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의 넋 2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배 교수를 노려봤다.
이때 그들 중 한 명이 배 교수 앞에 2리터짜리 생수 한 병을 놓아주고 다시 물러났다.
배 교수는 얼마나 목이 탔던지 생수를 단 번에 거의 반 병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다.
간간히 지하실 위의 작은 창에서 들려오는 바람소리만이 적막감을 깨우고 있을 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위압감이 느껴지는 그자의 낮은 음성이 다시 들렸다.
“배 교수 당신은 무엇 때문에 우리들의 공정을 방해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 것이요?”
배 교수는 이제야 이자들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2년 전 향토연구소의 분기 토론회 때 몽둥이찜질을 가했던 패거리들이 바로 이 단체였지 않은가!
그동안 자신을 끊임없이 감시하면서 심지어는 폭력과 경고를 일삼던 조직이 바로 이들이었음을 짐작했다.
배 교수는 그의 검정색 뿔테 안경을 벗어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후 다시 안경을 썼다.
어차피 주눅이 들은 채로 앉아있어 보았자 이자들이 자신을 불쌍히 여겨서 풀어줄 것 같지도 않았다.
이렇게 생각하자 자신도 모르는 오기가 발동하면서 왕 회장이란 자를 향해서 쏘아붙였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당신들이 바로 백두산 공정을 추진하는 핵심 세력이겠습니다.
내 짐작대로라면 여기는 백두산의 서문 아니면 남문 쪽이 되겠고,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여러분들이 운영하는 호텔의 지하실이겠습니다 그려.
그런데 대체 내가 여러분들이 하는 사업을 어떻게 방해했다는 겁니까? 그 연유나 한번 들어봅시다?”
“지금 우린 당신 아들을 찾고 있소. 배창우를 말이오.
이 친구한테 뭘 좀 물어보려고 우리 단원들을 보냈더니만 그새 줄행랑을 치고 말았더란 말이오.
당신 아들 배 창우는 지금 어디에 있소?”
배 교수는 이 험악한 자들이 자신의 아들을 노리고 있다는 말에 당황하기 시작했다.
아들 걱정에 사지가 떨려오면서 조금 전의 당당했던 태도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목소리마저 떨렸다.
“도대체 왜들 이러시오? 우리 아들이 무 무슨 죄를 지었다고…”
배 교수의 이 말에 왕 회장은 콧방귀까지 뀌어가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흥,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시겠다고? 그렇다면 내 말해주리다.
지금 조선에는 그동안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해 왔던 우리 쪽 군부세력이 뿌리째 뽑혀버렸소.
영감, 그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정녕 모른단 말이오?
당신 아들이 조선 관리한테서 전해 들은 중조 비밀회담 소식을 한국의 동북아역사재단에 고변을 했단 말이지.
그래서 한국의 국정원에서 공작하여 이것을 폭로하는 전단지를 보름 동안이나 조선 상공에 뿌려 댔거든.
그러니 정 위원장이 깨어났을 때 어떻게 됐겠어?”
말을 마친 왕 회장은 안주머니에서 권총을 꺼내 들었다.
어둠 때문에 배 교수는 왕 회장 일행을 바라볼 수는 없었지만, 배 교수 머리 위의 희미한 조명 탓에 왼쪽 벽면이 스크린이 되었다.
권총을 든 왕 회장의 그림자가 실감 나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생동감 있게 상영되었다.
“탕!, 탕!, 탕!”
마치 지하실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커다란 총소리가 연이어 세 번 울렸다.
배 교수는 흠칫하며 그 자세 그대로 경직돼 버렸는데 다행히 실탄이 들어있지 않은 공포탄이었다.
이때 배 교수가 앉은 나무의자 아래로 힘없이 한가닥의 물줄기가 새어 나왔다.
배 교수가 총소리에 놀라 그만 오줌을 싼 것이다.
그렇잖아도 장시간 소변을 보지 못해서 억지로 참고 있었는데 밀폐된 공간에서의 총소리에 놀라 순간적으로 전립선에 힘주는 것을 놓쳐버렸다.
배 교수는 수치심에 오들오들 떨었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에 대해서 아랑곳하지 않았다.
왕 회장이 방금 피우던 시거로 새 시거에 다시 불을 붙였다.
한순간도 손에서 시거를 놓지 않는 것으로 보아 어지간한 애연가임을 알 수 있다.
“우리로부터 온갖 지원을 다 받으면서 단 한 번도 머리 숙이지 않는 저 몰염치한 자주성을 꺾어버리기 위해 우리가 언제부터 준비한 공정이었는데…”
여기까지를 말한 왕 회장은 주먹으로 자기 앞에 놓인 탁자를 ‘쾅’하고 내리쳤다.
“우리를 의식하여 아직까지 죽이진 않았다지만 하루아침에 그 뿌리가 뽑혀버렸단 말이야.
영감!, 이만하면 당신 아들이 우리 손에 죽어줄 죄로 충분하지 않겠소?”
공포와 수치의 감정으로 뒤범벅이 된 배 교수의 몰골은 한마디로 처참했다.
이제는 아예 소처럼 뜨거운 오줌을 콸콸 쏟아내자 왕 회장이 가소롭다는 듯 잠시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영감!, 당신은 동북삼성이 조선반도의 영토라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심기를 끊임없이 건드렸었지.
그 근거로 삼는 것이 장백산 정계비에 기록돼 있었다던 동위토문 서위압록의 비석 문구라고 주장하면서 말이야.
지금까지 우리가 지켜봐 온 당신은 교수답게 곱게 논문이나 발표하는 그런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어요.
