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116)

이중하의 꿈 5

by 맥도강

여기는 백두산의 최정상 장군봉이 올려다 보이는 더 넓은 백두산 자락이다.

‘東爲土門 西爲鴨綠(동위토문 서위압록)’의 글귀가 선명하게 새겨진 백두산정계비를 지척에 두고 1887년 조청(朝靑) 간의 공식적인 제2차 국경회담인 정해담판이 열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는 가운데 회색 천막 안에서는 넓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양국의 협상대표들이 마주 앉았다.

건너편에는 원세개를 중심으로 청나라의 협상대표들이 자리를 잡았고, 이쪽 편에는 토문감계사 이중하를 중심으로 조선 측 대표들이 자리를 잡았다.

원세개의 탁자 위에는 서슬이 시퍼런 칼 한 자루가 칼집에서 빼어진 채 놓여있다.

탁자 위에서 발산하는 칼날의 살기로 인하여 회담장의 분위기는 자못 살벌하기만 하다.

그 광경 하나만으로도 회담에 임하는 청나라 대표들의 무례한 태도를 엿볼 수 있었다.


원세개가 이중하를 손가락질하면서 매몰차게 호통 치기 시작했다.

“2년 전의 을유회담이 네놈의 쇠심줄보다도 질기다는 그 고집불통으로 결렬되었다는 것이 정히 사실이더냐?”

이중하를 노려보며 마치 잡아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핏대를 세우던 원세개가 옆에 세워져 있는 백두산정계비를 가리키며 또다시 핏대를 세우기 시작했다.

“네놈이 저 정계비 상의 토씨 하나를 핑계 삼아서 송화강의 지류인 토문강이 동쪽의 경계라고 고집부리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되었다는 것이 정녕 사실이렷다!.”

이중하도 밀리지 않겠다는 태도로 즉각 반격에 나섰다.

그의 눈빛은 한 치도 밀리지 않겠다는 다부진 각오가 서려있다.

“백두산정계비는 15년 전, 양국의 합의로 세운 국경비이거늘 이제 와서 귀측이 이를 부정한단 말이오?”

이 말에 분노한 원세개가 탁자를 두 손으로 내리치며 벌떡 일어섰다.

“네 이놈!, 토문강은 도문강으로서 두만강의 만주 식 이름이라고 진즉부터 일러주었거늘, 그런데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이토록 생떼를 부린단 말이더냐?”


이중하도 원세개를 노려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작 생떼를 부리는 건 우리가 아니라 바로 귀측인 것 같소이다.

토문강과 두만강이 엄연히 다른 강이거늘 대국이 대국답지 않게 어찌 그런 생떼를 부린단 말입니까!”


이때 원세개가 치밀어 오른 화를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던지 탁자 위에 올려둔 그의 칼을 들어 이중하의 목에 들이대었다.

서슬 퍼런 광채가 장막 안을 한 바퀴 휘돌았다.

“이런 건방진 놈!. 우리가 너희 나라를 구해준 은혜를 잊었더란 말이더냐.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을 평정해 주었던 그 공을 갚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날뛴다더니, 무얼 알고나 까불어야지!


이중하는 오히려 두 눈을 더욱 부릅뜬 채 원세개를 노려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내 목은 자를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국토는 단 한 치도 양보할 수 없소이다!

이때 칼을 잡은 원세개의 오른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네 이놈! 정녕 죽고 싶더란 말이지. 오냐. 소원대로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단칼에 베어주마!”


그런데도 이중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오히려 비웃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이 웃음소리에 자제력을 잃어버린 원세개가 더 이상은 흥분을 참지 못하고 이중하의 목을 사정없이 내려쳤다.

순간 이중하의 상투 뭉치가 탁자에 툭! 소리를 내면서 떨어졌다.

이쯤 되자 원세개도 질렸다는 듯 칼을 탁자에 내려 꽃은 후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다.

