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문제 3
다음날 오후 서 교수님께서는 임시이사회를 마치자마자 KTX 편으로 내려가셨다.
서울역까지 배웅해드리고 싶었지만 사사로이 연구실을 비워서는 안 된다며 끝내 만류하시고는 홀로 서울역을 향하셨다.
열차에 오르시기 전 내게 전화 주는 것을 잊지 않으셨다.
임시이사회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대외비를 전제로 이사장님의 보고가 있었다.
정 위원장을 둘러싼 북한 내부의 상황에 확실히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틀림없지만 정보력의 한계 때문에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이나 중국이 긴밀하게 움직이는 것으로 볼 때 그들은 분명 무언가를 알고 있었지만 우리를 따돌리며 중요한 정보를 주지 않고 있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이라는 보고였다.
오피스텔로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켜고 오랜만에 은하의 메일에 답장을 쓰기 시작했다.
내 답장은 언제나 그렇듯 고루한 내용 일색이지만 그래도 이때만은 은하를 느끼는 유일한 순간이므로 아무리 바쁘더라도 일주일에 한 번은 이렇게 답장을 보내고 있다.
그런데 오늘 쓰는 메일의 말미에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첨가했다.
자치주의 대북무역 실무를 관장하는 오빠가 북한 사정에 정통할 것이니 최근 북한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번 알아봐 달라는 내용이었다.
메일을 보내고 자리에 누우니 몸은 솜처럼 피곤해도 2년 전 6박 7일간의 일정으로 연변으로 출장 갔을 때가 아련히 생각나기 시작한다.
연길공항, 연길 시장, 용정중학교, 국내성이 있는 집안시, 백두산 가는 길, 천지폭포, 소천지, 단동, 삼합.
마치 영사기가 돌아가듯 그때의 장면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가며 내 추억을 일깨운다.
두꺼운 뿔테 안경을 쓰고 열변을 토하던 배 교수, 정 많은 최 씨 아저씨, 아버지에게 불만을 토해 내던 창우, 그리고 내가 꺾어준 코스모스 향내를 맡고 있던 내 사랑 은하.
은하에게 답장 메일을 보낸 그다음 주의 일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오늘 하루도 바쁘게 움직이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모레가 추석이기 때문에 밤늦게 곧장 오피스텔로 돌아와 들뜬 마음으로 부산 내려갈 여장을 꾸리고 있었다.
시간 내서 한번 내려오라는 서 교수님의 당부말씀도 있고 해서 진작부터 오늘 밤 열한 시 사십 분에 출발하는 KTX 열차 편을 예매해 두었다.
오피스텔을 나서기 전, 혹시나 은하로부터 메일이 와 있나 싶어 노트북을 열어보니 붉은색 대문자로 ‘긴급’이라고 적힌 은하의 메일이 도착해 있었다.
삼십 분 전에 보낸 메일이었다.
은하의 메일에는 오늘 저녁 창우가 술이 과하게 되어 아버지를 찾아왔었다고 한다.
“술을 먹었으면 아파트로 갈 것이지 여긴 왜 왔네?”
“아버지, 그렇게 차갑게만 말씀하지 마시고 여기로 앉아보세요.
오늘 아버지 하고 술 한 잔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은하야, 술상 좀 봐다오. 술은 오빠가 가지고 왔다.”
창우는 그가 즐겨 먹는 백두산 들쭉술 포장을 뜯은 뒤 방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아버지를 어서 앉으라고 다그쳐 댔다.
추석명절을 목전에 두고 자신과 술 한 잔을 나누고자 찾아왔다는 아들의 말에 배 교수도 많이 누그러진 표정이다.
여전히 그는 선채로 창밖을 바라보며 연신 담배만 피워대고 있었다.
은하가 작은 상으로 술상을 차려왔을 때 홀에서 손님을 맞고 있던 최 씨도 방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자리 옆에 어서 와서 앉으라는 최 씨의 고함소리를 듣고서야 배 교수도 마지못해서 자리에 앉았다.
좁은 방안에 세 명의 남자와 은하마저 자리를 잡고 앉자 방안이 꽉 찬 느낌이다.
창우는 술병을 들고 호기롭게 말했다.
어디서 술을 꽤 많이 하고 왔는지 얼굴은 시뻘겋게 상기되었고 혀는 잔뜩 꼬부라져 있었다.
“이 술이 말입니다, 2000년 6월 15일에 김대중 대통령 하고 우리 정일 위원장이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화해주로 마신 백두산 들쭉술입니다.
아버지, 우리도 이 술 마시고 화해합시다. 자, 한잔 받으세요.”
