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의 넋 1
토요일의 오후시간, 주말이라서 그런지 길림성의 연길시장은 평소보다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야채상들의 좌판 사이로 장을 보러 온 사람들과 소리소리 지르는 상인들의 고함소리로 최 씨 부동산중개소 앞은 모처럼만의 활기로 넘쳐난다.
그러나 주변의 활기와는 어울리지 않게 열 평 남짓한 최 씨 부동산중개소는 낡은 부동산 간판만이 출입문 위에 초췌하게 붙어있다.
출입문의 왼쪽에는 ‘연변 조선인 향토연구소’라는 색깔 바랜 세로형 현판이 시월말의 늦가을 미풍에 흔들거렸다.
오늘따라 콧수염이 더욱 촌스러워 보이는 최 씨가 양팔을 낀 채 자신의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사무실 소파에는 중년의 사내 둘이 담배를 피우면서 장기를 두고 있고, 그 주위에는 두 명의 젊은이들이 목을 길게 내어 빼고서 장기판을 구경하고 있다.
이때 구경꾼 중 한 사내가 시계를 보기 위해 왼쪽 팔목을 걷어 올리자 산 모양의 파란색 문신이 드러났다.
그 사내가 옆의 다른 사내에게 눈짓하는 것을 신호로 신호를 받은 청년이 주변을 살피면서 안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간다.
배 교수가 기거하는 안쪽 내실의 ‘향토연구소’를 슬쩍 들여다보더니 이내 종종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잠시 후 배 교수가 출타를 하려는지 지팡이를 짚으며 중절모에 낡은 양복차림으로 나섰다.
그 순간 최 씨가 벌떡 일어나며 배 교수에게 묻는다.
“어디 출타하시는가?”
“응, 갑갑해서 말이야. 옛날에 살던 구룡촌마을까지 바람이나 쏘이고 오려고 하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렇게 골방에만 처박혀 있지 말고 가끔씩은 바람도 쏘이고 그래야지.
심심한데 나도 같이 가줄까?”
“됐어, 자넨 가게 봐야지. 혼자 다녀옴세.”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최 씨의 호의를 뒤로한 채 뚜벅뚜벅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배 교수가 걸어갔다.
배 교수의 뒷모습이 저만치 사라지자 장기판을 구경하던 두 사내도 사무실을 나섰다.
조금 전 배 교수의 내실을 염탐했던 사내가 휴대폰으로 연락을 시도하는 사이, 또 한 명은 은밀하게 배 교수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지금 배 교수는 걸어서 두어 시간 거리인 연길시 외곽의 고향마을로 산책을 가는 중이다.
그는 가끔씩 드넓은 옥수수 밭길을 걸으며 이런저런 생각에 빠지곤 하는데 오늘은 하루 종일 북조선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했다.
천만다행으로 정 위원장이 의식을 회복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중국의 괴뢰정권이 들어설 뻔했다.
이것은 곧 동북공정의 제3단계로서 우리 민족으로서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정 위원장이 회복된 이후에도 북조선을 강하게 압박하여 기어이 기존의 계획을 밀어붙였던 중국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한국의 대북 지원으로 더 이상의 압박이 실효성이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북송유관을 다시 가동함으로써 대북 압박 정책은 철회되었고 예전의 유화정책으로 회귀하고 말았다.
‘그래 같은 민족인 남과 북이 뭉친다면야 제깟것들이 어떻게 우리 민족을 당할 수가 있겠나!
중국의 음모를 물리치기 위해서도 어서 속히 통일이 돼야 돼,
그래서 더 늦기 전에 우리 민족의 북방고토를 되찾아야 할터인데 ….’
어느덧 눈앞으로 자신의 키보다도 큰 드넓은 옥수수 밭이 펼쳐졌다.
곧 수확을 앞둔 이모작의 옥수수는 갈색으로 잎이 말라있어 늦가을의 운치를 더했다.
이때였다, 갑자기 검정색 지프차 한 대가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더니 배 교수의 바로 옆에서 멈추어 섰다.
“거기 배 교수님 맞으시죠?”
중절모 위로 비치는 오후의 따가운 햇살 때문에 잠시 눈을 찡그리던 배 교수가 흠칫 놀라는 표정으로 더듬더듬 말했다.
“그 그렇소만, 뉘, 뉘시오?”
배 교수의 이 말과 동시에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건장한 청년 두 명이 차에서 내렸다.
“모시고 오라는 분이 계십니다. 잠시 따라가 주셔야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는 다짜고짜 양팔을 하나씩 잡은 후 저항하는 배 교수를 지프차에 힘을 주어 밀어 넣었다.
이때 배 교수의 지팡이가 길가에 떨어졌지만 지프는 그대로 출발했다.
배 교수의 옆자리에 앉은 청년이 검은 눈가리개를 배 교수의 눈 부위에 묶으며 말했다.
“소란 피우지 않고 얌전히만 가신다면 굳이 손까지는 묶지 않겠습니다. 약속하시겠습니까?”
