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90)

백두산의 포효 3

by 맥도강

바위에 가려 다른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지만 천지가 한눈에도 잘 보이는 호젓한 곳에서 우린 서로의 손을 맞잡고 앉았다.

이때 사랑스러운 은하의 향기가 천지의 세찬 바람을 타고 내게로 밀려왔다.

이 향기에 취하여 내 몸은 서서히 뜨거워지고 있다.

도대체 이 냄새의 정체를 알 수는 없지만, 이 여인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은하의 향기는 언제나 나를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머리를 내 어깨에 기댄 채 천지를 바라보던 은하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 그녀의 눈가에선 또다시 이슬이 맺혀있음을 알았다.

그것은 눈물이었다. 어제 천지폭포 앞에서 포옹할 때 보았던 바로 그 눈물이었다.

눈물의 의미는 이 행복한 시간이 오랫동안 이어지기를 바라는 은하의 간절한 마음이리라.

손수건으로 그녀의 눈가를 닦아줄 때 그녀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내 가슴을 파고들었다.

더욱 힘주어 그녀를 끌어안는 것으로 난 그녀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고자 했다.

비록 이 천지는 절반으로 갈리어서 우리 민족과 중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지만 은하와 나의 사랑은 영원토록 단절되지 않을 것이다.

창우와의 약속시간에 맞추어 천지를 내려갔다.

추운 날씨로 얼굴색이 짙분홍빛으로 변해버린 은하를 서둘러서 차에 태운 후 저 아래 펼쳐진 백두산의 장관을 감상하기 위하여 언덕배기의 끝자락에 올라섰다.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양팔을 활짝 펼쳐 백두산의 정기를 온몸으로 느껴보고 싶었다.


차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던 배 교수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잠시 소천지에 들렀다 가!

운전석 위의 백미러로 배 교수의 얼굴을 쳐다보며 창우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천지에서 그만큼 하셨으면 됐지 소천지까지 가서 또 무슨 해괴한 행동을 하시려고 그럽니까?

그냥 바로 내려가서 식사나 하고 출발해요.”

배 교수도 창우와는 시선을 마주치고 싶지 않은지 시야를 차창 밖으로 돌린 채 무표정한 소리로 대꾸했다.

“밥이야 한 끼 굶어도 되고 좀 늦게 먹으면 어떠냐?

내 소천지에서 물 한 컵 먹고 싶어서 그러니 들렀다 가!.”

아버지의 막무가내 식 태도에 창우도 체념한 듯 백두산을 다 내려올 때 즈음, 결국 소천지 쪽으로 차를 돌렸다.

매표소 입구의 적당한 자리에 주차한 후 일행은 걸어서 소천지를 향했다.


숲길을 따라 이십 분 정도 걸어가자, 제법 큰 연못이 나타났다.

소천지라면 작은 천지를 말하는 것일 터,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오는 물길로 아래에 만들어진 차갑고 맑은 천지의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배 교수는 이 천지의 물을 마심으로써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갈증을 해소하고 싶었을 것이다.

배 교수를 필두로 우린 천지에서 내려온 소천지의 물을 한 바가지씩 마셨다.

시원한 물맛도 물맛이지만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마셨다는 생각에 그 뒷맛이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소천지 옆 암석에 파인 작은 동굴에는 신을 모시는 작은 사당이 있었다.

최 씨가 소천지에서 담아 온 물 한 컵을 올려놓고 한참 동안이나 뭔가를 열심히 빌었다.

장난기 섞인 표정으로 은하가 하는 말이다.

“아저씨! 우리나라가 통일돼 달라고 빌었습니까?”

무릎을 꿇고서 어찌나 정성 들여 빌고 있던지 일어서며 돌아서는 최 씨에게 은하가 농담을 건넸다.

“통일은 무슨?, 내가 통일되게 해 달라고 빌면 통일이 되나?

우리 하나밖에 없는 딸년 잘 먹고 잘살게 해 달라고 빌었지.”

최 씨의 이 말은 우리 모두를 잠시 숙연하게 만들었다.

항상 허허실실! 사람 좋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마음 한 구석에는 불우한 딸의 처지를 헤아리는 애틋한 마음이 자리 잡고 있었다.


몇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는 사이 배 교수와 최 씨는 차에서부터 들고 온 플라스틱 말통에 소천지의 물을 담았다.

최 씨는 무거운 물통을 들고 가면서도 길가에 돌무덤이 보이자 작은 돌 하나를 정성 들여 올려놓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다시 물통을 들고 가는 최 씨가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내가 대신 들어주겠다고 했지만 이것도 고행이라며 한사코 사양했다.

그는 모든 만물에는 한울님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내재돼 있어 언제 어디서나 항시 기도한다고 했다.

백두산의 기운이 녹아든 소천지 물 한 그릇을 모시고 새벽마다 정성을 들이면 효험이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힘들게 물을 받아가는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천지에서 서식하는 유일한 어종이라는 산천어를 횟감 삼아 소천지 인근의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그리고 곧장 연길로 향했다.

창우는 뭐가 그리도 급한지 올 때처럼 중간에 간간이 들리는 일도 없이 논스톱으로 비포장도로를 무서운 속도로 내달렸다.

배 교수는 언제나처럼 하염없는 표정으로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고, 최 씨는 그의 전용침대칸에서 올 때와 같이 아예 대놓고 코를 골고 있다.