창우가 술을 따를 때까지도 배 교수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때마침 최 씨가 특유의 밉지 않은 얼굴로 넉살 좋게 말을 건넸다.
“이봐, 창우! 나하고는 화해 안 할 거야? 왜 난 화해주가 없어?”
“아저씨 하고는 화해할 게 없는데요, 그래도 우리 아저씨 때문에 제가 늘 마음이 놓입니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우리 아저씨도 자 한잔 받으세요.”
창우는 최 씨에게도 술 한 잔을 따른 후 옆에 앉은 은하의 술잔도 채워주었다.
최 씨가 창우의 잔을 채워주려고 하자 창우는 부득부득 아버지한테서 술을 받고 싶다며 고집을 부려댔다.
이 잔은 화해의 잔이기 때문에 꼭 아버지가 따라주어야 먹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몇 순배의 술잔이 돌자 어느덧 배 교수의 얼굴은 인자한 아버지의 얼굴로 돌아왔다.
그가 눈을 들어서 아들을 바라보며 한결 부드러워진 어투로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네? 평소 안 하던 행동까지 할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 아니네? 어서 말해 보라.”
배 교수의 이 말에 또다시 술잔을 단숨에 들이켜고 나서도 말문을 열지 못하는 창우를 최 씨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거들며 나섰다.
“일 없다. 명절은 본시 이렇게 식구들끼리 둘러앉아서 술 한 잔씩 하는 거이야. 아니 그렇네?”
“제 술 한잔만 더 받으세요.”
창우는 배 교수의 술잔에 또다시 가득 술을 따랐다.
“아버지, 제가 오늘 술이 많이 됐습니다. 조선에서 온 친구하고 점심 먹으면서부터 계속 마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아무리 마셔도 취하지도 않고 오늘따라 왜 이렇게도 아버지가 보고 싶던지…
이 못난 아들이 우리 아버지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버지, 날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난 이 세상에서 우리 아버지를 제일로 존경한단 말입니다.”
충혈된 눈을 게슴츠레 뜬 모습으로 아버지 바로 코앞까지 얼굴을 디밀었다.
그런 아들이 싫지는 않았던지 배 교수도 빤히 아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바라봤다.
창우의 넓적한 얼굴에서 비로소 미소가 돌기 시작했다.
“그래 무슨 일이네, 이야기를 해 봐.”
이때 최 씨가 부동산 사무실에서 들려오는 손님들의 소리에 자리를 일어났다.
최 씨가 밖으로 나가자 창우는 결심했다는 듯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어느 사이에 그는 말짱한 얼굴로 되돌아와 있었다.
“아버지, 지금 조선에서 급변이 일어났습니다.”
이 말에 배 교수는 그의 무거운 뿔테 안경을 벗어 술상 위에 올려놓았다.
곧 그의 황소 같이 커다란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얼굴에는 군데군데 검버섯이 피어 있었지만 눈에서는 안광이 쏟아져 나왔다.
“무슨 말이야? 급변이라니…”
“정 위원장이 한 달째 의식이 없다고 합니다.”
“뭐야? 그럼 죽었단 말이야?”
창우는 머리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죽은 건 아니고 의식불명 상태라 합니다.”
“한 달간이나 의식불명이라면 못 깨어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인데… 이거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구먼.”
“아버지!”
창우가 아버지 얼굴에 그의 얼굴을 더욱 밀착시킨 채 낮은 소리로 말했다.
“우려했던 일이 터진 것 같습니다. 물밑에서 일이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는 모양입니다.
일주일 전부터 무슨 비밀 회담이 진행 중이라 하는데…”
배 교수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긴장을 풀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역시도 누가 엿들을까 봐 목소리를 더욱 낮추며 말했다.
옆에 앉은 은하는 오빠와 아버지의 대화가 너무 심각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비밀 회담이라면… 조중 간에 말이지!”
창우는 오른손으로 턱을 고인 채 심각한 표정으로 술잔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득였다.
“예 아버지, 조선 군부하고 중국이 말입니다…”
여기까지만 말했는데도 배 교수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겠다는 표정으로 아들의 말을 가로챘다.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어 간다는 말이겠지?”
“그런데 미국도 다 알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핵무기인데 핵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미국이 묵인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조선을 중국의 괴뢰정권으로 만드는 계획을 미국이 묵인한단 말이지?”
“…”
“그럼 조선이 중국으로 편입되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로 보아야 갔구나. 그쪽 인민들의 움직임은 어떻네?”
“아무도 모르죠, 비밀 회담이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조선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는 1급 비밀이란 말입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