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문제 5
다음날 아침. 평상시보다도 삼십 분이나 일찍 출근하여 연구실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미 서 교수님께서 도착하여 내 자리 옆 소파에서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그때 책상 위 직통 전화기에서 요란스럽게도 벨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에 서 교수님과 난 동시에 화들짝 놀랐고 급히 올라오라는 이사장님의 호출 전화였다.
우리가 이사장실로 들어서자 양 이사장님 특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유쾌하게 들려왔다.
“서 이사님! 어제 저에게 전화 주시고 혹시 날아오셨어요? 이렇게 빨리 오시다니요”
“이게 어디 보통 일입니까? 날아왔지요, 암요! 날아왔어요.
사실은 마침 출발하는 마지막 KTX 편이 있어 편안하게 올라왔습니다.”
“자 앉읍시다. 그래 윤 팀장, 서 이사님으로부터 대략적인 말씀은 들어 알고 있네만 정보의 출처가 조선족 자치주의 대북한 무역담당 과장이라고?”
“예, 일전에 연변 출장을 갔을 때 알게 된 지인으로서 믿을 수 있는 정보원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는 절차는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아무리 바빠도 커피 한잔은 들고 하자면서 이사장님이 손수 커피를 내리기 위하여 자리를 일어섰다.
“그래 누구에게 물어보지? 국정원도 이 대목에서는 먹통이 분명할 테고… ”
골똘히 생각하던 서 교수님이 말문을 열었다.
“CIA 한국지부 쪽에 선을 닿을 수만 있다면?
그러자면 국정원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혹시 정확한 정보가 아니라면 일이 커질까 봐 염려되기도 합니다만…”
서 교수님이 혹여 잘못된 정보라면 일이 커진다는 말에 내 머리 칼이 뻣뻣이 일어났다.
잠시 후 부글부글 끓는 물소리와 함께 잘 볶아진 원두커피가 구수한 향기를 풍기며 방울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생각입니다. 지금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지 않겠습니까?, 방법은 그쪽에서 찾을 테니 우린 소스나 주어봅시다.”
정보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자칫 은하 가족들에게 미칠 화가 걱정되어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이사장님, 정보의 출처에 대해서는 굳이?”
커피 머신에서 내려받은 커피를 찻잔에 옮겨 담던 이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 팀장의 의도를 알겠네, 그건 말하지 말아야겠지.”
재단의 양 이사장님은 NSC 회의에도 참석하기 때문에 국정원장과의 교분이 두터운 편이다.
그는 국정원장과 통화를 시도한 후 이내 수화기를 내려놓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면서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는 사이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원장님, 동북아역사재단의 양 이사장입니다. 다행히 연결이 되는군요.
급히 알려드릴 사안이 있어 이른 아침에 결례를 무릅쓰고 전화드립니다.
정일 위원장의 건강상태가 의식불명이라는 첩보가 있었어요.
그런데 지금 미국의 동의하에 중국하고 북한 군부 사이에 무슨 비밀협상을 진행한다고 합니다. 확인할 수 있겠습니까?
아, 그렇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건 걱정 마시고요. 네, 네.”
전화를 마친 이사장님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커피 한 모금을 더 마신 후 잔을 내려놓았다.
국정원장이 확인을 해 보고 다시 연락을 주겠다고 하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고 그렇게 삼십 분가량이 지났을 때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던지 내 머리에서는 쉴 새 없이 진땀이 흘러내렸고, 커피 잔을 잡은 오른손은 떨려서 제대로 마실 수가 없었다.
방의 옆 벽면에 걸려있던 커다란 쾌종시계는 어느새 아침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때, 무거운 정적이라도 깨우려는 듯 재단이사장실의 직통 전화기에서 요란하게도 벨소리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국정원장과 통화를 마친 이사장님이 다시 돌아와 우리를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CIA 한국지부장한테 직접 전화를 했다고 하네요,
처음에는 시치미를 떼면서 부인하기에 언론에 정보를 흘리겠다고 엄포를 놓았더니 본국과 협의한 후 조금 전에야 그 사실을 확인해 주더라는 거예요.
모두 사실이라고 합니다. 국정원장의 당부가, 이 정보를 국정원에서 수집한 걸로 하자며 신신부탁하기에 그러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을 때까지는 일체 비밀로 해달라고 말입니다. 내일쯤 NSC 긴급회의가 열릴 것 같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그쪽도 체면이 있으니 말입니다. 윤 팀장, 그러기로 하세.”
“잘 됐습니다. 그러는 편이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혹여라도 이번 일로 은하 가족에게 피해가 생길까 봐 여간 걱정스럽지 않았는데 정보의 출처를 국정원으로 하기로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 자리에서 이사장님은 우리 팀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렸다.
난 마음이 급했던 관계로 계단을 이용하여 2개 층을 쏜살같이 뛰어올라 5층에 위치한 제3팀 연구실로 돌아왔다.
어차피 이번 일은 동북공정에 대응하여 우리 정부의 정책방향을 제공하는 것이 주 임무인 우리 연구 2실 제3팀의 고유 업무다.
그래서 이사장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각별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첫째, 내일 NSC 회의 때 우리 재단에서 제시할 정책 보고서를 오늘 중으로 제출하라는 것이다.
둘째, 재단의 성격상 이번 일에 우리가 깊숙이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하므로 보안등급을 최상위로 유지하라는 각별한 주의였다.
우선 제1차적인 방식에 따라서 오후 다섯 시까지 우리 일곱 명의 팀원들 각자가 정책보고서 초안 작성에 나섰다.
나 역시도 초안작성을 위하여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해 보았다.
이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 민족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불현듯 지난번 연변 출장길에 배 교수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윤 선생, 북조선의 인민들은 말입니다, 한국을 흡수 통일해야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어요.
그들도 다 알아요. 자기들은 그럴 힘이 없다는 사실을요.
그건 9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을 겪으면서 그들이 터득한 교훈이었죠.
결국 언젠가는 한국이 통일을 주도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뭔지 아세요? 이 사람들이 자존심 하나만큼은 세계최고란 말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후예라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북조선의 인민들이 우려하고 있는 문제를 한국이 풀어줘야 한다는 겁니다.
한쪽이 한쪽을 차별하고 천시하는 내부갈등상이 없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 굶었으면 굶었지 배부른 돼지로는 살려고 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 내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게 포용할 수 있는 포용력이 지금 한국 사람들에게 필요하다는 거예요.”
진정 어린 마음으로 북한 사람들을 포용해야 된다는 배 교수의 말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 배 교수의 주장처럼 북의 동포들에게 확실한 믿음을 심어주어야 한다.
뜨거운 동포애를 바탕으로 함께 잘 살 수 있다는 같은 동포 간의 믿음, 이민족의 품속보다는 우리 민족의 품속이 더욱 따듯하다는 우리 민족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어차피 군부의 상층부는 저들의 살길을 찾아서 이민족의 품속으로 안기려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어떤 달콤한 이야기로 합리화하더라도 우리 민족을 팔아먹는 매국행위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야 한다.
북의 동포들이 평양 시내를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서 떨쳐 일어나 중국 흡수를 반대하는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한다면 국제여론에 의해서라도 중국의 야욕을 막을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유엔이 반대하고 나설 것이고 미국도 중국의 행위를 묵인할 수만은 없게 된다,
바로 이런 극적인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중국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야욕을 꺾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래, 지금 당면한 문제의 유일한 해법은 우리 동포 간 신뢰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