은하는 나의 무료함을 달래 줄 생각으로 어제 틀었던 그 컨츄리 송 테이프를 다시 틀었다.


백두산을 출발한 후 단 한 번의 정차도 없이 내리 세 시간을 내달렸다.

그제야 창우는 길가 상점 앞마당에서 차를 세운 후 담배를 사기 위해 가게로 들어갔다.

나도 차에서 내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었을 때였다.

인근의 또 다른 가게 앞에서는 개량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손님을 맞이하는 한 무리의 조선처녀들이 눈에 들어왔다.

북한에서 직영하는 가게라고 하는데 그 가격이 대단히 비싸다는 은하의 말에 들어가 볼 엄두는 못 내고 그냥 지켜만 보고 있었다.


이때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내게로 다가오더니 물건을 사지 않아도 좋으니 그냥 구경이나 한 번 해보라며 말을 거는 것이 아닌가.

나는 거절하기도 민망해서 은하를 데리고 가게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내가 한국 사람인 것을 알아본 북한 아가씨들이 인삼, 우황청심환, 술, 공예품 따위를 보여주면서 물건을 사달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졸랐다.

순간 나는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이들이 바로 창우가 말하던 외화벌이 아가씨들이 아닌가. 북한에서도 당성이 철저한 인텔리들만이 파견된다는 미모의 아가씨들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물건하나를 팔기 위해서 혈안이 된 그저 측은한 생각이 드는 아가씨들로만 보였다.


단순히 구경삼아 들어왔지만 도저히 빈손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대체로 가격이 비쌌지만 그래도 그중 우황청심환이 만만할 것 같아 가격을 물어보았다.

그러자 계산대에 서있던 아가씨는 가격을 말해주기 전에 북한산 우황청심환의 효능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여섯 알이 든 포장세트 하나를 뜯더니 거기서 한 알을 꺼내 반으로 쪼개어 은하와 내게 먹어보라고 한다.


너무나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말리고 말고 할 틈도 없었다.

그 후 가격을 말해 주었는데 여섯 알 한 세트에 우리 돈으로 무려 이십만 원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은하가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내 팔을 잡아끌며 그냥 나가자고 보챘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이미 포장을 뜯어버렸으니 어쩔 수 없게 되었다며 떼를 쓰는 것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난 한 세트를 달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그녀는 안도의 표정으로 돌변하더니 새것으로 가지고 오면서 깍듯이 고맙다고 인사했다.


돌아서며 생각하니 기왕에 사는 것이라면 한 세트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았다.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도 생각이 났고 서 교수님의 얼굴도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세트를 더 달라고 했더니 아가씨가 아주 반색을 하면서 여러 번 고맙다고 거듭 인사했다.

그녀는 조금 전에 포장을 뜯어 다섯 알만 남은 청심환도 가지런히 포장한 후에 덤으로 얹어주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가능하면 중국 돈보다는 한국 돈으로 계산해 달라고 요구했다.

이 말에 중국 돈은 위폐가 많다는 창우의 이야기가 떠올라 나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하여 잠시 구경만 한다는 것이 사십만 원이나 지출하는 대형쇼핑을 하고 말았다.

상점을 나오려는데 수공예품으로 만든 머리핀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은하의 머리에 꽂으면 예쁠 것 같아 그것을 하나 더 사서 은하의 머리에 직접 꽂아주었다.

작은 머리핀 하나였지만 은하는 무척 행복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차에 오른 후, 다섯 알이 든 우황청심환 한 세트를 배 교수와 함께 드시라며 최 씨에게 선물로 전했다.

예상치 못한 귀한 선물을 받아 든 최 씨가 호들갑을 떨면서 감사의 인사말을 하는 와중에도 배 교수는 북한 직영가게에서 비싼 값으로 물건을 산 내 행동에 못마땅한 표정이 역력했다.


차는 다시 출발했다.

한 동안 침묵하던 배 교수가 천지에서 하던 이야기를 정리하고 싶었던지 다시 포문을 열었다.

창우는 아버지가 무슨 말을 꺼내려하자 잔뜩 인상부터 찌푸리더니 차를 더욱 험하게 몰기 시작했다.

“윤 선생 보시오!,

이천 년간 팔레스타인들이 지배해 온 땅에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건국할 때,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 뭐였는지 아시오?

이천 년 전에는 자신들의 땅이었다는 것이지. 구약성서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면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냈지 않았겠소.

그리고 일본만 하더라도 끈질기게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하면서도 고작 러일전쟁 직전 불법적으로 일본 영토에 편입시킨 것을 근거로 삼고 있을 뿐이오.

명백히 독도는 한국 땅이고, 또한 우리가 실효적인 지배를 하고 있음에도 말입니다.

그에 비하면 간도 땅에 대한 우리의 영유권 주장은 너무나도 확실한 역사적인 연고권과 국제법적인 논리를 가지고 있단 말이오.

문제는 힘이에요! 우리 민족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하나 되는 통일을 앞당겨야 합니다.

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동포 간에 서로 신뢰가 있어야 되겠지요. 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돈 몇 푼 있다고 가난한 우리 중국 동포를 2등 동포 취급하는 그런 못난 천민자본주의 근성을 버려야 된다는 말입니다.

배고파서 탈북해 온 우리 동포를 오히려 동남아 노동자보다도 천시하는 그런 정신 상태를 뜯어고치지 않고서 어떻게 한국이 통일을 주도할 수 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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