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음모 4
오늘은 6박 7일간의 연변출장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는 날이다.
연길공항으로 출발하기에 앞서 아침 일찍 배 교수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릴 계획이다.
그런 후 단 몇 시간만이라도 은하와 단둘이서 시간을 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서둘러서 여행 가방을 정리했다.
이때 은하로부터 아침식사를 함께 하자며 아버지의 사무실로 들러달라는 연락이 왔다.
백산호텔의 정문을 나서는데 문득 중국의 작은 거인 등소평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는 마치 인자한 시골 아저씨처럼 온화한 표정으로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중화제국의 무서운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연변으로 출장 오기 전, 서 교수님을 찾아뵈었을 때 교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윤 군, 역사도 힘이 있어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한 시도 망각해서는 안되네.
티베트나 위구르를 떠올려 보게!
자신들의 역사를 중화제국에 모두 빼앗겨버린 채 이젠 그들의 정신마저도 중국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일세.
한 번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다시는 자신들의 정체성을 회복할 수 없는 법일세.”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다시 한번 그 말씀의 의미를 곰곰이 되새겨 보았다.
중화제국주의의 마각은 우리 민족의 북방사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장차는 한반도의 북부에까지 뻗치려 한다.
이것은 한가로운 역사논쟁이 아니라 한중간의 살벌한 영토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이기는 민족은 잃어버린 옛 영토마저 회복할 수 있겠지만 패배하는 민족은 오늘날의 실효적인 지배 영토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 옛날 고구려는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여 그 많던 북방 영토를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천삼백 년이 지난 우리 후손들이 또다시 어리석게 대처한다면 우리는 고구려의 역사마저 잃게 될 것이고 영원히 민족의 고토를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생각이 여기에까지 미치자 지금까지 온화하게 생각되던 등소평 영감의 얼굴이 결코 온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 민족은 등소평의 미소 뒤에 숨어있는 중화제국의 음모를 꿰뚫어 보고 이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지혜와 슬기 역량을 한 군데로 모아 남과 북이 온전하게 힘을 합쳐야 한다.
우리 민족의 통일만이, 그것도 우리 민족의 평화적인 통일만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다.
은하가 문밖까지 나와서 택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람결에 흩날리는 은하의 머리칼을 살며시 쓸어 올려준 뒤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차려진 밥상에는 배 교수와 최 씨가 나란히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윤 선생, 오늘 한국으로 돌아가신다면서요.
그동안 정도 참 많이 들었는데 이거 섭섭해서 어쩝니까? 여기로 어서 앉아요.”
배 교수는 덤덤히 앉아 있을 뿐 별말이 없었으나 붙임성 좋은 최 씨가 반갑게 맞이했다.
시골 고향의 어느 친척 아저씨 같은 그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교수님과 아저씨께 신세 많이 지고 떠나게 됐습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국은 시원하게 끓인 북엇국이었다.
어제 단동과 삼합을 다녀온 후 밤늦게까지 창우아파트에서 과음했던 나를 위해서 은하가 속풀이로 준비한 모양이다.
식사 후 배 교수는 오늘도 소천지에서 담아 온 물로 우려낸 백두산 야생녹차를 한잔씩 따라 주었다.
“오늘 가신다고요? 어떻게 오신 목적은 달성하셨는지요?”
“예, 교수님께서 여러 가지의 귀중한 말씀들을 많이 해주셔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모르고 있던 부분들에 대한 가르침이 컸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내가 부끄럽지요,
아무 데서나 생각 없이 불쑥불쑥 내뱉는 내 말이 무슨 도움이 되었겠소?”
엊그제 백두산을 다녀오면서 창우와의 다툼을 염두에 둔 듯 어깨가 축 쳐진 표정으로 말했다.
“북조선의 핵실험으로 우리 민족에 미칠 국제정세가 결코 간단치 않을 겁니다,
윤 선생께서 한국으로 돌아가시거든 하실 일이 많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난 우리 민족의 저력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리라 믿어요.”
배 교수의 얼굴은 지친 표정이 역력했지만 민족을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선 대쪽 같은 선비의 얼이 묻어났다.
“우리 민족이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면서 외세의 무수한 침입을 잘 이겨내었듯이 이번에도 그리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우리 젊은 사람들이 열심히 잘하겠습니다.”
