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가는 길 3
불현듯 어제 집안유적지를 가면서 배 교수가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자국민을 먹일 식량마저 부족한 북한으로서는 다만 버티고 있을 뿐 낡은 체제경쟁은 이미 결론이 난 마당이다.
하지만 세계로부터 고립된 북한이 자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는 것, 문제는 그다음의 진행상황이다.
배 교수의 충고는 우리가 천민자본주의의 못난 근성들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결코 북의 동포들이 동의하는 평화통일을 주도할 수 없다는 말이다.
“교수님의 충고는 지당하십니다.
재외동포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개선할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과 중국에 거주하는 동포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 차별적인 인상을 주는 것 자체가 분명히 잘못된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의식 문제인데, 배 과장님 말씀대로 점진적으로 개선되고 있다니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다만 더 개선되어야 한다는 배 교수님의 말씀에도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두 입장을 두루두루 배려하는 나의 중재 덕분인지 차 안의 분위기는 조금 전보다는 한결 부드러운 분위기로 반전되었다.
마침 휘파람이라는 경쾌한 북한가요가 흘러나오자 모두들 들썩들썩하는 분위기로 바뀌었고 최 씨가 볼륨을 조금 더 올리라고 한다.
테이프가 다 돌아갔는지 카오디오에서 테이프를 꺼내던 창우가 무슨 음악이 듣고 싶은지 은하에게 물었다.
핸드백 속을 뒤지던 은하가 70년대 유행했던 컨츄리음악 테이프를 창우에게 건넸다.
평소 내가 컨츄리 음악을 즐겨 듣는다는 사실을 은하는 잘 알고 있었다.
북경에서 은하와 만날 땐 항상 휴대용 카세트를 갖고 다니면서 컨츄리음악을 듣곤 했었다.
뒷자리에서 혼자 편안히 누워 휘파람까지 불면서 장단을 맞추던 최 씨가 일어나며 점심을 먹고 가자고 하여 창우가 백미러로 최 씨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저씨, 작년에 갔던 그 한정식 집 어떻습디까? 그쪽으로 모실까요?”
“조선족이 한다던 그 집 말이지? 거기도 좋고 아무 데나 가자고.”
잠시 후 차는 정원이 잘 가꾸어진 아담한 식당 앞에 도착했다.
최 씨가 화장실을 간다기에 벌써부터 소변을 참고 있었던 나도 함께 따라나섰다가 화장실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만 돌아서고 말았다.
마을사람들이 공동으로 이용한다는 길거리에 있는 재래식 중국 화장실은 나지막한 칸막이만 있을 뿐 문도 없었고 심지어는 정화조도 없어 오물들이 그대로 하천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눈치도 없이 하마터면 구역질을 할 뻔했다.
“선생님, 식당에도 화장실이 있습니다. 거기를 이용하세요.”
은하였다. 지켜보던 은하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식당 마당에 있는 화장실로 안내했다.
수세식은 아니었으나 다행히 깨끗한 우리네의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같은 재래식이라도 중국과 한국의 차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확인하는 것 같아 새삼 선조들에게 감사하고픈 마음이 들었다.
식당 안은 백두산을 여행하러 온 한국인들로 북적거렸다.
식사가 끝나고 은하가 준비해 준 커피를 받아 들고 마당으로 나왔다.
내가 권하는 국산 담배를 받아 든 창우는 정원에 흐드러지게 피워있는 코스모스를 만지작거리는 은하가 귀엽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윤 선생, 우리 아버지라는 분 알고 보면 참 불쌍한 분이지요.
자신이 무슨 역사적 사명을 타고 이 땅에 태어났다고 대학을 박차고 나와서는 저 고생을 하는지 벌써 몇 년 되었죠, 동북공정 프로젝트가 시작되던 해가 한일월드컵을 하던 해였으니까.
변강사지연구중심에서 주도했다지만 동북 3성의 성위원회가 지원을 했으니 사실상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의 합작품이라고 봐야 합니다.
사실 내가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나도 동북공정에 대해서는 알만큼은 아는 편이오.
그런데 아버지가 학생들을 선동하며 동북공정의 음모가 어떻다느니 반대운동을 참 많이도 하셨지.
지역신문에도 고구려사 왜곡의 부당성을 알린다며 여러 번 기고도 하지 않았겠소.
조선족 지식인들을 규합해서는 간도 땅 찾기 운동을 벌이자며 선동까지 하고 다녔으니 당에서나 공안에서 가만있었겠어요. 난리가 났지!
하마터면 나까지도 출당조치를 당할 뻔했으니 아버지는 대학에 남아있기가 힘들었죠.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합니다.”
가슴이 답답하던지 창우는 나에게 담배한대를 더 달라는 시늉을 했다.
“고등학교 때 정말 어렵게 공산당에 입당했더니만, 그날로 아버지가 집을 나가라고 하더군.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대판 싸우고 집을 나온 후로 우린 정말 거의 원수지간처럼 지냈어요. 그래도 어쩌겠소? 날 낳아준 아버진데.
요즘 들어서는 기력이 빠진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측은한 생각이 들지 않겠소.”
창우가 하는 이야기를 먼발치에서 듣고 있던 은하가 색깔별로 꺾은 코스모스 꽃잎 중에서도 유독 노란색 코스모스를 한번 맡아보라고 내 코 앞으로 바짝 들이밀었다.
나는 코스모스의 향내보다는 오히려 은하의 향기가 더 좋았다.
“이젠 오빠가 아버지를 좀 이해해 주세요.
여태 재가도 안 하시고 엄마 없이 우릴 키우시느라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너무 불쌍하시잖아요.
전 이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힘들고 고달픈 길이지만 평생을 올곧은 민족사학자로 살아오신 분이지 않습니까?
학자로서의 양심을 지키시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자처하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창우는 나를 바라보며 살며시 웃었고 그 웃음은 동생이 대견하다는 의미였다.
“그래 오빠는 다른 욕심은 없어. 단지 우리 식구들이 행복했으면 하는 거지.
아버지도 이젠 힘든 길을 그만 가셨으면 좋겠어.
그리고 무엇보다도 난 우리 은하가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이야. 윤 선생, 내 말 알겠죠?”
어느새 지긋지긋하던 비포장도로도 끝이 났다.
이제 광활한 벌판을 시원하게 가로지른 국도 위를 창우의 4륜구동 자동차는 거침없이 내달렸다.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무료하게 달려가는 것 같아 배 교수의 말벗이나 되어줄 겸 고개를 돌렸다.
“교수님,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북한이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대체 무슨 사정이겠습니까?”
말벗을 자청하는 나에게 배 교수가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사정이라면, 오늘날의 북한 사정으로 볼 때 고구려사 왜곡문제를 거론할 만큼의 여유가 없다고 봐야겠지.
내부의 경제적인 사정으로 보아도 그렇고, 국방상의 사정으로 보아도 그렇고, 모든 것이 역사문제를 거론할 만큼 한가롭지 않다는 이야기 아니겠어요?
일전에 내가 잘 아는 북한 학자가 연변대학에 세미나 차 왔을 때,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해서 북한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어요.
그랬더니 그렇잖아도 한국학자들과 협의를 했다는 거야.
독도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이 좀 세게 나가줄 테니 중국한테는 한국이 도맡아서 대응을 해달라고.
무슨 말인가 하면 북한도 중국의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거예요.
다 알면서도 대놓고 대응을 못하는 그들의 속사정을 달리 표현한 말이지 않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