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라 고구려 2
며칠 후 연구실로 출근하자 오늘자 조간신문의 1면 기사가 내 시선을 끌었다.
어제 임진각에서는 몇몇 보수단체들이 시끌벅적하게 대북 전단지 살포 행사를 가졌던 모양이다.
관련사진과 함께 여기저기 익숙한 문구들이 눈에 띄자 드디어 국정원의 대북공작이 개시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조선 애국청년단 명의로 된 ‘조선동포들에게 호소함’이라는 전단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위대하신 장군님께서 과로로 잠시 병환 중인 때를 틈타 중국이 저들의 괴뢰정권을 수립하려고 한다,
이완용 같은 국방위원회의 노망 든 늙다리들이 우리 민족을 중국에 팔아넘기려는 반민족적인 범죄를 획책하고 있다.
조선의 애국동포들이여!,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저 반민족적이고 야만적인 조중비밀 회담을 쳐부수기 위하여 분연히 떨쳐 일어나자!.
이 엄숙한 구국의 대업에 동참하여 백척간두의 위급에서 우리 민족을 구해야 되지 않겠는가?,
작금의 나라 사정이 이러하다면 차라리 북과 남이 하나 되어 우리 민족의 통일대업을 이룩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애국동포들이여! 어찌 우리 동포의 손길이 이민족의 그것보다 일억만 배 따듯하지 않겠는가!」
마치 북한 내부의 선동인 냥 ‘조선 애국청년단’이라는 가공의 단체를 내세운 것이 특이했지만 우리의 정책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 분명했다.
사흘 전 정책브리핑을 통해서 공개된 문건이 지금 대북전단지로 변신하여 북한 전역으로 날려 보내고 있었다.
또다시 보름 가량이 흘렀다.
팀원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같이한 후 도시의 바쁜 일상을 내려다보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매일매일 엄청난 량의 대북 전단지를 날려 보내고 있다는데 지금쯤이면 북쪽에서도 중국과의 비밀 회담 소식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들의 반응이 무척 궁금했다.
언론을 통해서 접하는 정보에는 한계가 뚜렷하여 내심 국정원의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지만 아직까지 가타부타 말이 없다.
답답한 마음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을 때 내 책상 위 업무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려 됐다.
“예, 3팀장 윤준노입니다.”
“곽 과장입니다. 오늘 시간이 되시면 한번 봤으면 합니다. 파고다공원에서 세시쯤 어떻습니까?.
아 참 오늘 날씨가 좋으니까 웬만하면 운동 삼아서 걸어서 오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렇잖아도 모든 것이 궁금하던 차였는데 마침 잘 되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공원에서 보자고 했을까?
재단에서 파고다공원까지는 걸어서 삼십 분 정도의 거리이다.
시월의 가을 공기는 더없이 맑고 쾌적했다.
가로수를 따라서 잘 정비된 길가에는 길게 줄지어 선 코스모스들이 가을바람에 하늘거렸다.
그중에서 노란색 코스모스 한줄기를 꺾어 코에 갖다 되자 불현듯 해맑게 웃는 은하의 얼굴이 떠오른다.
은하는 지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날 은하가 내게 긴급메시지를 보내지 않았다면 긴박하게 돌아가던 평양 소식을 우린 정말 까마득히 모른 채 손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우리 국토의 절반을 고스란히 중국에 헌납할 뻔했다.
그런데 아까부터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 무언가 이상했다.
2년 전 연변을 떠나오던 날 정체불명의 괴한들에게 납치되어 어느 사찰에 끌려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다.
꼭 누군가로부터 미행을 당하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덜컥 겁이 났다.
차라리 걸음을 빨리하여 공원을 향해서 거의 뛰다시피 내달렸다.
공원으로 들어서자 건너편 나무벤치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던 곽 과장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라도 되는 양 그는 오늘도 짙은 선글라스를 쓴 모습으로 신문으로 입을 가린 채 누군가와 통화 중이다.
귓속에 무선 이어폰이 숨겨져 있는지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윤 팀장님, 뒤돌아보지 말고 자연스럽게 대화합시다. 미행하는 자가 있습니다.”
미행을 당하고 있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사실이었다고 하니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저쪽 나무 뒤에서 지켜보는 자가 있으니 모르는 척하고 자연스럽게 제 옆으로 와서 앉으시죠.”
제아무리 자연스럽게 행동하려고 해도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이제는 아예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땀이 흘러내리고 있어 연신 손수건으로 닦아야 했다.
“윤 팀장님을 노리는 자들이 있다는 첩보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확인 차 공원에서 만나자고 했던 것인데 역시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요원이 저자의 뒤를 밟으며 왔습니다.
혹시나 하여 말씀드립니다만 당분간 우리 안가에서 지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순간적으로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나도 모르는 사이 말까지 더듬거렸다.
“저, 저 같은 연구원 샌님이 뭐 중요한 인물이라고…”
“그렇지가 않습니다, 우리 쪽 첩보에 의하면 중국의 어느 삼합회 조직에서 윤 팀장을 노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당분간 우리 안가에서 지내는 걸로 합시다.”
프로요원답게 곽 과장은 가끔씩만 정면을 응시하며 나와 대화하는 것에 집중하는 척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그의 침착한 행동 덕분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마음이 진정되면서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최근에 우리 쪽의 공작으로 날려 보낸 대북 전단지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정확한 것은 우리로서도 잘 알지 못합니다.
저 나무 뒤에 숨어있는 자를 추궁하면 단서가 나올 것도 같은데 그래도 당분간 체포하지 않고 지켜볼 작정입니다.
지금은 배후를 밝히는 게 중요하니까요.”
