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음모 5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고, 배 교수와 최 씨를 향해서 큰절을 올렸다.
그들도 앉은자리에서 함께 맞절을 한 후 사무실 밖까지 따라 나와 배웅해 주었다.
택시에 오를 때까지도 배 교수의 얼굴에서는 어떤 표정의 변화도 없었지만 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은하가 안 돼 보였던지 최 씨가 눈짓으로 함께 타라고 했다.
이를 묵인하려는지 아니면 애써 외면하려는지 배 교수는 사무실 안으로 말없이 들어가 버렸다.
택시 안에서 은하는 그녀의 낡은 가방을 열었다.
예쁜 뚜껑이 달린 손바닥만 한 녹차 잔을 꺼내더니 아버지가 싸준 보자기 속에 가지런히 함께 싸며 말했다.
“선생님, 이 잔은 제가 북경에서부터 간직하던 잔입니다.
이 잔으로 차를 드시면서 은하생각 많이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때마다 저도 선생님 생각하고 있겠습니다.”
아무 말 없이 은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그 물음에 대답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가에는 일주일 전처럼 아직도 코스모스가 한가로이 흔들리고 있다.
연길공항에서 은하를 만난 후 함께 걸었던 그 길이었으므로 택시 안에서 아무런 의미 없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우린 코스모스 흩날리는 공항 길을 따라서 다정히 손을 맞잡은 채 얼마간을 그렇게 걸었다.
배 교수에게는 아직 알리지 않았지만, 사실은 어젯밤 우린 창우 집에서 결혼을 약속했었다.
일주일 전 이 길을 걸을 때는 막 싹트기 시작하던 풋사랑이었지만, 지금 돌아가는 이 길은 그 사랑이 꽃을 피워 코스모스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은하는 앞으로 뭐 하면서 지낼 거야?”
화려한 코스모스 군락지에 마음을 빼앗긴 채 걸으며 은하가 내 물음에 답했다.
“아버지는 당분간 당신 하시는 일을 도와달라고 하시지만, 오빠가 싫어하기 때문에 아버지 하시는 일에 제가 개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저 아버지 식사나 신경 쓰면서 수발정도만 들어줄 생각입니다.
대신 새언니가 조카 형철이하고 형철이 친구들 공부를 봐주는 과외를 권하기에 그럴까 생각 중입니다.”
오늘 배 교수의 태도로 봐서는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남과 북의 사람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서 그 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내게는 도무지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다.
답답한 마음에 은하와 함께 걷고 있는 내 발걸음이 하염없이 무겁게만 느껴졌다.
늦가을에 접어든 길가의 코스모스들도 절반은 꽃씨를 머금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난 어릴 때부터 흐드러지게 핀 코스모스 군락지를 유난히도 좋아했었다.
초등학교시절에는 해마다 가을 이맘때면 코스모스 꽃씨를 봉지 가득 받아 두었다가, 이듬해 봄이면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코스모스 씨를 뿌리며 길을 걸었던 기억이 난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그저 자연스럽게 코스모스 꽃길이 조성된 줄을 알았겠지만, 한동안 우리 마을은 코스모스 꽃길을 걷는 즐거움을 함께 누렸다.
아마도 그때부터 난 동시를 짓기 시작하며 가을이라는 계절을 사랑했던 것 같다.
요즘도 가을이면 습작시를 긁적이기 위해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버릇이 있는데, 이 버릇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였다.
길을 걷다 말고 은하의 어깨에 가만히 내 두 손을 올린 후 은하의 눈을 자세히 응시했다.
은하도 미소 머금은 두 눈으로 내 눈을 또렷이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풋풋한 향기가 길가의 활짝 핀 코스모스 향기와 더불어 내 뇌리 속으로 전달되었다.
“얼마 걸리지는 않을 거야.
오빠가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내면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서 우린 결혼하는 거야.
한국으로 돌아가면 나도 어머니한테 은하 이야기를 해서 은하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을게.”
은하는 두 손으로 내 허리를 감싸며 얼굴을 가슴속에 파묻었다.
