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의 교육장 2
옛집이 저만치 멀어져 가자 그는 고개를 돌리며 다시 하던 말을 계속했다.
“중국은 집단농장을 인민공사 체제로 운영했었거든,
1958년의 대약진 운동 때 중국농촌 전 지역에서 인민공사가 설립되었다가 아마도 1982년도에 공식적으로 폐지됐지요,
그때 인민공사가 해체되면서 농민들한테 자경을 조건으로 골고루 토지를 나누어서 임대해 주었단 말이지,
여기 단위로는 만 평씩이니까 한국 단위로는 한 삼천 평씩 돌아갔을 거야 아마. 그런데 3년을 채 못 넘기더군. 그것 참, 허허허!”
이 말과 함께 배 교수는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또다시 차창을 바라보며 뭔가를 회상하는 모양이다.
“자기네들끼리 사고팔고 하더니만 한 삼 년쯤 되니까 결국은 몇 명의 손에 몽땅 다 넘어가고 마는 거야.
아직까지도 분배받은 자기 땅에서 소작을 붙이며 여기에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개는 도회지로 나가 날품들이나 팔고 있지.
이들이 바로 중국의 농민공들 아니겠어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어.”
삼 년이라는 말에 나 역시도 자본주의의 역동성에 놀라고 말았다.
“그런데 교수님, 중국에서도 토지매매가 합법적으로 가능합니까?”
배 교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래도 명색이 공산당이 지도하는 정치체제인데 그건 안 될 말이지.
건물은 소유권을 인정해 줘도 토지만큼은 매매가 금지된 국유재산이란 말이거든.
법적으로는 경작권의 개인 간 거래도 엄연히 불법이지만 사실상 당국에서 알면서도 묵인해 주는 거지.
인민공사 해체 후 토지를 균등하게 분배하여 주고는 너희들끼리 알아서 한번 살아보라고 했지만, 개중에는 똑똑한 놈이 있는가 하면, 또 멍청한 놈도 있었지.
잘 살아보겠다고 악착같이 일하는 놈이 있는가 하면, 허구한 날 술이나 퍼마시고 마작이나 하려는 놈도 있더란 말이지.
그리고 하는 일마다 운 때가 좋아서 잘되는 놈이 있는가 하면, 또 반대로 하는 일마다 실패하는 놈도 있고,
하였든 이 세상은 종류가 다른 사람들이 섞여 있다 보니 중국공산혁명 이전의 불평등 경제구조로 환원하는데 고작 삼 년이 걸리지 않았거든.
그래서 자본주의가 무섭더라는 거예요.”
아버지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듣고 있던 은하가 뒤를 돌아보며 말벗을 자청하고 나섰다.
“아버지, 중국은 형식만 공산주의지, 내용은 한국보다도 더한 자본주의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개인 간의 토지매매를 금지하는 법은 이미 사문화된 법이지 않습니까?”
“그런가? 개인 간 거래하다가 처벌받은 사람은 아직 못 봤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윤 선생, 어쨌든 중국에서는 또다시 대지주와 소지주, 소작농, 이농자가 생겨나서 공산혁명 이전의 농촌상태로 되돌아가버렸단 말입니다.
하기 좋은 말로 중국식 공산주의네 중국식 자본주의네 하지만, 중국이 다시는 인민공사 시절로 되돌아갈 수 없듯이 적어도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공산주의 경제이념은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 있지요.”
배 교수의 말을 들으면서 구소련이 해체되고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위풍도 당당하게 서있던 레닌의 동상이 수난을 당하던 날, 서 교수님께서 들려주셨던 말씀이 생각났다.
공산주의 경제이념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그 이념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의 핵심인 자율적 의지라는 것은 사실은 인간의 타고난 본능인 욕심의 다른 말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욕심이라는 본능의 지배를 받는데, 이 본능이 작동하는 현실에서는 공산주의는 자본주의한테 백전백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하셨다.
똑같이 일해서 똑같이 분배한다는 것은 욕심이라는 본능이 존재하는 인간 세상에서는 열심히 일할 동기부여가 상실되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생산성과 창의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었다.
자율성보다는 도식적인 평등을 앞세운 20세기 이후의 공산주의 경제실험은 창의성과 생산성의 낙후로 인하여 실패했다고 결론지었다.
그런데 그 원인은 다름 아닌 인간의 타고난 욕심, 바로 그 욕심이라는 본능이 화근이라고 진단하셨다.
물론 혁명의 초창기에는 혁명 전사들의 뜨거운 열정이 살아있었어 지도층이 솔선수범하는 모범을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시적으로만 가능했던 일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당원들 스스로도 본능에 제압당하게 되면서 이것은 곧 지도층의 부패로 나타났고, 이로써 교육만으로는 더 이상 타고난 본능을 억누를 수 없었다.
오죽했으면 2,500년 전 석가모니께서도 욕심이 화근이니 욕심을 버리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러나 사람이 어찌 욕심을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의 타고난 본능인 것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배 교수가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이건 내 생각인데, 어쩌면 북한도 남북한의 체제경쟁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내부적으로는 인정하고 있을 거라고 봐요.
