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98)

신뢰의 문제 1

by 맥도강

연변으로 출장을 다녀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며칠 후면 추석인데도 창우로부터는 이렇다 할 소식이 없다.

배 교수의 고집이 제 아무리 완강하다지만 어쩐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는 건 그만큼 내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는 뜻일 게다.

한국으로 돌아가서 기다리면 자기가 다 알아서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이 말을 철석같이 믿었던 나의 잘못이란 말인가.

그래도 작년까지는 두세 달에 한 번씩은 전화를 걸어와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고 하면서 미안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에는 내가 전화해도 안부만 물어볼 뿐 별다른 이야기도 없다.


나는 지난주에 동북아 역사재단의 연구실에서도 볕이 가장 잘 드는 창가 쪽으로 자리를 옮겨왔다.

과분하게도 연구 2실의 제3팀장으로 승진 발령을 받은 것이다.

제3팀은 연구보다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응하는 정책 수립을 주 임무로 하는 팀이기 때문에 그간의 국내외 사정으로 볼 때 그만큼 바쁜 나날을 보냈다.

오후 한때의 잠시 한가한 시간을 이용하여 연변을 떠나올 때 배 교수가 선물해 준 대나무 통을 서랍에서 꺼냈다.

배 교수, 아니 은하 아버지가 백두산 자락에서 손수 채취했다는 귀한 야생녹차다.

팀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책상 서랍 깊숙이 숨겨둔 채 가끔씩 이렇게 나 혼자서만 우려내 먹곤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야생녹차야 말로 은하의 체취가 느껴지는 유일한 물건이다.

차를 마시고 있노라면 마치 은하가 옆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은하가 그리울 때면 이렇게 나 혼자만의 조용한 의식을 치르고 있다.

내 책상 위에는 2년 전 백두산에 올랐을 때 천지에서 찍은 사진액자가 놓여있다.

행여 들킬세라 창우가 아버지 몰래 나와 은하에게 팔짱을 끼라 하고는 최대한 다정스러운 모습이 되었을 때 찍어 준 사진이다.


그 옆에는 은하가 내게 선물해 준 손바닥만 한 큰 녹차 잔이 놓여있다.

찻잔의 뚜껑을 열고 책상 앞으로 옮겨놓았다. 차를 즐기기에 앞서 코끝으로 백두산의 향기를 먼저 음미해 보았다.

왼손으로 대나무 통을 톡톡 흔들어 오른손바닥에 조금 쏟으니 투박하게 볶아진 녹차가루 냄새가 코끝으로 밀려왔다.


창밖에는 회색의 빌딩 숲 사이로 때 이른 석양 노을이 밀려온다.

이때 들판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울긋불긋 코스모스 군락 사이를 얼굴 가득 행복한 표정으로 은하가 걸어오는 모습이 보인다.

연구실에서 잠시나마 짬을 내어 은하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다.

연변을 떠나올 때 약속한 대로 은하로부터는 거의 매일같이 이메일이 날아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적어도 작년 가을까지는 그랬다.

그 후로는 사나흘에 한 번씩 오더니 최근에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뜸해졌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가 답장을 한두 번씩 거르게 되면서 그렇게 되었는데 은하 입장에서는 맥이 빠질 만도 했을 것이다.


은하가 메일을 보내올 때는 그녀의 하루 일과를 어찌나 세세하게 알려주던지 그녀와 주변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내 앞에서 훤히 전개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우리 사이를 전향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거나, 오빠가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하여 어떤 노력을 한다는 내용은 없었다.

나 역시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다. 도대체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궁금함이 도를 더해 조급증을 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직접 은하에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 묻지 않더라도 그 이유는 분명했다.

한국 사람들을 믿을 수 없다는, 그래서 가족으로서의 인연을 만들지 않겠다는 은하 아버지의 그 단단하고 높은 벽을 아직도 허물지 못했다는 뜻일 테다.

어쩌면 은하도 창우도 그 벽을 허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느낀 나머지 이제는 설득하는 일을 포기한 채 손을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 역시도 답답한 노릇이었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수밖에는 달리 다른 도리가 없다.

북한의 제1차 핵실험 후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안 통과로 그야말로 숨 가쁘게 돌아갔다.

그러던 것이 재작년 연말에 있었던 6자 회담을 계기로 이제는 숨 고르기에 들어간 분위기다.

강력한 대북 압박정책으로 북한을 고사시키려던 미국의 부시 정권도 중간선거에서 패배한 이후로는 확실히 주춤해졌고, 북한의 입맛에 맞을 만한 실질적인 당근책을 제시하며 대화무드를 조성하고 있는 형편이다.


북한 역시도 90년대 고난의 행군 이후 작년에 이어서 올봄에 또다시 혹독한 식량난을 겪었던 터라 더 이상의 벼랑 끝 전술을 밀어붙일 여력이 없었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얼마나 안 좋았던지 작년 겨울부터 금년 봄까지만 하더라두만강이나 압록강을 건너서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의 숫자가 무려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2급 비밀문서로 분류된 국정원의 내부 문건에는 적어도 백만 명 이상이 굶어 죽었다는데 몇몇 변경지역에서는 치안이 무너지는 등 북한 정권의 붕괴 조짐까지 엿보인다고 했다.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대북제재에 동참한다는 명목으로 일체의 지원을 중단한 상태에서 북한이 이나마도 버티고 있는 것은 중국 측의 식량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북미 간에는 극적인 대타협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는 식으로 입씨름만 하는 형국이다.

미국은 '핵부터 폐기하라, 그러면 다 들어주겠다.'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에 맞서는 북한은 '그 말을 믿을 수 없으니 당근책부터 먼저 내놔라, 그러면 핵을 폐기하겠다.'라고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북미 간의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는 중국의 주가는 날로 올라가는데 반해 북한과 중국으로부터 왕따를 당하고 있는 일본은 그 분을 삭이느라 씩씩거리고 있다.

게다가 여론이 좌우로 양분된 한국은 그저 어정쩡한 자세만 취할 뿐 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럴 때 난 한 편의 보고서를 작성 중이다.

6자 회담에 임하는 미국과 중국의 의도를 정확히 간파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미국은 북한의 붕괴를 기정사실화하면서 그때까지만 대화를 하는 척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지 실질적인 대화 의지는 없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중국도 북한의 붕괴를 기정사실화하는 것은 미국과 마찬가지라고 못 박았다.

다만 중국 측의 의도는 북한 정권의 변화를 유도하여 이번 기회에 국가의 자주성이 사라진 친 중국 사대주의 정권을 만드는 것이 제 일차적인 목표라고 주장했다.

궁극적으로는 동북지역의 제4성으로 편입시키려는 음모가 숨겨져 있다고 폭로했다.


오늘 하루도 정책회의다, 보고서 작성이다, 윗분들의 호출이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를 정도다.

팀원들이 하나둘 퇴근인사를 하면서 자리를 비우더니 어느새 텅 빈 연구실에는 나 홀로 남았다.

지친 몸을 이끌고 이제 그만 자리를 일어서려는 바로 그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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