나를 미행했던 자를 또다시 은밀하게 미행하던 곽 과장의 부하 요원이 실시간으로 곽 과장에게 보고했다.
조금 전 또 한 명이 합류하여 두 명의 정체불명 자가 지금 우리 쪽을 노려보고 있다는 것이다.
곽 과장의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니 불현듯 2년 전 연변을 떠나오던 날의 일이 떠올랐다.
등신 불상이 모셔진 사찰에 납치되어 갔을 때 끝내 얼굴은 볼 수 없었지만 연신 줄담배를 피우던 자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누구라도 우리의 일을 방해하려 든다면 우린 반드시 그 자를 응징하게 될 것이오.
만약 당신이 이 일에 개입한다면 당신을 죽임으로써 한국 정부에 경고의 상징으로 삼을 것이니 신체를 보전하고 싶거든 내 말을 명심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이 자들의 단체가 장백산천지회라고 했던 것 같고 은하까지 연계시켜서 내게 협박했었다.
나를 미행했던 자가 그들의 조직원이라면 당시 그 자의 말이 허튼소리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몰려오면서 이미 흘러내린 식은땀과 합세하여 오한까지 느껴졌다.
“그런데 윤 팀장님. 대북 전단지가 북한 전역의 구석구석으로 전파된 지도 벌써 보름이나 지났습니다.
그런데도 함경도 일대에서 북한 군부를 비난하는 소자보가 몇 장 나붙었다는 첩보만 있었지 이렇다 할 동요는 아직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일시적인 오한이었지만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떨고 나니 폭풍 후의 고요처럼 정서적으로는 한결 편안해졌다.
곽 과장의 이 말은 사실 중요한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금년에 새로운 정부가 들어선 후 그야말로 남북관계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래서 보름 전 정책보고서를 마무리할 당시에도 우리 팀이 내린 결론은 긍정보다는 부정 쪽에 가까웠다.
십 년간 지속 돼온 햇볕정책은 공식적으로 폐기된 상태로 일체의 대북 식량지원이 중단되었고 금강산 관광 등 대북경협사업마저도 원점에서 재검토가 거론되는 실정이다.
곽 과장의 질문에 난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신뢰의 문제입니다. 이민족보다도 같은 동포의 가슴팍이 훨씬 따듯하다는 그 신뢰가 문제겠지요.”
이 대목에서는 적잖이 비유가 상했던지 곽 과장의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오십 미터 전방의 수양버들 뒤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정체불명자를 놓치지 않았다.
“그래서 같은 동포인 우리를 믿지 못하겠다, 뭐 그런 뜻입니까?”
곽 과장의 짜증에 가까운 반응이 오히려 그동안 억눌려왔던 나의 민족적인 감성을 자극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식량사정이 최악이라면서요?
백만 명이나 굶어 죽었다는 외신 보도도 있던데 관련 정보가 사실입니까?”
“…”
“그런데 최근 우리 쪽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연속적으로 사상 최대의 풍작을 맞이해서 전국의 쌀 보관창고들에는 삼 년 치의 묵은쌀 때문에 금년에 수확하는 햅쌀을 보관할 여유가 없는 실정입니다.
농민단체에서는 더 이상의 쌀값 하락을 막기 위해서도 대북 식량지원을 재개하는 방법밖에 없다며 연일 정부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또 정부 일각에서 논의되고 있는 대책들 가운데는 오래된 묵은쌀을 소, 돼지의 사료용으로 사용하자는 방안도 포함된 걸로 알고 있습니다.”
“…”
“물론 우리 정부로서도 할 말은 있겠습니다.
북한의 핵실험으로 UN의 대북제재 결의가 있었고, 그 일환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의 식량지원이 전면 중단된 상황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중국은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지원하고 있습니다.
정작 굶주려서 죽는 사람들은 핵 실험과는 무관한 북한의 일반 국민이라는 사실을 지금 우리 정부는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달러를 주자는 것도 아니고, 소 돼지에게라도 주지 않으면 썩혀서 버려야 되는 오래된 묵은쌀을 지원하자는 것인데 그마저도 안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북한 동포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른다고 생각하십니까?”
곽 과장의 짙은 선글라스 속에서는 내 말에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의 쓴웃음이 한참 동안이나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을 배신하고 중국의 품속으로 의탁하겠다? 윤 팀장은 지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십니까?
반만년을 함께 살아온 같은 민족을 배신하는 행위는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
곽 과장의 말에 난 잠시 말문을 닫았다.
자신의 생각에서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으려는 그의 아집에 화가 났기 때문이다.
마음을 진정시켜 가며 차분하게 다시 말했다.
“과장님, 이제 겨우 보름입니다. 좀 더 지켜보시죠?
과장님 말씀대로 그 무엇으로도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북녘의 동포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어들여서 삼국을 통일한 것은 민족적인 관점에서는 분명 온당한 조치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가 본색을 드러내고 우리 민족을 집어삼키려고 했을 때 모두들 들고일어났지요.
우리 민족이 위급에 빠진 상황에서는 패망한 고구려와 백제의 기층 민중들이 신라 편에 서서 당나라를 상대로 목숨 걸고 싸웠지 않았습니까?
곧 그렇게 되리라 믿습니다.”
방금 나의 말속에서 평소 그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지 선글라스 속에 숨겨진 그의 눈빛에서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 한가득이나 그려졌다.
돌아올 때는 택시를 타고 왔다.
오늘 저녁부터 곧장 안가에서 기거하자는 곽 과장의 재촉이 있었지만 심리적으로 도무지 내키지 않아 정중히 사양했다.
그 대신 당분간 재단 건물의 지하 1층 기숙실에 기거하면서 국정원 요원들의 실시간 보호를 받는 타협안을 받아들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