“그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난 이제 선생님 생각만 하면서 살겠습니다.”
오늘도 은하는 언제나처럼 청바지차림이고 북한직영가게에서 사 준 머리핀으로 목 부위까지 머리를 단정히 감싸고 있었다.
길가의 노란색 코스모스 꽃을 하나 꺾어 은하의 머리핀 위에 꽂아주었다.
머리에 꽂아 준 꽃이 길가에 떨어지자, 은하는 그것을 다시 주워서 향기를 맡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정해둔 일정도 없이 마냥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하기도 하겠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가 은하를 보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마흔 넘은 아들이 장가도 못 가고 혼자 지내는 것이 못내 속상하셨던 어머니이셨기에 기뻐하실 모습이 두 눈에 선했다.
어머니는 새벽이면 어김없이 정안수를 떠놓으시고 기도하신다.
소원은 오직 하나뿐, 아들이 참한 규수를 만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소망이다.
어서 은하를 한국으로 데려가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고 단란한 가정을 꾸려야겠는데 배 교수의 저 단단한 벽이 답답할 따름이다.
어느새 공항청사에 다다랐고 우린 가까운 광장에 마련된 벤치에 앉았다.
처음 공항에 내리던 날 하염없이 은하를 기다리던 바로 그 자리다.
출국수속을 밟으려면 한 시간 전에는 들어가야 하니 이제 남은 시간은 고작 십여분이다.
연변에 도착하던 날 은하를 기다리며 하염없이 서있던 그 자리에서 이제는 결혼을 약속한 사이가 되어 잠깐 동안의 이별을 아쉬워하게 되었다.
천생연분이란 이런 걸 두고서 하는 말인가?
은하의 채취에서 향기를 맡을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 은하가 나의 천생연분이라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한동안 은하의 향기를 맡지 못할 것 같아 은하 모르게 그녀의 향기를 긴 숨으로 음미해 보았다.
“이제 들어가 봐야겠어.”
“선생님 출국장으로 들어가시는 것까지는 보고 가겠습니다.”
은하의 표정이 어두워지면서 작별의 아쉬움 때문인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항 안으로 따라 들어오면서 내 손을 잡은 은하의 손에서 경련이 일어났다.
출국장을 통과하며 은하를 돌아다본 순간, 슬픈 표정의 한 여인이 하염없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슬픈 모습으로 손을 흔들던 은하의 애처로운 영상이 자꾸 떠올라 가슴 한가운데가 짠하게 시려온다.
이런 불편한 마음 탓이었을까?
왠지 건너편에서 내 쪽을 감시하는 듯한 눈초리들이 있어 온통 신경이 거슬렸다.
공안인 듯 검정색 정장 차림에 짙은 선글라스와 흰색 이어폰을 꽂은 두 사내가 매서운 표정으로 연신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여권과 비자를 건네주었다.
컴퓨터에 이름을 입력하던 심사원이 한 번 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봤다.
그리고 슬며시 심사대 밑으로 손이 갔다. 아마도 무슨 비상 호출 버튼을 누른 모양이다.
그 순간 나를 힐끔거리던 사내들이 신속히 내 쪽으로 다가와 잠시 확인할 게 있다고 하면서 다짜고짜 내 양팔을 하나씩 움켜잡았다.
그들의 손에 이끌리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곳은 공항청사의 지하주차장이었다.
나는 강력하게 저항해 보았지만 두 사내의 완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승용차가 '끼익~' 하는 요란한 타이어 소리를 내며 우리 앞에 도착했다.
나를 강제로 뒷좌석에 태우더니 내 가방을 앞자리의 조수석에 집어던지는 것을 신호로 검정색 승용차는 어디론가 급히 출발했다.
“이것 보시오! 난 지금 비행기를 타야 한단 말이오. 대체 당신들 정체가 뭡니까?”
“선생님을 모시고 오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차에 타서도 두 사내는 나의 양팔을 힘껏 잡고 있어 더 이상의 저항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차는 비포장도로를 따라서 삼십 분가량을 더 달리고서야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한 사찰 앞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