그러자 마치 백두산호랑이가 포효하듯이 이중하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온 백두산천지를 뒤흔들었다.

‘우하하하하!, 우하하하하!,’


지축을 뒤흔드는 이중하의 호탕한 웃음소리에 난 번쩍하고 눈을 뜨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뻑 비를 맞은 듯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동안 꽉 막혔던 머릿속의 혈류가 팽팽하게 순환되는 기분이다. 몸이 가벼워지면서 이제는 내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달력을 보니 어느덧 마흔아홉 살의 내가 되어 있었다.

나의 자의식을 인식할 수 있는 내 몸의 주인으로서 다시금 되돌아온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거울을 쳐다보며 내 두 손으로 얼굴을 세차게 때려보았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뺨에 얼얼한 느낌이 전해지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었다.

감격에 겨운 나머지 두 손을 들어 힘차게 만세를 불렀고, 세상에 다시 태어난 이 기쁜 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드디어 악몽 같았던 긴 동토의 겨울에서 벗어나 이제 희망찬 봄볕을 맞이하게 되었다.


내가 다시 몸도 마음도 온전한 상태로 되돌아오자 어머니는 온 마을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큰 잔치를 벌였다.

소식을 전해 들은 후배들의 주선으로 모교의 풍물패 동아리가 출동하여 흥겨운 놀이판을 벌여주었다.

이 기적 같은 일을 축하하기 위해 서 교수님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백색의 긴 끈을 단 상모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재주를 부리는 상모 잡이가 등장하자 흥을 주체하지 못한 동네 사람들이 일어나서 한바탕의 춤판이 벌어졌다.

마루에 앉아서 이 모습을 구경하고 계시던 어머니를 동네사람들이 마당으로 모시고 왔다.

어머니도 사양치 않으시고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셨다.

나는 지금껏 어머니가 이렇게까지 신명 나게 춤을 추시는 광경을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의 흥겨운 모습을 보자 어찌 된 일인지 나 역시도 사물놀이패의 장단에 맞춰서 어깨춤이 절로 나왔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민족의 신명이 우리 몸의 세포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가 보다.


어느새 서 교수님과 재단의 양 이사장님도 우리와 함께 어깨춤을 추고 계셨다.

새 생명을 얻게 된 나를 축하하는 자리에 어느 누구보다도 신명 나게 춤을 추시던 양 이사장님이 나를 힘차게 껴안으며 말씀하셨다.

“윤 팀장, 이제 다시 재단으로 복귀해야지?

자네가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자네 자리는 지난 5년 동안 공석인 상태로 비워두었다네.”

난 이사장님의 호의에 감사드린다고 말하며 잠시 다녀온 뒤 정식으로 복귀하겠다고 약속했다.

모두는 내 말의 뜻을 이해하겠다는 표정들이다.


그녀를 놀라게 해 줄 심산으로사전연락도 없이 북경공항에 내렸다.

서 교수님이 미리 창우에게 전화하여 행방을 알아둔 상태였으므로 은하를 찾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1월의 찬 공기가 매서운가운데 만리장성을 오르기 위하여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한국관광객들의 표정은 너나 할 것 없이 밝아보였다.

나는 마지막 순서로 케이블카에 올랐다.


단 두 명만 실은 케이블카가 고속으로 저 하늘 위 만리장성을 향해서 거침없이 내달렸다.

석양이 타오르면서 내가 쓰고 있던 짙은 선글라스 창으로 붉게 물든 석양이 빨려 들면서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만든다.

이때 옆에 앉은 여인을 다짜고짜도 없이 와락 끌어안았다.

여인은 내 품에서 빠져나가려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나의 완력을 당할 수는 없었다.


내 눈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적시자 비로소 나를 똑바로 바라보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손으로 내 선글라스를 벗기더니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격하게 어루만지며 큰소리로 울었다.

내가 다시 힘차게 껴안았을 때 그렇게 우리를 태운 케이블카는 저 멀리 석양 속으로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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