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120)

우뚝 선 백두산정계비 4

by 맥도강

이 소리에 깜짝 놀란 일행들이 큰 바위 뒤로 신속하게 몸을 숨긴 채 인기척이 나던 곳을 주시했다.

북중국경을 지키던 몇몇의 중국 국경수비대 군인들이 카메라 플래시에 반응하면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들에게 발각이라도 되는 날엔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들이 생기는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상윤의 지시로 모두는 낮은 자세를 유지하며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 갓 네 시를 넘긴 시각인데도 숲 속은 벌써부터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벌써 삼십 분 이상을 재촉하며 되돌아가고 있었지만 마음이 급했던 상윤이 허둥대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말았다.

맨 뒤에서부터 진숙과 경은을 챙기면서 뒤따르던 규태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한마디 툭 내뱉었다.

“어 아까 왔던 그 길이 아닌 것 같은데…”


규태의 이 말은 일행들의 머릿속에서 함께 맴돌던 걱정거리를 대변하는 말이 되고 말았다.

순식간에 일행들의 발걸음은 천금만금이 되었고 앞서가던 상윤이 발걸음을 멈추고 맥이 풀려버린 일행들을 뒤돌아봤다.

“길을 잃은 건 확실한 것 같은데 지금으로선 빨리 숲에서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 갔어!

안 그랬다간 진짜로 백두산 흑곰을 만날 수도 있갔는데…”

진짜로 곰을 만날 수도 있다는 말에 경은과 진숙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려버렸지만 이 위기의 순간에 잠자코 가만히 있을 규태가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상윤 대장만 믿고 따를 테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를 인도하기오!

상윤 대장만 있으면 우리는 일없수다!”


그제야 평상심을 회복한 상윤이 다시 뒤를 돌아봤다.

“이런 때일수록 단일대오를 유지하면서 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최상의 방책 아니갔소!

다른 생각들은 하지 말고 동무들은 무조건 나만 따라 오기오!”

이번에도 규태가 다른 일행들을 대표하여 큰 소리로 대답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우린 동무만 믿고 따를 테니까 계속 앞장서서 가기나 하시오!”


모두는 짐짓 여유를 회복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길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 때문에 실상은 다리까지 후들거렸다.

그러나 상윤은 믿는 구석이 있었고 그것은 의외로 단순했지만 확실한 근거가 있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좁은 길은 분명 좀 전에 일행들이 내려왔던 그 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사람의 자취가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가다 보면 큰길과 만날 수 있다는 상윤의 믿음은 적잖은 산행경험으로 다져진 진실 같은 것이었다.


오직 뚝심하나로 걷고 또 걸었을 때 드디어 저 멀리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조금 더 다가갔을 때 계단을 내려오는 몇몇 중국 등산객들이 보이기 시작하자 순간 경은은 눈물보가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실제로 말은 안 하고 있었지만 숲 속에서 그녀가 겪었던 마음고생이 꽤나 컸던 모양이다.

그런데 내심 상윤에 대한 믿음이 남달랐던 진숙은 의외의 담담한 표정으로 경은을 위로했다.


일행들이 숲 밖으로 빠져나왔을 때 중국 쪽 서파 등산로의 1442 계단 최하단부로 빠져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시각은 여섯 시를 넘겨 스마트폰의 손전등을 켜지 않고서는 바로 앞조차 볼 수가 없었다.

이 시각에 다시 백두산을 올라서 대학생탐험대와 합류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무엇보다도 너무 지치고 허기져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급기야 가벼운 탈진증세까지 보이던 경은이 나무계단 아래에 덥석 주저앉아버렸다.


두 여학생이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을 때 규태가 또다시 특유의 너스레를 떨면서 가방에서 육포덩이를 꺼냈다.

“두 동무래 사이들 좋구먼!

이래서 우리가 같은 민족, 같은 동포라고들 하지 않네?

동무들 추우면 더욱 바짝 껴안어라우!

동무들이 껴안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맘껏 껴안아서 몸속의 열기들을 끌어 올리라우!”


규태의 구수한 입담에 긴장이 풀어진 일행들이 규태가 나눠주는 육포 한 토막 씩을 입에 물었다.

이 와중에 진숙이 규태의 장난기에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

“와 안 그렇던 교!

