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문제 2
기다리던 서 교수님으로부터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재단 이사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방금 부산에서 올라오셨다는데 종로 3가에 위치한 단골 일식집에서 만나자는 전화였다.
서 교수님은 동북아 역사재단의 비상근 이사로 계시기 때문에 정기적인 이사회가 열릴 때나 내일처럼 특별한 안건이 있어 임시 이사회를 소집할 때는 가끔씩 서울로 올라오신다.
물론 서울에 오실 때면 어김없이 날 찾으셔서 식사를 함께 하신다.
나는 교수님께 보여드릴 생각으로 서둘러서 보고서의 초안을 출력한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호텔에 도착하여 3층의 일식집으로 올라왔을 때, 교수님은 아늑한 분위기의 작은방 하나를 차지하고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눈을 감고 계셨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시는 모습이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반백이 좀 넘었나 싶었는데 몇 달 사이 백발이 더욱 성성해진 것이 이젠 완전히 노 교수의 모습이 역력하다.
“교수님,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아니야, 나도 방금 왔어.”
몇 달 만에 교수님을 뵙게 되자 반가운 나머지 큰절부터 먼저 올렸다.
“어허 이 사람아! 평소 안 하던 절까지 하고, 웬일이야? 그러지 말고 어서 와서 앉게나.”
절을 마치고 맞은편의 자리에 앉자 미리 주문한 코스요리가 하나둘 상을 채우기 시작했다.
마지막 순서로 종업원 아가씨가 청하 한잔씩을 따른 후 자리를 물러났다.
“자네, 이번에 팀장으로 승진했다며? 늦었지만 축하하네.
동작은 굼벵이처럼 둔한 사람이 물고 늘어지는 성격 하나는 타고났단 말이야. 하하하!”
소박하게 웃으시며 축하주라고 하면서 청하 한 잔을 권하셨다.
“모두 교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그래서 내게 큰절까지 했구먼. 그런데 자네가 잘못짚었어.
난 재단의 인사 문제에는 일절 개입하지 않는단 말일세. 이십 년이 넘도록 나와 함께 지내고서도 아직도 날 모르다니….
그건 그렇고 임시 이사회라니 도대체 무슨 일인가?”
사실 재단에서 임시 이사회를 소집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재단 창립 후 몇 차례 열리곤 했는데 대개는 일본의 독도 관련 망언이나 중국의 동북공정과 관련된 중요 현안이 발생할 경우였다.
“내일의 임시 이사회는 어제 이사장님께서 NSC 회의를 다녀오신 후 긴급 소집한 것으로 압니다만, 아마도 북한의 사정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서 교수님도 뭔가를 짐작하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얼굴은 더욱 말라 보였지만 안경 너머로 반짝이는 눈빛만은 예전처럼 여전히 힘이 넘쳤다.
다다미 방 한구석에서는 늦가을 더위를 식히려는 듯 선풍기가 아주 미약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국정원에서 보고한 내용 때문에 모이라고 하는 것이겠지.
내 생각에는 북한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붕괴되리라고는 보지 않네만,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도 교수님과 같은 생각입니다만, 북한의 어려운 상황으로 봐서는 저 상태에서 얼마를 더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정 위원장이 언론에서 모습을 감춘 지도 벌써 한 달을 넘기고 있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부분입니다.”
사실 국방위원장이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일은 중요한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간혹 있어왔던 일이다.
그는 북한이 외부 세계와의 대립이 심화될 때마다 그 모습을 감춰왔다.
2003년 초 핵확산 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뒤 이라크전쟁이 발발한 시점에는 50일간,
2006년 10월 제1차 핵실험 후에는 한 달간, 같은 해 7월 미사일 시험발사를 재개한 뒤에는 40일간 잠적한 적이 있었다.
현재 북한을 둘러싼 내외의 어려운 국면을 감안할 때 한 달간의 잠행이란 것은 그동안 상투적으로 있어왔던 은둔과는 어딘지 모르게 그 차원이 달라 보였다.
서 교수님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마치 독백처럼 하신 말씀이다.
“그렇지, 정 위원장의 잠행이 예년의 경우와는 확실히 다른 건 사실이야. 그렇다면 그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는 건가?
그 참! 대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어쨌든 내일 가보면 무슨 말이 있겠지.”
“교수님, 내일 회의 마치시고 곧장 내려가실 겁니까?”
