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가는 길 2
숲 속의 맑은 공기와 구수한 커피 향, 그리고 커피와 함께 마시는 담배연기는 방금 전에 있었던 씁쓸한 일들도 모두 잊게 했다.
창우가 살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의 딱 벌어진 체구와 우락부락한 인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가끔씩 이렇게 희죽거리며 웃는 순박한 모습이 이채로웠다.
“요즘 중국에서는 돈이 미덕이고 돈 많은 사람을 최고로 친단 말입니다.
연길에서 백두산을 가자면 이 길이 유일한 길이거든요.
산골 오지에 사는 이곳 사람들도 돈을 벌려고 환장들을 하지요.
특히 조선족들은 교육열이 높아서 한족들보다는 오히려 더하단 말입니다.
연변 어디를 가나 한집 건너서 한국에 돈 벌러 안 간 사람들이 없을 지경인데 어떤 마을은 아예 통째로 텅텅 비어 있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여기같이 산골 오지에 사는 저 아주마이 같은 사람도 돈을 벌려고 눈이 벌겋다고 봐야 됩니다.
특히 윤 선생 같은 한국 사람들은 완전히 봉입니다, 봉!”
창우는 봉이라는 말을 하며 무엇이 재밌는지 내 시선을 피한 채 한참을 웃었다.
나도 그의 말을 들으며 씁쓸한 표정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 사람이 봉이라고요? 그것 참 재밌는 말입니다.”
“이게 다 따지고 보면 한국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겁니다.
한국 관광객들한테는 천 원이 어디 돈입니까.
커피 한잔을 마시고 천 원씩을 주어 버릇하다 보니, 이 사람들도 이제는 한국 사람들한테는 천 원씩 받는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여기까지를 말하던 창우가 이제 그만 출발하자며 먼저 일어났다.
이때 차 방향으로 걸어오던 나를 발견한 배 교수가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최 씨가 어느새 일어났던지 정자나무 아래에서 은하가 준 옥수수를 벌써 두 개째 먹고 있었다.
배 교수는 나를 자기 옆으로 앉으라 하면서 그의 오른쪽 귀를 땅바닥에 갖다 대며 말했다.
“윤 선생, 여기 앉아서 이 땅의 숨결을 느껴보시오!
고조선부터 자고이래로 이 땅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었단 말입니다.
자세히 들어봐요. 우리 민족의 숨소리가 느껴질 테니…”
배 교수의 다소 엉뚱한 행동일지라도 나에 대한 격의 없는 선의로 생각하고 맞장구를 쳐주고 싶었다.
그의 맞은편에서 땅바닥 위에 무릎 꿇은 모습으로 배 교수처럼 오른쪽 귀를 땅에다 바짝 밀착시키고는 과연 그렇다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이때 최 씨는 다 먹은 옥수수를 숲 속으로 내던지며 자리에서 일어서던 은하에게 물었다.
“은하야 옥수수 하나에 얼마씩 받데?”
은하가 장난기 섞인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최 씨를 돌아봤다.
“아저씨, 맛이 어떻습니까?
고거이 하나에 한국 돈으로 이천 원씩이나 받는 비싼 금옥수수입니다.”
이 말을 들은 최 씨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벌떡 일어섰다.
날강도도 아니고 옥수수 하나에 어떻게 이천 원씩이나 받느냐며 따지러 가겠다는 걸 내가 제지하며 나섰다.
은하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최 씨에게 다시 말했다.
“아저씨, 녹차는 맛이 어땠습니까? 고거이 한잔에 천 원입니다.”
두 사람이 하는 행동을 보고 있던 우린 폭소를 터트렸지만 배 교수는 정색한 표정으로 일어나면서 화난 말투로 말했다.
“한국 사람들이 순진한 조선족들 다 버려 놓았어.
돈 몇 푼 있다고 천한 마음으로 적선이나 하더니만 꼴좋게 되었단 말일세.
우리 동포들이 언제부터 이렇게 볼썽사납게 되었는가.
동포 간 위하는 마음이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으니… 에이 몹쓸 사람들.”
배 교수의 두툼한 검정색 뿔테안경 속으로 비친 눈동자에는 한가득이나 서글픔의 감정들이 서려 있다.