“윤 선생이 존경한다는 학자 분이 서 교수님이라고 했죠?
연변에 오실 일이 있으면 날 한번 꼭 만나고 가시라고 말씀 좀 전해주시오.
그런 분과 술 한 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하는 말이오.”
이제야 배 교수의 얼굴에 가득했던 어두운 그림자가 사라지면서 그의 표정이 다소 밝아졌다.
“예 교수님, 꼭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서 교수님과 교수님은 생각이 같으신 분들이시니 서로 만나시면 하실 말씀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설거지를 마친 은하가 들어와 단정한 반무릎 자세로 앉은 채 가만히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선생! 작금의 민족적인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은 통일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 통일은 먼저 남과 북 사람들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평화통일을 이룰 수 있어요.”
이렇게 말하는 배 교수의 얼굴에선 어느새 어두운 기색이라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황소같이 부릅뜬 그의 큰 눈동자에선 예전처럼 광채가 뿜어났다.
“선생, 언제까지라도 이 차의 향기를 잊지 마세요. 백두산의 정신입니다.
우리 민족의 중심은 서울이 아니에요. 협소한 반도사관을 하루속히 떨쳐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중심은 백두산이에요!
백두산을 중심으로 이 드넓은 간도 땅이 모두 우리 민족의 활동무대였어요.
그럼요. 우리 민족의 북방 고토를 되찾아야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의 북방 역사를 지켜내야 합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온전하게 지켜내야 합니다!
동북공정을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는 중국도 다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그에 대항해서 싸워야 하는 우리 민족도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동간도일대의 영토를 빼앗길 수도 있고, 또 나머지 소수민족에게 독립의 의지를 불러일으켜서 중국이 산산조각이 날 수도 있는 대단히 위험한 뇌관이 바로 한반도 통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은 필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영구분단 내지는 북조선의 흡수를 도모하려는 것이지요.
중국으로서도 국가의 존망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필사적일 수밖에 없지만 우리 민족이 살기 위해서도 반드시 중국의 동북공정을 극복해내야 합니다!
통일 말고는 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통일은 한국이 주도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한국사람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선생!, 연변 구석에 처박혀있는 보잘것없는 늙은이가 하는 말이라고 흘러들으면 안 됩니다!, 아시겠죠!”
말을 마친 배 교수의 눈가에서는 또다시 이슬방울들이 맺혔다.
국내성에서 보았던 그 눈물, 백두산 천지에서 보았던 그 눈물을 나는 지금 또다시 보고 있었다.
배 교수는 미리 준비한 나무통과 물병하나가 담긴 보자기를 나에게 건넸다.
“선생, 백두산에서 따온 녹차 잎과 소천지에서 담아 온 물입니다.
우리 민족의 정신과 혼이 담긴 물건이에요.
한국으로 돌아가시거든 동북아역사재단의 연구원들과 함께 나누어 드세요.
이걸 드시고 힘들을 내어서 중국의 동북공정을 반드시 극복해야 합니다.
명심하세요! 머지않은 가까운 날에 통일의 기회가 반드시 찾아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때를 위해서 한국 사람들이 조금만 더 양보하고 인내해 주세요.
그래야만 통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중국을 이길 수 있어요. 부탁합니다, 윤 선생!.”
배 교수의 간절한 당부 말이 이어지는 동안 최 씨는 나와 은하를 번갈아 쳐다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우리들 사이를 눈치채고 있었다.
최 씨가 우리 사이를 어떻게든 배 교수에게 인정받게 해주고 싶었던지,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은하를 부르며 내 옆의 빈자리에 앉아 같이 차를 마시자고 했다.
은하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앉으려는 순간, 배 교수는 바쁠 텐데 그만 일어나라고 일침을 놓았다.
또다시 분위기는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방금까지의 우호적인 태도와는 또 다른 배 교수의 완곡한 반대의사 표시였다.
동북공정은 동북공정이고, 은하와 내 문제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로써 아직까지는 추호도 허락할 의사가 없다는 메시지였던 셈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자리에서 마저 배 교수는 그 자신의 장벽을 허물 뜻이 없었다.
최 씨가 비행기 시간도 아직 남았는데 좀 더 있다가 일어나도 되지 않느냐고 말했지만 배 교수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