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대고려연방 (123)

목련꽃 구출작전 1

by 맥도강

삼십 여 평 창고의 정 중앙,

호텔지하실의 흐릿한 조명과 퀴퀴한 곰팡이 냄새 때문에 음침하면서도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다.

학생용 나무의자에 묶여있던 은하는 검정색 수면안대로 눈을 가린 상태다.

체력은 거의 탈진 상태로 줄에 묶여있지 않았다면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할 지경이다.

장백산천지회는 단지 저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하여 은하에게 끊임없이 절망을 가르치고 있었다.

식사를 하기 위해서 감시하는 이들이 잠시 자리를 비우는 삼십여 분의 짧은 시간을 제외하면 매시간 매분을 이렇게 저들이 원하는 자백을 강요받고 있었다.

지만 은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저들의 혹독한 눈초리 속에서도 단지 친정을 다니러 왔을 뿐 윤 비서관으로부터는 그 어떤 이야기도 전해 들은 바 없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잡혀온지도 벌써 일주일째,

그동안 끼니마다 주어지는 빵 하나와 생수 한 병으로 겨우 목숨만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좁은 공간에서 안대까지 채워진 채 계속 묶여있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차라리 혀를 깨물고 남은 생을 마감하고 싶었지만 그때마다 아버지 배 교수의 환영이 나타나서 꺼져가는 희망의 불씨를 되살려주곤 했다.


오늘은 왠지 좀 더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처음으로 지하실로 내려온 왕 회장이 고급스러운 일인용 소파에 그 큰 엉덩이를 깔고 앉아서 은하를 노려봤다.

“이십 년 전 바로 그 자리에서 니 아비 배 교수! 그 고매한 양반이 바지에 오줌을 싸고 말았어!

그렇게 흥건하게 바지를 적시고는 생쥐처럼 파르르 떠는 꼴은 참말로 볼만한 광경이었지!”

차마 딸 앞에서 할 수 없는 험한 말을 지껄이고 있었지만 장백산천지회의 보스답게 왕 회장의 목소리는 낮게 깔린 중저음을 유지했다.

여전히 그의 오른손에는 쿠바산 최고급 시거가 들려 있었고 천장 가까이에 뚫려있는 작은 창을 향해서 길게 연기를 내어 뿜었다.


“동북 3성지역이 몽땅 거리 고구려족의 후예인 자기네들 땅이라고 선동하고 다니길래 만주족의 후예인 우리가 지켜만 볼 수가 없었지!

여기 장백산을 중심으로 일어난 우리 말갈여진족이야말로 동북 3성 전역에 걸친 만주 땅의 진짜 주인이었거든!

너희 조선족들은 이제껏 반도족으로 살아온 족속들이었어!

그런 주제에 감히 만주대륙을 넘보는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기에 내가 엄중한 경고를 했었지,

그런데도 너희 아비는 기어이 내 말을 듣지 않더라고,

그래서 네 오라비 창우의 반역질까지 엎어서 내가 직접 이 자리에서 당신 아버지를 응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야!”


잠깐의 침묵이 이어지는 동안 왕 회장은 안주머니에서 소음기가 장착된 권총을 빼어 들고 은하를 향하여 정조준하기 시작했다.

은하는 지금 왕 회장이 자신을 향해서 총을 겨누고 있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안대에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 형성된 이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직작 할 수 있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왔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살려달라고 애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런 어려운 일들에 대해서는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아버지의 죽음은 오래전의 일이라 제 기억 속에 남아 있지도 않습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선생님의 부하들에게서 매일매일 강요받고 있습니다만 나 살자고 없던 사실을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대통령님 환송 행사 때의 일은 순전히 자발적으로 된 것인데 자꾸 한국정부가 개입된 것처럼 말하라고 하시니 제가 알지 못하는 것들을 어떻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전 그저 친정을 다니러 온 연약한 아녀자일 뿐입니다,

절 죽이게 되시더라도 내게서 들을 대답이 달라지지는”

목소리는 떨렸지만 은하의 말에는 흔들릴 것 같지 않은 굳은 신념이 묻어 있었다.


더 이상 말할 필요 없어!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그만하면 됐어!

네년의 그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한테서 신물이 나도록 들었으니까,

내가 봐도 네년에게서 우리가 원하는 대답을 듣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일주일이면 생각할 시간도 충분히 준 것 같고 니 아비가 이 자리에서 죽었으니 내가 허튼소리 할 사람이 아니란 것도 잘 알 테지,

그래서 오늘 내가 이렇게 친히 내려온 것이야!”


오른손에 찬 두툼한 크기의 고급 손목시계를 살펴보던 왕 회장이 자리를 일어서며 말했다.

“지금 시각이 여덟 시를 넘겼으니 정각 아홉 시까지로 하지!

딱 오십 분이 남았으니 그동안 생각을 정리할 마지막 시간은 될 거야,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도 생각이 바뀌지 않는다면 니 아비 배 교수의 최후를 그대로 답습하게 될 것이야!”

