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가는 길 1
토요일 오전, 끝없이 펼쳐진 비포장도로를 따라 먼지구름 펄펄 날리며 차는 쏜살같이 달리고 있다.
연길시내에서 백산시까지는 족히 다섯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운전대를 잡은 창우는 차가 덜컹거리건 도로가의 사람들이 먼지를 뒤집어쓰건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섭게 내달렸다.
도로 주변의 마을사람들도 이미 익숙한 광경인지 인상을 찡그리거나 항의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저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에서 순박한 그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조수석에는 은하가 앉았고, 그 뒷좌석에는 배 교수와 내가 각기 차창을 바라보며 앉아있다.
맨 뒤 칸은 최 씨의 전용좌석인지, 그는 아예 담요와 베개까지 준비하여 편안히 누운 채 코까지 골며 자고 있다.
아마도 여러 번 이 차를 타고 장거리 역행을 해 본 경험이 있었던 모양이다.
연길시내를 빠져나온 지도 두어 시간은 된 것 같았다.
창밖의 풍경은 여기가 중국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는다.
작은 상점의 간판마저도 어디를 가나 위에는 한글, 그 아래에 한자로 써놓았다.
조선족 자치주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률적 행위라고 했다.
지나치는 길옆의 마을 풍경은 마치 70년대의 우리네 시골 모습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간간히 도로공사를 하는 모습이며 공장건물을 짓고 있는 모습, 그리고 노후한 건물을 헐어내고 연립주택을 짓고 있는 모습에서 중국의 거대한 개발붐이 이 시골 마을까지 미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아직은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오지마을이 더 많아서인지 한적한 시골풍경을 감상하는 재미에 푹 빠져들었다.
“창우야, 담배 한 대 태우고 가자.”
배 교수의 이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두 시간을 넘게 비포장도로를 달려왔더니 그 피곤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창우는 인적이 없는 한적한 숲길 가에 차를 멈추었다.
옆에는 울창하게 가지를 뻗어 넓은 나무그늘을 형성하고 있는 오래된 정자나무가 한그루 있었다.
배 교수는 정자나무를 둘러친 석축 쪽으로 다가가 앉았고, 창우와 난 십여 미터 떨어진 숲길로 걸어가면서 각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일회용 라이터가 말을 잘 듣지 않는지 연속적으로 라이터를 켜더니 겨우 담배에 불을 붙이는 배 교수에게 은하가 물었다.
“아버지, 아저씨도 깨울까요?”
배 교수가 차 안에서 자고 있는 최 씨 쪽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냥 둬라. 저 사람은 남이 깨우는 걸 싫어하는 성미니까 일어날 때가 되면 일어나겠지.”
창우와 내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방향에서 앞쪽을 바라보니 허름한 민가가 한 채 있었다.
그 앞에서 아기를 업은 젊은 아낙네가 좌판 위에서 커피와 삶은 옥수수를 팔고 있다.
그렇잖아도 커피 한잔이 생각났던 터라 창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배 과장님. 우리 저쪽으로 가서 커피 한잔 할까요?”
“좋죠, 커피 한잔하고 갑시다.”
창우는 우리 쪽으로 다가오던 은하를 바라보더니 피우던 담배를 땅바닥에 내던지며 구두앞창을 좌우로 비벼 됐다.
“은하야 요즘도 아버진 커피 안 드시네?”
“예, 커피는 안 드십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여쭤보겠습니다.”
은하가 아버지 쪽을 바라보며 커피 드시겠느냐고 큰소리로 물었지만 배 교수는 담배를 집은 오른손을 좌우로 흔들어 보이면서 싫다는 표시를 했다.
“아버진 원래 커피를 안 좋아하시니까 녹차가 있으면 좋겠는데…”
함께 좌판 쪽으로 걸어가며 은하가 독백처럼 하는 말이다.
리어카를 개조한 좌판에는 방금 삶은 옥수수들이 큰솥에 담겨 모락모락 김을 내고 있었고, 일회용 커피를 탈 수 있는 재료들이 준비돼 있었다.
우리가 걸어오면서 한국말을 하는 것을 들었던지 아이를 업은 아낙네가 연변사투리로 반갑다는 인사를 했다.
이곳에서 계속 들어온 말이지만 북한 억양과 엇비슷한 정감이 가는 구수한 말이다.
“어서 오시라요. 방금 삶은 맛 나는 찰옥수수입니다. 커피도 있습네다.”
“동포 아주머니시네요. 반갑습니다. 배 과장님, 커피 하실 거죠? 은하도?”
내가 계산할 요량으로 좌우에 서있던 창우와 은하에게 묻자 모두들 그렇다고 대답했다.
“아주머니, 커피 석 잔 주시고요. 혹시 녹차도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몇 잔이나 드시겠습니까?”
아낙네는 당연히 있다고 웃으며 말했고 이 말을 들은 은하가 다행이라는 표정이다.
“최 씨 아저씨도 드셔야 하니까 두 잔 주십시오.”
그리고 은하는 최 씨 아저씨가 특별히 좋아한다며 옥수수도 몇 개 싸달라고 했다.
창우가 계산하려는 것을 내가 제지하며 얼마냐고 물었다.
등에 업힌 아기는 두세 살 정도로 보였는데 포대기에 싸여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얼굴은 새까맣게 탔지만 아기의 표정만큼은 이 세상 어느 아이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한국 돈으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커피와 녹차는 천 원씩이고, 옥수수는 한 개에 이천 원씩입니다.
커피와 녹차가 다섯 잔이고 옥수수가 세 개니까 합해서 만천 원인데 오늘은 제가 기분이 좋아서 특별히 만원만 받겠습니다. 만원만 주시라요.”
아낙네가 만 원이라는 말에 은하와 난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창우는 그다지 놀랄 일도 아니라는 듯 옆에서 실실 웃으며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내가 지갑에서 만원을 꺼내고 있을 때 은하가 가만있어보라며 나를 제지하더니 아낙네에게 항의하듯 따졌다.
“아주머니, 커피 한잔에 천 원씩이나 받습니까?
또 옥수수 하나에 이천 원이나 받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은하의 항의에 아낙네의 답변은 그야말로 걸작이었다.
“한국 사람들한테는 다 그렇게 받고 있습네다.”
은하가 같은 연변사람임을 알아본 아낙네가 당연한 것을 왜 묻느냐는 투로 하는 말이다.
그러자 은하도 이대로 물러설 수만은 없었던지 다시 따져 물었다.
“그럼 나에게는 얼마씩 받으십니까?”
아낙네가 난처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있다가 생각해 보니 화가 나던지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남들도 다 그렇게 받는데 왜 그렇게 따지듯 묻습니까?
한국에서 오신 분이 없었고 애초에 아가씨가 주문했더라면 내가 그렇게 받겠습니까?
또 아가씨가 그렇게 주겠습니까?
한국 사람들한테는 몇 배로 받는 건 여기서는 다 기본이란 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같은 연변사람들끼리 참 너무합니다.”
이 말을 들은 은하도 더 이상은 대꾸하지 못했고, 옆에서 웃고 있던 창우가 그냥 가자고 말하며 혼자서 먼저 걸어갔다.
난 곧바로 아낙네에게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건네고 은하의 어깨를 밀면서 창우 쪽으로 따라갔다.
좀 전에 같이 담배를 피웠던 그 자리에서 창우는 또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고, 나도 창우 옆에서 은하가 건네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