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121)

우뚝 선 백두산정계비 5

by 맥도강

다행히 서문으로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올라탄 일행은 깜깜한 백두산의 무심한 야경을 감상하면서 삼십 여분을 달려서 서문입구에 당도했다.

따지고 보면 아무런 절차도 거치지 않고 무단으로 국경을 넘어버린 불법체류자의 신분이었다.

여기저기를 배회하다가 공안에라도 적발되면 자칫 심각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어 우선 하룻밤을 묵을 호텔부터 찾아야 했다.


길가에 들어선 여러 호텔들 가운데 가능하면 무작정 위쪽으로 올라갔다.

적당히 올라왔을 때 우거진 숲 속에 자리한 제법 큰 호텔이 일행들의 눈앞에 다가왔다.

장백호텔! 화려한 청나라풍의 건축양식이 예사롭지 않은 호텔이었다.

일행들 모두가 동의하는 표정이라 규태가 앞장서 먼저 로비에 들어섰다.

하지만 이내 자신의 치명적인 문제점을 파악한 규태는 발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볼 수밖에 없었다.

이곳 서문일대의 호텔들은 대부분 중국인들이 운영하는 호텔이라 간단한 중국어 대화조차 불가능한 규태로서는 호기롭게 앞장설 입장이 아니었다.


이때 진숙이 뚜벅뚜벅 앞으로 나서며 세련된 중국어로 방 두 개를 예약한 후 저녁과 아침 식사에 대한 프런트의 안내까지 상세히 들었다.

규태가 건네준 비씨 카드로 깔끔하게 선 결재까지 마친 진숙이 돌아서며 말했다.

“우리는 카드가 준비되지 않았던 관계로 오늘은 규태 동무의 도움을 받겠지만 돌아가서 계산은 분명히 처리하겠습니다,

경은 동무와 난 한 방을 사용할 테니 두 분이 같은 방을 사용하시라요,

그럼 올라갑시다! 저녁은 아래 식당에 준비돼 있다고 하니까 먼저 여장들을 풀고 천천히 내려오는 걸로 합시다!”


나란히 붙은 5층 객실에서 각자의 여장을 풀었다.

한 명씩 욕실의 따듯한 물에 들어가 무거운 몸을 녹이며 고단했던 오늘 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던 사이 나머지 두 사람은 마당으로 내려왔다.

산을 향해서 운치 있게 켜진 가로등 불빛을 따라서 쭉 뻗은 가로수 길을 마음 편히 걸어보고 싶었다.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두 손을 뒷짐진채 깡충깡충 뛰듯이 진숙이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백두산이 내뿜는 짙은 향기를 맘껏 받아들이자 온몸의 기운들이 흘러넘치면서 저절로 춤추는 듯했다.

머릿속이 비워지면서 어느덧 자연과 하나 되어가고 있었을 때 익숙한 또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혼자서 걸어가는 기분이 어떻습니까? 뒤에서 보니까 하늘을 나는 선녀 같습디다!”


깜짝 놀란 진숙이 뒤를 돌아보며 안도의 한숨을 몰아쉬었다.

“깜짝 놀랐습니다!

규태동무는 매사에 그렇게 사람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으십니까?”

규태가 허공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웃으며 말한다.

“진숙동무도 만만치가 않더만요,

다 타고난 성격 나름이죠!”


농담은 여기까지만 하고 규태는 이제 진숙과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백두산이 만들어준 이 절호의 분위기를 허투루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난 어쨌든 현대과학을 신뢰하는 실용주의자로서 매사에 합리성을 추구하는 편이죠,

진숙 씨는 어떻습니까? 나와 생각이 비슷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몇 학년입니까? 아 우선 나부터 소개하죠,

난 부산에 있는 한 사립 대학교에서 사학을 전공하는 4학년이고 나이는 스물여섯입니다, 진숙 씨는요?”


진숙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다는 표정이다.

“난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졸업반이고, 나이는 규태동무하고 별반 차이도 나지 않으니까 우리 그냥 친구 먹읍시다!

그런데 동무는 아는 것도 많고 생김새도 똑똑하게 생겼는데 왜 서울대학교를 안 가고 지방에서 대학을 다니는 거네?”


진숙의 황당한 질문에 규태의 표정이 머쓱하게 변하더니 특유의 구수한 입담을 자랑했다.

“아 이 동무래 남조선 실정이라고는 도통 모르는 동무구만!

남조선에서는 등록금이 제일로 센 대학이 최고로 치는 대학인데 전국에서 우리 대학 등록금이 최고로 세니까 최고의 명문대학이라고 봐야 돼 갔지!”


“아하! 미안, 우리는 학비가 무료라서 몰랐어, 용서하시라요 규태동무!”

그러면서 진숙이 오른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해맑게 웃는 진숙의 얼굴을 바라보며 규태는 그의 심장에서부터 힘차게 널뛰고 있던 어떤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진숙동무래 남자친구 있어?”


규태의 돌발 질문에 진숙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앞으로 걸어가면서 전혀 엉뚱한 말을 했다.

“현대 과학을 신뢰하는 실용주의자? 합리주의자라고?

고거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지?”

진숙과 나란히 걷기 위해서 빠른 걸음으로 치고 나온 규태가 이목구비가 뚜렷한 진숙의 얼굴 중에서도 볼 사이의 깊은 보조개를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숨이 막힐 것 같았지만 진숙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뭐 특별할 것도 없는 일반적인 이야기지만 진숙동무는 얼굴의 미소를 어떻게 정의하지?”

뜬금없다는 듯 진숙이 규태를 바라보며 자신의 볼에다가 양 손가락을 귀엽게 갖다 대며 말했다.

“미소를 정의해 보라고?

작게 웃는 얼굴의 모습인가?

갑자기 정의하려고 하니 쉽지가 않네? 그러고 보니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네,”

“과학적으로 설명하면 얼굴이라는 육체가 보여주는 작용현상의 하나가 되겠지,

그럼 마음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뇌라는 육체의 작용현상이 될 테니까 뇌가 죽으면 당연히 마음이란 것도 사라지게 되겠지,

우리 인류는 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운명이라던가 하는 비과학적인 것들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


규태가 말하고 싶은 핵심을 이해하겠다는 표정으로 진숙이 웃으면서 말했다.

“한마디로 난 유물론자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인데 당연한 말을 뭘 그렇게 돌려서 이야기하네?”

“그렇지 유물론자!

맞아 내가 바로 그 물리주의자야,

그래서 난 운명이니 어쩌니 하는 그런 말 따위는 믿지를 않거든,

앞으로 진숙동무와 나 또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거 아니겠어?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말이 꼬여버렸네”

그냥 웃고 넘길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기서도 진숙의 당찬 성격이 나타났다.


더 이상 앞으로 걷기를 멈춘 진숙이 뒤를 돌아서더니 냉정한 눈빛으로 규태를 쏘아봤다.

“규태동무! 허접한 이성타령은 나에겐 통하지 않으니까,

쓸데없는 감정낭비 따위는 집어치우고 경은동무의 마음이나 받아주지?

규태동무 때문에 몇 년간이나 해바라기를 자처하고 있다지 않네?

여자 맘을 그렇게도 몰라주면 벌 받는 것 정도는 알지?

동무! 그리고 난 동무 같은 스타일의 남자들은 별로 안 좋아하니까,

두 번 다시는 이따위의 허접한 말 장난질은 말아줬으면 좋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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