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뚝 선 백두산정계비 6
한마디로 단칼의 거절이었다.
자신 같은 남자를 싫어한다는 진숙의 매몰찬 말은 마음의 상처로 다가왔지만 그렇다고 따질 수도, 다시 한번 더 생각해 달라며 애원할 수도 없었다.
그저 특유의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이 어색한 상황을 반전시킬 뿐이다.
“나도 동무 같은 도도한 여학생은 별로 안 좋아하니까 헛된 꿈에서나 깨어나시오! 공주마마!”
이렇게 한바탕 웃는 것으로 잠시 잠깐의 어색함도 이내 사라졌고 어느새 호텔 마당 안으로 들어섰다.
인기척도 없는 깜깜한 밤중이라 작은 새소리마저 크게 들리는 고요함 속에서 진숙이 무슨 소리를 들었던지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다.
저만치 걸어가던 규태가 되돌아와서 궁금한 표정으로 말했다.
“왜? 무슨 일인데?”
진숙이 규태를 바라보며 조용히 하라고 다그쳤다.
“쉿! 분명히 무슨 소리가 들렸는데…”
주의를 집중하면서 한두 발작을 더 다가가 보았지만 더 이상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잘못 들었다고 판단한 진숙이 상윤과 경은이 먼저 와서 자리를 잡고 있던 식당 안으로 규태와 함께 들어갔다.
식당에서 밥을 먹던 도중에도 진숙은 내내 귓전에서 좀 전에 들었던 그 소리가 떠나질 않았다.
‘분명히 조선여자의 살려달라는 소리 같았는데 내가 잘못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혼잣말처럼 읊조리는 진숙의 모습에 신경이 쓰였던지 규태가 다시 물었다.
“진숙동무! 대체 뭘 들었다는 검매?
난 아무 소리도 못 들었는데”
이 소리에 경은과 상윤도 궁금한 표정으로 진숙의 얼굴을 또렷이 쳐다봤다.
진숙이 그제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내가 똑똑히 들었거든! 분명히 조선여자의 비명소리 같았어,
이 호텔 지하 어딘가에서 살려달라고 했었단 말이야, 조선말로!”
식당 안은 저녁 여덟 시가 가까워지는 늦은 시각이라 몇몇 테이블의 중국손님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혹여라도 다른 사람들이 들을까 봐 모두는 긴장된 표정으로 조용히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테이블을 차지한 손님들의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하나같이 검정색 정장차림에 짧게 깎은 스포츠형 머리를 한 삼합회 패거리 같은 불량기가 전해져서 영 기분이 좋지 않았다.
경은이 모두에게 좀 더 다가오라고 말한 후 떨리는 음성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우리 동포가 살려달라고 했다면 모른 채 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
경은마저 이렇게 나오자 두 남자는 더 이상 머뭇거릴 수가 없었다.
경은과 진숙이 지하실 근방의 나무벤치에 앉아서 상황을 좀 더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두 남자는 마당 현관 앞에서 최대한 자연스럽게 이들을 지켜보며 대기했다.
“언니! 난 언니를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모르게 맘에 들었어요!”
“내가 마음에 들었다고! 왜?”
경은이 더욱 진숙에게 기대며 살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냥요! 느낌이 그래요”
그러면서 경은이 진숙과 다정한 모습으로 팔짱을 끼려고 했을 때였다.
아래 지하층에서 실제로 여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밖에 누구계세요?
살려주세요! 저는 한국 사람입니다!
지하실에 갇혀있어요, 제 이름은 배은하라고 합니다,
저는 서울에서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지하실 위쪽의 작은 창문 사이로 머리를 구십 도로 뒤로 젖힌 채 절규하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진숙이 창가 쪽으로 머리를 향한 채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서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우리도 조선 사람입니다,
우리가 어떻게든 도울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시라요!”
뜻밖의 구세주라도 만나듯 지하실에서는 또다시 절규하는 여인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들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진숙이 땅바닥에서 일어나자마자 긴장된 표정으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두 남자에게 손짓하고 있을 때였다.
좀 전까지 식당에서 같이 식사하던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지하실의 철문 쪽으로 떼로 몰려왔다.
뒤이어서 흰색양복을 입은 거구의 중년 사내가 입에 시거를 물고 나타나자 사내들이 허리를 구십 도로 숙이며 깍듯이 인사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하자 오히려 진숙과 경은이 두 남자가 앉아있던 나무벤치로 다가와 자연스럽게 둘러앉았다.
험상궂은 이들이 모두 지하실 계단으로 내려간 뒤에야 진숙이 두 남자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분명히 서울에서 온 배은하라고 했고 지하실에 갇혀있다고 했거든!
저 자식들 폼새를 보니까 삼합회들 같은데 어떡하지!”
상윤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규태를 바라봤다.
이런 위험한 일에 개입하는 것이 옳은지를 규태에게 묻고 있었지만 규태는 이미 두 여전사들의 결기에 주눅이 들어버린 처지라 고개만 끄덕일 뿐이다.
이렇게 된 이상 미니탐험대의 상윤 대장으로서도 대원들과 함께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기로 한번 결정이 내려지자 머리회전이 빠른 상윤은 대원들의 역할을 효과적으로 분담 배정했다.
“규태동무는 지금 즉시 호텔방으로 올라가서 선양에 있는 남조선영사관에 이 사실부터 알리기요!
여긴 우리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규태가 호텔방으로 올라간 사이 나머지 일행은 지하실 쪽을 바라보며 태연하게 대화하는 척 연기를 했다.
경은은 진숙의 왼팔을 꼭 껴안은 채 긴장감을 달래려고 했고 신기하게도 진숙의 당찬 기운이 교류되면서 두려운 마음들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