“그, 그럽시다. 그런데 대체 무슨 일인지 그것만이라도 말해 줄 수 없겠소?”
“모시고 오라는 분이 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것 외에는 아무것도 말해 드릴 수 없습니다.
차라리 한숨 주무십시오. 먼 길을 가야 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말한 청년은 그의 주머니 속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배 교수의 입을 틀어막았다.
배 교수가 그의 손목에서 천지라는 글씨가 새겨진 산 모양의 파란색 문신을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행기를 탄 듯이 어질어질하더니 그대로 졸음이 밀려왔다.
손수건에 수면을 유도하는 마취성분이 있었던지 정신을 차리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봐도 몸은 무거워지고 눈까풀이 저절로 감기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은하가 품에 안겨서 울기도 했고 창우가 누군가에게 끌려가기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잠을 깨긴 했는데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그런데 지금 가고 있는 이 길은 어쩐지 익숙한 길인 것 같다.
옆에 앉은 청년이 차창을 반쯤 열었을 때 불어오는 바람결에 풀냄새며 흙냄새며 익숙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렇다. 이 길은 틀림없이 백두산으로 가는 길이다.
아, 생각만 해도 가슴이 울렁거리는 우리의 영산 백두산!
몇 시간을 잤는지, 얼마나 달려왔는지도 모른다.
꽤 추운 것으로 보아서는 아마도 벌써 밤이 된 모양이다.
드디어 물소리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하고 공기가 깨끗해지면서 뽀송뽀송한 감촉이 느껴진다.
이때 옆자리의 청년이 양손을 뒤로하라고 한다.
“이렇게 묶어야만 제가 혼나지 않습니다. 대신 느슨하게 묶었으니 아프지는 않을 겁니다.”
“고맙네.”
“모쪼록 오늘 고분고분하게 행동하셔서 신체를 보전하시기 바랍니다.
참고로 말씀드린다면 공안들도 우리가 하는 일에는 일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지요?”
지프차가 정차한 후에도 곧바로 내리지 않았다.
최근에 중국 아이들이 즐겨 듣는다는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나는 이어폰을 배 교수의 두 귀에 씌워준 후에야 차에서 내리게 했다.
육중한 철문 소리가 나더니 청년들이 배 교수의 양팔을 하나씩 부여잡고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갔다.
지하실 특유의 쾌쾌한 냄새와 차가운 공기가 분위기를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다.
청년들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배 교수를 앉히더니 양손을 풀어준 후 눈의 안대와 시끄러운 이어폰도 벗겨주었다.
그제야 배 교수는 이제 좀 살겠다는 표정으로 숨을 길게 들이마신 뒤 다시 내어뱉는다.
그의 머리 위 천장에는 작은 백열등 하나만 켜져 있어 불빛은 배 교수의 주위만 밝힐 뿐 여전히 다른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때,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담배연기와 함께 중년 사내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앞쪽으로부터 들려왔다.
“오신다고 수고 많았습니다.”
희미한 불빛을 의지하여 앞쪽을 응시하니 중절모자부터 양복 상하위에 구두까지 온통 흰색으로 치장한 자가 5미터쯤 전방에서 자신을 노려보며 앉아있었다.
양 옆에는 검정색 정장 차림의 청년들이 좌우에 버티고 서 있다.
“혹시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린 장백산천지회 단원들입니다”
여기로 끌려오면서 어림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 자의 입으로 직접 천지회라고 말했을 때 배 교수는 오금을 저리며 새파랗게 질려갔다.
천지회는 동북삼성인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에서 중화 제국주의를 표방하는 극우주의 성향의 무자비한 폭력단체다.
지방정부의 암묵적인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웬만한 폭행이나 심지어는 살인을 저질러도 공안들조차도 묵인해 주는 실정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우리를 폭력이나 일삼는 삼합회조직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아요!
오늘 선생에게 특별히 우리 조직을 소개해드리죠.
우리 천지회의 시초는 만주족의 성지인 장백산을 사수하기 위하여 340년 전에 만든 비밀 결사대였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면서 잠시 해산되었다가 1962년 중조변계조약으로 다시 결성되었어요.
선생께서도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청일 간에 맺었던 간도협약 때는 백두산의 두 번째 지류인 석을수를 그 경계로 삼았기 때문에 장백산의 천지 대부분이 우리 중국령이었거든.
그런데 멍청한 주은래가 정일성의 비열하고도 간계한 계략에 넘어가서 최상류인 홍토수를 새로운 경계로 삼지 않았겠소?
이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장백산 천지의 육 할을 조선에 빼앗기는 통탄스러운 일이 발생하고 말았소.
우리의 목적은 멍청한 주은래가 맺었던 굴욕적인 조약을 파기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신령스러운 장백산을 온전하게 되찾는 것이오.
우리 단원들은 이 위대한 과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지금 이 시각에도 치열한 장백산 공정을 전개하고 있는 것이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