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117)

우뚝 선 백두산정계비 1

by 맥도강

새벽 다섯 시,

삼지연못가역을 출발한 남북대학생탐험대는 수십 개의 장대 깃발을 휘날리면서 갑무경비도로를 따라서 위풍도 당당하게 전진했다.

목적지는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

색색의 장대 깃발에 담긴 구호는 탐험대에 참여한 남북대학생들의 가슴을 용광로처럼 뜨겁게 달구었다.

‘백두산정계비가 증거다, 국경회담 다시 하자!’

‘제3차 감계회담 개최하라!’

‘동북공정 가소롭다, 대통합코리아연방 만세!’

‘동간도 회복하여 대통합코리아연방 수립하자!’


2030년 1월 중순경 동북아역사재단은 7월로 다가온 역사적인 코리아연방의 출범에 맞추어서 특별하고도 대담한 이벤트를 기획했다.

남북 각기 오십 명씩 일백 명의 남북대학생으로 탐험대를 조직하여 백두산정계비를 새롭게 단장하는 행사였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남북 전역에서 몰려든 대학생들로 초대형 행사가 되고 말았다.

자비를 들여서라도 꼭 참석하겠다는 남북의 대학생들이 무려 일만이 넘었다.


이렇게까지 일이 커진 데에는 북한주민들의 내부 정서가 크게 작용한 결과였다.

작년 말 교황의 평양방문 이후 미국에 의한 전쟁의 가능성은 사라졌지만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 하나가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생채기로 남았다.

미 공군과의 합동작전을 위해 무려 삼십만의 인민해방군이 압록강 변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북한주민들이 받은 충격은 실로 엄청났다.

그동안 혈맹이라며 형제의 예로서 의지하던 그들로서는 중국으로부터 받은 배신감은 차마 말로써는 표현하기 힘든 것이었다.


사실 배신감이라는 감정이 농축되기 시작한 것은 삼십 년 전으로 거슬러가 중국이 본격적으로 동북공정을 언급하면서부터다.

고구려를 자신들의 변방민족으로 들먹거리기 시작했을 때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던 북한으로서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미국과 군사적으로 대치하는 안보상의 문제와 핵개발로 인한 대북경제의 봉쇄조치로 중국의 지원이 절실했던 상황에서는 단지 인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참았던 북한의 인내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때마침 한국대통령의 중국방문으로 연변 현지에서 대통합코리아연방의 함성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 중국의 배신행위를 되갚아줄 새로운 전략으로 인식했다.


하필 이런 시기에 동북아역사재단이 나서 세계의 관심을 끌만한 대형 이벤트를 기획했던 의도는 고도의 노림수가 있었다.

북한 또한 이 특별한 행사를 적극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그들의 감추어진 속내를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다.

남과 북의 대학생들이 도착하기 일주일 전부터 북한당국은 삼지연못가역 주변에 대형 천막촌을 건설해 놓고 충분한 정도의 임시 숙박시설을 준비했다.

뿐만 아니라 탐험대를 위한 도시락을 준비하는 등 남북대학생들의 백두산탐험행사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나섰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범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하면서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하고 사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등 실질적으로 동북공정을 관장했던 기구는 중국공산당 산하의 사회과학원이었다.

따라서 사회과학원의 허밍친 원장이 중국의 동북공정을 진두지휘하는 명실상부한 우두머리라 할 수 있었다.

중국의 사회과학원에 맞설 수 있는 기관으로는 현실적으로 남북을 통틀어서 동북아역사재단이 유일했다.

그래서 한반도의 통일이 진행되고 있던 이 중차대한 시기에 남북의 양 정부를 대신하여 동북아역사재단이 나서게 된 것이다.


1962년 조중변계조약으로 지금의 국경을 확정 지은 북한은 그동안 백두산정계비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을 정도로 대단히 신중한 행보를 보여왔다.