강연회를 연다, 어쩐다 하면서 조선족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행위를 한답시고 난리법석도 아니었지.
우리 입장에서는 당신의 그런 분열 반동적인 행위를 마냥 수수방관만 할 수는 없었지.
그래서 우리가 당시 힘을 좀 써서 당신을 대학에서 쫓아냈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당신을 타이르고 경고했지만 끝내 당신은 우리말을 듣지 않았어요.”
또다시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왕 회장이 자신의 휴대폰으로 수신된 한통의 문자 메시지를 읽었다.
“좋소!, 당신 아들은 아마도 조선으로 도망친 것 같은데 이쯤에서 이 문제는 마무리 짓도록 하겠소.
단, 아들놈 대신 당신이 죽어주어야만 되겠소이다.
잘난 아들을 대신하여 그 아비가 십자가에 매달린다면 이 또한 값진 일이 아니겠소?
영감! 따지고 보면 당신 아들의 행위는 사실 단순한 실수 한 번으로 벌어진 일이었소.
하지만 당신은 뼛속까지도 분열 반동주의의 피가 흐르고 있으니 아들놈보다도 훨씬 위험한 인물이외다.
당신의 그 질긴 고구려 민족의식을 뿌리 뽑지 않고서는 우리나라가 위태롭게 생겼으니 어찌하겠소?,
우리나라가 향후 천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번영하기 위해서는 당신 같은 위험한 분열주의자는 우리 땅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오.”
왕 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자 그가 앉았던 철제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넘어졌다.
그가 두세 발짝 앞으로 나서자 그를 좌우에서 호위하던 무리들도 동시에 앞으로 다가왔다.
왕 회장이 앞으로 다가왔을 때 주변은 역겨운 시거 냄새가 진동했다.
왕 회장이 손가락을 곧게 뻗어서 아까보다 더욱 강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영감!, 당신과 정 위원장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시겠소?
그것은 말이오. 둘 다 너무 뻣뻣하다는 겁니다.
당신은 우리 땅에서 나는 쌀로 밥을 지어먹고 우리 땅에서 집을 짓고 살아가면서도 겸손하기는커녕 우리 땅을 조선 땅이라고 큰소리치면서 우겨 되고 있소.
적반하장도 이런 적반하장이 어디 있겠소?
정 위원장, 그자도 마찬가지란 말이오.
현재 조선에서 사용 중인 원유의 90퍼센트를 우리가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어요.
대부분의 식량이나 생필품도 다 우리가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조선의 목숨 줄을 우리가 틀어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그런데도 고개를 숙이지 않아요.
더 달라고 부탁할 때도 머리 꼿꼿하게 쳐들고 큰소리치면서 더 내어 놓으라고 요구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지 이해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소.
우리는 이것이 고구려의 자주성이라고 이해하게 되었단 말이오.
그래서 그 자주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던 참에 당신 아들놈 때문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소.
자 이제, 당신 아들놈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당신을 죽임으로써 우리 중화제국이 받은 상처를 조금이나마 보상받아야 되겠소이다.”
왕 회장이 음흉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물론 우리 사업을 방해한 죗값으로 처단해야 할 자가 한 명 더 있지,
한국에 있는 놈 말이오. 선생, 부디 안녕히 가시오.
다음 생에서는 다시는 이런 악연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중국인의 넓은 배포로 웬만하면 인정을 베풀 터이니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보시오?”
배 교수는 이제 곧 죽는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전방을 향해 빙긋이 한번 미소 짓고는 여유로운 표정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중국인은 배포가 크다 하니 내 딱 두 가지만 부탁하는 바이오.
첫째는 내 가족을 더 이상 괴롭히지 마시오! 죽음은 나 혼자면 족하오.”
희미한 불빛 속에서 왕 회장이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인다.
배 교수 머리 위에 매달린 등불 때문에 여전히 벽면은 영화가 상영 중인 스크린처럼 그림자가 희미하게 드러났다.
“중국인은 배포가 크다 하니 두 번째의 약속 또한 꼭 지켜주기를 바라오.
나를 죽이거든 내 몸뚱이를 화장한 후에 백골이나마 백두산 천지에 뿌려주시오. 부탁하리다!”
이번에는 깊은 침묵만이 흐를 뿐, 어둠 속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때 배 교수가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두 손을 번쩍 들고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백두산의 주인은 우리 민족이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랐고 절규하듯 외쳤다.
전방의 어둠 속에서는 방음장치 장착을 끝낸 방음 총이 자세를 취하며 서서히 배 교수의 오른쪽 심장으로 조준되었다.
이번에도 벽면에서는 총구의 그림자가 영화처럼 반사되었다.
고불고불 피어오르는 시거연기로 인해서 마치 감동적인 라스트신의 명장면이 만들어졌다.
“간도 땅의 주인도… ”
“탕!”
전방의 어둠 속에서 불꽃이 한 번 번쩍 튀는가 싶더니 배 교수가 의자에서 튀어 오르면서 바닥에 꼬꾸라졌다.
단 한방으로 총탄이 정확하게 심장을 관통했고, 배 교수는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쓰러지면서도 심장에서 흥건하게 뿜어져 나오는 핏자국을 왼손으로 부여잡고 ‘우리 민족이다!’를 천천히 되뇌더니 이내 목뼈가 힘없이 주저앉았다.
천금만금 무겁게만 느껴지던 그의 검정색 뿔테 안경은 바닥에 부딪히며 박살이 났다.
안경이 벗겨진 후 드러난 배 교수의 큰 눈동자는 마치 백두산 호랑이가 어둠 속을 노려보듯 매섭게 부릅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