들을 손쉽게 찾은 배 교수는 직접 손으로 그곳들을 가리키며 나에게 확인시켰다.

“이것 봐요! 지금 고구려만 문제가 되는 게 아니에요.

아예 통째로 우리 고대사를 송두리째 왜곡하고 있어요.

고구려의 후예들이 세운 발해를 독자적인 나라가 아닌 당나라의 일개 군으로 규정하면서 발해건국을 주도한 세력은 말갈족이고 발해초기의 정식국호도 말갈이었다고 날조하고 있단 말이오.”


그는 다시 앞으로 몇 장을 더 넘기더니 노란색 형광펜으로 표시해 둔 부분을 손가락으로 힘을 주어 가리키며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내게 따지겠다는 표정이다.

“여기를 봐요, 심지어는 고조선도 주나라의 무왕이 보낸 은나라의 유민 기자가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뿌리인 고조선마저 중국의 역사라고 버젓이 날조 해났어요,

교육현장에서는 이렇게 엉터리 역사서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한국에서는…”

여기까지를 말한 후 그는 재떨이에서 하염없이 타고 있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었다.

천장을 향해서 연기를 길게 쏘아 올리더니 마치 비웃듯이 기분 나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뭐요, 우다웨이 외교부부장이 한국으로 날아가서 역사교과서에 고구려사를 왜곡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고요?

그것도 문서가 아닌 말로써만 해준 약속 하나만 달랑 믿고 이제는 다 해결됐다는 듯이 안일하게 대처하고 있는 것이 작금의 한국정부가 아닌가 말입니다.

그러고도 한국정부의 의지가 확고하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

어찌나 흥분하면서 고함을 쳐 대던지 그의 침이 내 얼굴에까지 튀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침을 닦을 수도 없었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은하가 무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다시 얼굴을 숙였다.

나는 이 짧은 만남만으로도 배 교수의 성격을 훤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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