우리는 대통합코리아연방의 형제자매들이 아이던교”

소고기 육포 한 토막을 씹은 효과는 금방 나타났다.


고갈되었던 체력이 다소간 회복되면서 수줍음 많은 경은도 밝은 표정으로 규태를 바라봤다.

“규태 선배님! 이제는 소원성취 하셨겠어요?”

뜬금없는 경은의 이 말에 모두는 영문을 몰라하며 귀를 쫑긋거렸고 경은의 간드러진 평양사투리 흉내는 일행들의 애간장을 녹이고 말았다.

“규태 선배님 평생의 소원이 김일성종합대 여학생과 사귀어 보는 거라 하지 않았습니까?

몇 년을 쫓아다닌 내게는 눈길 한 번도 안 주더니 이제는 소원성취 하셨겠습니다!”


이 소리에 진숙이 규태를 바라보며 매몰차게 몰아붙였다.

“맞는 교! 우짤락꼬 경은동무를 몇 년간이나 소박을 맞혔던 교!

내를 만날락꼬 그랬다면 꿈 깨이소! 난 동무에겐 일도 관심 없심더!”

진숙의 농담반 진담반 이야기에 일행들은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헷갈려하던 사이 머쓱해진 규태가 배낭을 정리하며 일어섰다.

“세상일 너무 그렇게 딱 잘라서 단정 짓지 마소!

남녀 간의 일이란 게 어디 마음 묵은 대로 된답디까?”


일행들이 다시 출발 준비를 하면서 각자의 배낭을 챙겨 메고 있었을 때 규태가 이제부터는 자신의 영역이라는 듯 자신 있게 말했다.

“여기가 서파 등산로 같은데 버스를 타고 내려가면 서문이 나올 거요,

일단 서문 근방의 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 내일아침에 다시 백두산을 오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행히 내가 비씨카드를 가지고 왔으니까 비용문제는 걱정들 하지 말고!

사실은 몇 년 전에 북파 방면으로 천지를 오른 적이 있었는데 그 뒤로 서파 코스에도 관심이 생겨서 검색을 좀 해봤었거든!”


딱히 다른 대안이 있을 리 없었던 일행들로선 규태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서문방향의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서 정류소로 이동하던 중 미니탐험대의 상윤 대장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조직장한테서 문자가 왔는데 우릴 찾는다고 난리가 났다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문자라도 보내 놓는 건데 우리의 불찰이었어!

이럴게 아니라 다들 자신들 조직장한테 연락부터 취하고 이동하는 게 좋갔어!”


일행들이 모두 자신들의 휴대폰으로 연락을 취하고 있었지만 통화는 쉽게 터지지 않았다.

그러자 규태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명색이 여기가 중국 땅인데 쉽게 통화가 터진다는 게 이상하지!

상윤 대장한테 문자가 온 것을 보면 어찌어찌하다 보면 문자는 날아가는 모양이니까,

그냥 문자라도 보내는 게 좋겠어”


자연스럽게 상윤에게 이목이 집중되었다.

“고것이 좋갔어!

현재 처해있는 우리들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하고 내일 해단식까지는 합류하겠다고 각자 알아서 문자들을 보내자고!

오늘밤은 그래도 못가역 천막촌에서 총평대회를 한다니까 그나마 넘어갈 수 있겠지만 어째 슬슬 걱정이 되는구먼!

어떻게 해서라도 내일 점심까지는 천막촌에 도착해 주어야 해단식에 참여할 수 있을 텐데 진숙동무는 걱정도 안 되네?

어쩜 그렇게 아무 걱정도 없는 사람처럼 태평스러울 수가 있네?”


뜬금없는 상윤의 질책이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매사에 똑 부러진 진숙의 성격이 여실히 드러났다.

“걱정타령을 한다고 해서 현재의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은데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걱정타령은 감정낭비라는 생각이 안 드네?

넌 매사에 너무 철저한 것이 문제야!

과하지 않는 적당한 정도의 무대책이 때론 얼마나 정신건강에 좋은지를 모른단 말이야!”

“옳소! 옳소! 진숙동무 말이 무조건 옳소!”

규태가 박수를 치면서 진숙의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매사에 똑 부러진 진숙의 합리적이고 진취적인 태도에서 규태는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어떤 감정 하나가 심중 깊숙이 비집고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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