90년대 고난의 행군시절을 거치면서 모두가 인정했다고 보는 거지.
문제는 그 패배를 공식적으로 시인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한국에 흡수통일 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단 말이에요,
과연 한국 사람들이 같은 동포로서 동등한 대접을 해주겠느냐는 우려가 있을 거라고 봐요.
흡수통일을 당하는 쪽에서 보자면 사실상의 항복을 의미하는 것이거든,
한국 사람들로부터 멸시받고, 차별받고, 천덕꾸러기 취급이나 당하는 2등 국민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강한 우려가 있을 거란 말입니다.
아마도 그런 것이 두려워서라도 쉽게는 손을 들지 않을 겁니다.
내가 아는 북한 사람들 중에는 전쟁을 했으면 했지 굴욕적인 삶을 살겠다는 사람들은 별로 없거든!
이 사람들이 걸핏하면 자신들은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는데 그만큼 자존심들이 대단하다는 걸 알아야 해요.
이것을 한국 사람들이 명심해야 합니다!”
방금 배 교수가 한 말은 나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한국이 체제경쟁에서 이겼다는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언젠가는 북한을 흡수통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말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동포를 따듯하게 포용하는 동포애를 발휘하지 않는다면 큰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였다.
얼마 전 한국에 정착하여 살아가는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는 실로 충격적이었다.
처벌만 하지 않는다면 다시 북한으로 되돌아가고 싶다고 응답한 탈북자가 40퍼센트가 될 정도로 그들은 한국사회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롭다고 했다.
그들이 한국사회에서 얼마나 차가운 시선을 느꼈으면 또다시 미국이나 영국으로 망명을 신청하는 탈북자들이 늘어나고 있겠는가.
그들을 외롭게 만드는 우리 사회의 차가운 분위기를 생각해 볼 때 방금 배 교수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탈북자들이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로 방치된다는 사실은 통일한반도의 앞날에 적지 않은 부담이 틀림없다.
같은 민족으로서의 포용력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자칫 통일을 이룰 수 있는 결정적인 시기에 주저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이것은 외국인 노동자들처럼 2등 국민으로 전락할 바에는 차라리 배가 고프더라도 자존심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영구분단을 지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소름이 돋아났다.
한참을 달려온 택시가 어느덧 집안시에 도착했다.
이곳이 바로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로서 400년간 고구려의 최전성기를 함께했던 국내성이 있던 곳이다.
잠시 택시에서 내려 고구려의 유적지를 한눈에 들어오도록 만들어놓은 대형 관광안내판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에 있던 소수민족으로서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분명히 했다.
천 년 동안이나 중원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자랑스러운 유적지에 왔다는 생각보다는 차라리 동북공정의 거대한 교육장에 왔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이런 참담한 현실에 내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고 배 교수 특유의 울분에 찬 목소리가 들렸다.
“보시오! 윤 선생. 중국은 이렇게 단 한 번도 동북공정을 포기한 적이 없단 말입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아직까지 동북공정이 단순한 학술적 차원이네 아니네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한심한 일이냐 말입니다.”
그의 말에 마치 마치 중죄인이 된 심정으로 난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왜 우린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하고 있을까? 그것은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배 교수는 특유의 톤 높은 목소리로 통탄할 일이라며 격정적으로 울분을 토로했다.
순간 그의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은하가 재빨리 손수건을 꺼내 아버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배 교수는 은하의 손수건을 받아서 눈가를 다시 닦은 후 천천히 돌아서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오. 윤 선생. 내가 너무 흥분했던 모양이오. 나이 먹은 사람이 주책없이…”
배 교수는 손수건을 은하에게 돌려주며 허탈하게 웃고 있었고 그 웃음은 차라리 허무에 가까웠다.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다시 올랐다.
창문을 모두 내리고 시원한 가을바람을 맞이하자 우리 일행의 침울했던 분위기도 다시금 원래 상태대로 돌아왔다.
서문 쪽의 도로를 따라가면서 최근에 지은 청파정(淸波停)이라는 2층 누각을 볼 수 있었다.
차에서 다시 내려 모두 정자에 올랐다.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에 버젓이 중국식 정자를 지은 이들의 의도는 뻔할 것이다.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민족이었고 그 사실을 확실하게 해 두려는 치졸하게 계산된 의도가 분명하다.
이때 통구에 놓인 다리너머로 북한 땅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황량한 고립무원의 모습으로 생동감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 교수의 말대로 스스로 생존할 수 있는 자구책도 없이, 다만 버티고 있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곧 매서운 엄동설한이 몰려올 텐데 강 건너로 바라보이는 황량한 고립무원의 모습이 오늘날 우리 민족의 절반 북한이 처한 현실이다.
이러한 비극의 시작은 민족의 분단으로부터 시작되었고, 문제의 해결은 통일뿐인데도 그 여정은 결코 간단치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