“그래야지, 모레 오전부터 강의가 있으니. 그건 그렇고 은하라 했던가?
그 왜 중국동포 아가씨 말이야, 금방 데려올 것처럼 그러더니만 왜 아직도 구경을 안 시켜 줘?”
난 잠시 말을 잊지 못하다가 씁쓸한 표정으로 잔을 비운 뒤 교수님께도 잔을 권했다.
“아버지의 반대가 아직 여전한 모양입니다”
“그 참 고얀 양반일세. 자네 정도면 어디가 어때서 그렇게까지 반대를 한단 말인가. 적당히 그러다가 말아야지. 어째 정도가 좀 심하구먼.
내 그렇잖아도 내년 초에 북경에서 그쪽 학자들하고 학술회의를 하기로 돼 있는데 그때 맘먹고 한번 들러봐야겠구먼.
그 양반이 나하고 술 한 잔 하고 싶다고 했다지?”
“예, 교수님, 중국에 오실 일이 있으면 꼭 한번 들렀다가 가셨으면 했습니다.”
“잘 됐네, 내가 그 양반을 한번 만나보지.
그 양반도 그 양반이지만 자네도 참 주변머리가 없구먼.
아가씨 아버지가 반대한다고 지금껏 그러고 있으니 하는 말일세.
내가 나서지 않으면 도무지 되는 일이 없는 건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함이 없군 그래.”
이렇게 말씀하신 교수님은 너털웃음으로 웃고 계셨지만 사실 그건 맞는 말이다.
내 나이 스무 살 시절부터 서 교수님의 특별한 배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어쩌면 사회의 낙오자로 전락하여 신세 한탄이나 하면서 살아가는 답답한 인생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 그래서 교수님은 언제나 내게는 아버지와도 같은 분이시다.
미리 준비해 간 A4 용지 오십 쪽 분량의 보고서가 담긴 서류봉투를 교수님께 건네 드렸다.
교수님은 즉석에서 보고서를 대략적으로 읽어보면서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시했다.
호텔에서 자세히 검토하겠다며 서류봉투에 다시 집어넣으시며 말씀하셨다.
“윤군, 잘하리라 믿네만 지금의 시기는 우리 모두가 더욱 긴장해야 하네.
자네 보고서 내용대로 작금의 우리 민족은 풍전등화와도 같은 위기상황일세.
그래서 우리 모두의 슬기와 지혜가 필요한 이때 특히 재단의 젊은 일꾼들인 자네들의 역할이 실로 크단 말일세.”
나는 교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광대하게 펼쳐졌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웅대한 대륙 사관으로 설명하시던 교수님,
잃어버린 우리 민족의 북방지역 고토를 회복해야 된다며 강단에서 목청을 드높이시던 교수님이시다.
외세에 의해서 민족의 강산이 잘리어진 것도 모자라 이제는 또다시 그 반쪽마저 우리 민족사에서 영구히 사라질 위기에 처한 풍전등화와도 같은 암울한 상황이 아닌가.
이렇듯 외부의 환경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국내의 상황은 아직도 사대주의와 친일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협소한 반도사관(半島史觀)이 판을 치고 있는 형편이다.
서 교수님의 탄식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인식할 능력도, 타개할 의지도, 그 방법조차도 알지 못한 채 안일하게 대응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답답하여 토해 내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민족의 중심이 경주나 서울쯤으로 착각하는 좁디좁은 반도사관 속에서 교육받고 또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우리 민족이 회복해야 할 고토(古土)가 어디쯤이며, 왜 회복해야 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어디 그뿐인가? 자칫 북한 땅을 통째로 집어삼킬 수도 있는 동북공정의 막바지 단계가 진행 중인 비상한 상황 속에서도 미국 주도의 대북 강경책만 앵무새처럼 되뇌면서 북한의 굴복을 강요하고 있다.
그들이 아무런 생각 없이 통일을 마치 남의 집 일처럼 한가로이 이야기할 때, 우리 민족을 분단시킨 외세가 우리 몰래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알 턱이 없다.
또한 그것이 우리 민족의 앞날에 어떤 재앙을 가져올지에 대해서도 까마득히 모르고 있다.
백두산의 정상 천지에서 배 교수가 외쳤던 말이 다시금 생생하게 귓전을 스치듯 지나갔다.
“백두산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다!. 간도땅의 주인도 우리 민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