못 볼꼴을 봤다며 빨리 출발하자는 배 교수의 독촉으로 우리는 모두 차에 올랐다.
한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 은하가 뒤를 돌아다보며 아버지의 기분을 풀어주려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아버지가 이해하세요. 얼마나 살기가 고달프면 그러겠어요.
어린애를 등에 업고서 장사하는 모습이 여간 고달파 보이지 않았어요.”
배 교수는 차창을 통해서 멀어져 가던 그 아낙네를 가엾다는 표정으로 돌아보며 은하의 말에 화답했다.
“그 아낙네야 무슨 잘못이 있겠나.
내가 화가 나는 건 우리 동포들이 언제부터 서로가 서로를 속여 먹는 관계가 돼버렸냐 말이야,
동포 간에 서로 위하는 마음이라곤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볼 수가 없는 처지가 돼 버렸나 말일세.
이게 다 값싼 동정이나 베풀면서 같은 동포를 2등 국민 취급하는 천민자본주의 근성 때문이겠지.
이런 못난 마음을 우리 민족이 극복하지 못한다면 고토회복은 고사하고 통일조차도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야.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배 교수의 말이 끝나자 우린 모두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고 분위기는 어색하게 변해갔다.
그때 창우가 테이프 하나를 골라 카오디오에 꽂았다.
어제 북한식당에서 들어 익숙한 경쾌한 음률의 북한음악이 차 안에 울려 퍼졌다.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배 교수와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던 창우가 나를 돕기 위해서 작심한 듯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모든 잘못을 한국 사람들에게만 돌리시는데 아까 아주머니건만 해도 그게 어디 한국 사람들 잘못입니까?
터무니없이 바가지 씌우는 그 아주머니가 잘못되었지.
그리고 아버지! 수교초창기 일부 한국 사람들이 연변에서 저지른 짓거리들을 생각하시는 모양인데요.
지금은 그런 일 없어요. 제발 생각 좀 바꾸세요!”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가 천민자본주의에 물든 이중인격자쯤으로 바라보는 배 교수의 편견을 깨뜨려야만 은하와 나와의 관계도 진전이 있을 것이다.
방금 창우가 한 말은 나를 돕기 위해서 한 말이었지만 창우의 평소 생각이 그렇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부자지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최 씨가 끼어들며 말했다.
“그래 배 교수. 윤 선생 같은 분은 믿음성이 가는 정직한 사람 같은데, 윤 선생 보는 데서 자꾸 그러면 분위기가 이상해지잖아.
인제 마음 풀고 좋은 이야기나 하면서 가자고.”
자기 말이라면 무조건 편들어 주던 최 씨마저도 거들고 나섰으니 배 교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나의 어깨를 두드리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최 씨가 은하에게 금옥수수 하나 더 달라고 말하자 차 안은 모처럼만에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윤 선생, 오해 마시오. 다 그렇다는 건 아니니깐.
그렇지만 우리 민족의 중심역할을 해야 하는 건 분명 한국이지 않소.
통일을 주도해야 할 한국 사람들이 돈 좀 있다고 동포를 우습게 알고 동포들 눈에 피눈물이나 흘리게 하는 그런 천한 마음 상태로는 통일을 주도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지금의 북한사람들이 한국주도의 통일에 동의하겠어요?
미국이나 일본 유럽에도 우리 동포들이 많이 있다지만 중국에 사는 우리 조선족들과 러시아에 있는 고려인들 그리고 탈북자들과는 그 대응하는 방식이 다르지 않소이까!
그래서는 자존심하나로 버티며 살아가는 북한사람들의 동의를 구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이지.
한국에서는 동남아에서 돈 벌러 온 외국인 노동자들과 우리 조선족들을 똑같이 취급한다면서요?
그래서 내가 천민자본주의라고 말하는 겁니다.
동포 귀한 것을 알아야지 어떻게 된 게 매사에 돈으로만 사람을 평가하려고 하니, 그런 것이 천한 마음이 아니고 뭐란 말입니까?”
배 교수의 말이 끝나자 또다시 분위기가 냉랭해졌다.
모두들 말은 안 했지만 그동안 창우가 무엇 때문에 아버지와 사사건건 대립하는지 알 수 있었던 배 교수의 고집불통에 다들 고개를 내젓는 표정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