훠치산과 함께 자리를 떠나려던 왕 회장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다시 은하 쪽을 돌아보더니 훠치산에게 명령했다.

“그래도 이승에서의 마지막 시간이 될지도 모르는데 커피 한잔 정도의 아량은 베풀어야겠지!

혹시 아는가? 인생의 마지막 커피를 마시다 보면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될지도?”


왕 회장의 지시로 호텔식당에서 아메리카노 한잔을 들고 온 감시자들이 은하의 눈을 가리고 있던 검정색 안대를 풀어주며 잔뜩 연민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회장님은 생각을 바꾸실 분이 아니라서 해두는 말인데 이것 들면서 제발 생각을 좀 바꾸슈!

앞으로 살아갈 날이 창창한데 그깟 말 한마디가 뭐라고 사람목숨을 버린단 말이요?”

지하창고의 철문이 ‘쾅’하고 다시 닫혔다.

일주일 만에 맛보는 커피 향은 코끝을 강렬하게 자극했지만 이 한잔의 커피가 인생의 마지막 커피라는 생각에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드디어 지하창고에 있던 모든 감시자들이 밖으로 나왔다.

멀찍이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규태가 모두의 얼굴을 모으게 한 뒤 초긴장된 목소리로 나지막하게 말한다.

“정 과장이란 사람하고 통화했는데 배은하 씨는 장백산천지회라는 삼합회에 납치된 한국 사람이 맞다는 거야,

우리한테 신신부탁하기를 배은하 씨를 구출해서 최대한 빨리 여기를 벗어나 달라고 하네,

자기들도 이쪽으로 출발할 테니까…”


미니탐험대장의 머릿속은 말끔하게 정리가 끝난 상태였고 이번에도 상윤은 군더더기 없는 작전지시를 내렸다.

“지하실엔 배은하 씨 혼자 있는 것이 분명해!

지금이 밖으로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같은데 진숙이하고 경은동무는 방으로 올라가서 배낭을 챙겨서 내려오도록 하지,

두 동무가 잘하갔지만 최대한 자연스럽게 우리가 내렸던 그 버스 정류장으로 먼저 가 있도록 해!”


진숙과 경은이 일어나 호텔 현관 안으로 들어가자 상윤이 경비실 쪽을 응시하면서 규태에게 말했다.

“문제는 저기 십여 미터 떨어진 정문 옆에 있는 작은 경비실인데 경비 한 명이 머리를 내어 밀고 지하 창고 쪽을 계속 감시하고 있거든!

저 경비의 눈을 피해서 지하실로 내려가려면 동무가 경비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려줬으면 좋갔는데,

그 왜 동무는 농아리를 잘 까니까 동무 특기를 한번 살려보라우?

그 사이에 내가 지하실로 내려갈 테니까”


상윤 대장의 방금 이 말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규태는 잠시의 머뭇거림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변을 이리저리 살피면서 정문의 경비실로 태연하게 걸어갔을 때 앳된 얼굴의 젊은 경비가 작은 창으로 머리를 쑥 내어 밀었다.

이때 규태가 경비의 머리를 그의 큰 덩치로 가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경비가 지하창고의 철문을 바라볼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다.

“경비아저씨! 말씀 좀 물어봅시다!

이 근방에 좋은 구경거리가 뭐가 있습니까?”


최대한 험상궂게 보이고 싶은 이십 대 초반의 철없는 사내가 깍두기머리와 잘 어울리는 험상궂은 인상으로 규태를 노려봤다.

한국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규태의 시건방진 말투는 젊은 경비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시건방진 말투로는 자기도 지지 않겠다는 표정으로 잔뜩 인상을 찌푸리더니 중국말로 뮈라 뭐라 쏘아붙였다.

중국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하는 규태입장에서는 꼭 ‘너 뭐 하는 놈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규태도 오만가지의 인상을 찌푸려가면서 낮게 깔린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내가 누구냐고? 내가 바로 삼일특공대다”

규태의 익살스러운 코믹연기에 이 철없는 삼합패 녀석이 무료하던 차에 잘되었다는 표정으로 곧바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이 모습을 초조하게 지켜보던 상윤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지하창고의 철문으로 향했다.

다행히 철문에 열쇠까지는 채우지 않았지만 잔뜩 녹이 슨 묵직한 쇠막대기 고리를 옆으로 여는 것이 만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위아래로 움직여가면서 조심스럽게 열지 않으면 자칫 삐익하는 쇳소리가 날 수 있어 극도의 긴장감이 몰려왔다.


한편 아무 내용도 없이 마구 떠들어대는 규태의 너스레에 젊은 경비는 뭐가 그리도 재밌는지 연신 배꼽을 잡고 정신 줄을 놓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몰라도 거저 규태의 코믹스러운 표정연기가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됐다 됐어!’

마치 주문을 외듯 작은 소리로 읊조리던 상윤이 드디어 녹슨 막대 고리를 오른쪽으로 밀어젖히는 데 성공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아래로 난 지하계단을 따라서 숨소리마저 죽인 채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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