자칫 중국과의 국경문제를 새롭게 제기하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는 외교적으로도 대단히 민감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춧돌의 위치를 확인하는 작은 비석 하나만 남긴 채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런데 이제 그 작은 표식이나마 남겨두었던 이유를 알게 하는 대형 이벤트에 동참하려 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직전 일제에 의해서 훼손된 백두산정계비는 비석의 주춧돌만 남긴 채 ‘동위토문 서위압록’이 기록된 비석은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일제는 동간도 지역까지를 포함하는 거대한 한반도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 진실이 기록된 백두산정계비를 훼손하고 싶었다.

조선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괴롭힘을 받는 약소국이라는 낙인을 찍어서 정의의 사도인 일본이 중국을 물리치고 조선을 보호한다는 이야깃거리를 만들고 싶었을 것이다.


일제가 독립군의 공격을 방어할 목적으로 갑산과 무산 사이의 백리 길을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건설한 도로가 바로 갑무경비도로다.

이 도로는 지금 역설적이게도 일제가 훼손하여 숨겨버린 작고 초라한 백두산정계비가 아니라 2030년 현대판 버전의 백두산정계비를 실어가는 역사적인 도로가 되었다.

14톤 중량의 카고 크레인이 탑재된 대형화물차는 걸어서 이동하는 대규모의 백두산탐험대를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화물차의 짐칸에는 무명천으로 그 실체를 가린 화강암으로 만든 거대한 돌덩이 하나가 실려 있었고 그 분위기가 자못 심상치 않았다.

30㎞ 거리의 장군봉까지 도보로 이동하는데 걸리는 예상 시간은 열 시간가량이다.

일만의 남북 대학생들이 오열종대로 줄지어서 행진하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조선중앙 TV와 KBS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면서 이 모든 장면들을 빠짐없이 화면에 담았다.


출신대학을 알리는 작은 깃발들이 펄럭이고 있었지만 남과 북의 대학생들은 서로 자유롭게 이동하면서 왁자지껄하게 어울리는 교류의 장이 만들어졌다.

대열의 중간지점을 차지하고 있던 한 무리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유독 큰 목소리의 부산사투리가 주변을 압도했다.

큰 키에 얼굴이 동글동글하게 생긴 귀염상의 규태가 호기롭게도 김일성종합대 학생들의 무리에 파고들어 평소의 그답게 신나게 떠들어댔다.


북한 대학생들은 모두가 짙은 계열의 교복차림에 흰 와이셔츠와 두툼한 겨울외투를 입고 있어 간편한 등산복차림의 규태와는 겉모습에서부터 대비되었다.

“1712년 오라총관이 백두산에 올랐을 때 띨빵한 목극등이 실수를 했다고 치자는 겁니다!

목극등의 실수로 두만강이 아니라 토문강과 압록강의 최상류 물줄기가 만나는 분수령에다가 백두산정계비를 설치했다고 치자는 겁니다!

그래서요? 도대체 뭐가 잘못되었다는 겁니까!”


대단히 예민한 역사적인 문제를 규태 나름의 시원한 논리로 전개하기 시작하자 주변의 김일성대 학생들이 관심 어린 눈빛으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서 건국을 선포했던 유대인들의 논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 대목에서 규태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이 드러나면서 주변 학생들의 이목을 더욱 집중시켰다.

“이천 년 전, 로마에 의해서 쫓겨나기 전까지는 이 땅이 모두 자신들의 땅이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처음부터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규태를 눈여겨보고 있던 옆자리의 단발머리 북한여학생이 오른손을 높이 들면서 규태의 말을 가로챘다.

“문제는! 영토에 대한 주인의식!

누가 더 주인의식을 가지고 있었느냐 이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키 큰 남조선 동무!”


규태가 깜짝 놀라는척하는 표정으로 이 당찬 여대생을 응시했다.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어떤 특별한 사정이 있었던지 순간적으로 규태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그래요 바로 이겁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간도를 우리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어요,

고구려와 발해가 망한 뒤에도 우리 민족은 한시도 북방영토에 대한 주인의식을 잃지 않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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