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꽃 구출작전 4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이 찾아간 호텔이 바로 천지호텔이었다.
규태가 주변의 호텔들을 지나다가 정 과장의 말이 떠올랐던지 빙그레 미소 지으며 선택한 호텔이었다.
중국인 기사도 손님들을 천지까지 데려다주고 세배의 요금을 받기로 했으니 별말 없이 호텔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진숙과 경은의 부축을 받으며 호텔방으로 들어선 은하는 창가의 작은 응접세트 의자에 앉아 모처럼 만의 평화에 감격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경은이 물티슈를 건네며 은하를 위로하려 했지만 자신 때문에 공안에 잡혀간 일행들의 안위가 걱정된 은하의 눈물 보자기는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이때 진숙이 자신의 배낭에서 녹차가루가 담긴 작은 유리병을 꺼내 룸에 비치된 전기주전자로 물을 데우기 시작했다.
진숙이 가져온 따듯한 녹차잔을 음미하던 은하가 그제야 마음이 진정되었던지 옅은 미소를 띠면서 경은과 은하를 바라봤다.
시야를 창밖으로 돌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백두산의 숲 속 풍경을 바라봤을 때 일주일사이에 겪었던 여러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서울을 떠나올 때 남편 윤 비서관이 했던 당부의 말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혹여라도 대통령님께서 연길을 방문하게 된다면 동포들의 큰 환영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그렇게 된다면 임박한 선제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큰 힘이 될 것 같아요,
이렇게 위험한 일에 당신을 개입시켜서 미안하지만 우리나라의 처지가 위급하여 당신한테까지 부탁하게 됐어요”
물론 윤 비서관이 은하에게 했던 말은 둘만의 내밀한 대화로써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이제 은하는 동정 어린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경은과 진숙에게 구룡촌 마을을 빠져나오면서 겪었던 일련의 상황들을 차근히 설명해 주었다.
저간의 사정을 알게 된 경은과 진숙은 눈물까지 글썽이며 은하의 손을 어루만져 주었다.
사실 은하로서는 오늘 꼼짝없이 죽임을 당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꿈속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었던 생명의 은인들을 만나 이렇게 녹차 한잔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인생을 통틀어서 두 번째로 치열한 하루를 보냈던 규태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작년 삼일절 때 독도에서 겪었던 칼부림사건 이후 채 일 년도 지나지 않아 오늘 또다시 대단히 위험한 하루를 보냈다.
그때는 일본의 극우세력 다케시마 수복 결사대였고, 이번에는 중국의 극우세력 장백산천지회란 사실만 다를 뿐이다.
상윤은 혹시라도 중국인 기사가 딴생각을 품을까 봐 좀체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몰려오는 극한의 피곤을 물리치며 끝까지 잠들기를 거부했다.
의도적으로 중국인 기사에게 냉장고 안의 맥주를 세병이나 먹인 뒤 곯아떨어지게 만들었다.
그제야 마음을 놓을 수 있었던 상윤은 규태의 잠자리까지 보아준 후에야 입가에서 살포시 미소가 돋아났다.
오늘은 스스로 생각해 봐도 참으로 대견한 하루였다.
무엇보다도 우리 동포 배은하 씨를 구출한 사건은 암만 생각해도 벅찬 감동으로 다가왔다.
밤새 중국인 기사의 코 고는 소리도 대단했지만 엄청난 스윙의 발길질을 동반한 규태의 몸부림도 공포 그 자체였다.
이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기어이 짧게나마 숙면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누적된 피로가 컸던 탓이다.
딱히 알람소리를 맞추어 놓은 것도 아니지만 새벽 다섯 시가 되자 상윤이 먼저 잠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어릴 적부터 소조직을 통솔하는 지도자로서의 행동이 몸에 뵈어 있었기 때문이다.
어젯밤의 천막촌 총평대회에는 참석할 수 없었지만 오늘 폐막식 일정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참석해야 한다.
그러자면 점심 무렵까지는 삼지연못가역 천막촌에 도착해야 하는데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곧 호텔식당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을 수 있어 지금부터 서둘러야 했다.
상윤의 기상 소리에 규태와 중국인 기사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났다.
다행히 은하의 몸 상태도 한결 가뿐해졌다.
모처럼 만의 단잠 덕에 다리의 통증도 잦아들어 이제 다른 사람의 부축 없이도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다.
일행들이 호텔로비의 좌측에 위치한 식당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마당 한편에서는 낯선 SUV차량과 함께 짙은 선글라스를 쓴 중년남자가 건장한 두 청년을 대동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정 과장이 은하를 발견하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배은하 씨!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저는 선양총영사관에서 근무하는 정 과장이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걱정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저희들이 안전하게 모실 테니 함께 가시죠!”
다른 일행들은 식당 한 편의 식탁에 둘러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로 아침 요기를 대신하면서 이 모습을 유심히 관찰했다.
선글라스를 쓴 남자와 그 옆의 청년들이 누구인지는 어림짐작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은하가 정 과장에게 말했다.
“기수와 경태 경선엄마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 때문에 공안에 잡혀갔는데…”
정 과장이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잠시 뜸을 들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행히 경선 씨의 모친은 간단한 조사만 받고 풀려났습니다만 기수 씨와 경태 씨가 좀 난감하게 됐습니다,
앞으로도 한동안 고생을 좀 더 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보다도 은하 씨의 신변 보호가 먼저입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정 과장은 함께 갈 것을 재촉했지만 은하가 대뜸 되묻고 있었다.
“그런데 대체 어디로 간다는 겁니까?
지금 생각해 보니 공항이던 어디로던 빠져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기수와 경태가 구속되었다면 당연히 저도 수배자의 신분일 것 같은데 어떻게요?”
선글라스를 만지작거리던 정 과장이 답답해서 안 되겠던지 아예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러자 검은 선글라스 속에 감추어진 그의 강골 이미지가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렇습니다! 당장은 출국이 어렵습니다만 우선 저희 총영사관 내의 거처에 계시다가 이후의 상황을 봐가면서 차차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본국의 재촉이 빗발쳐서 저희로서도 보통 난감하지가 않습니다, 일단 저희들이 안전한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계속해서 함께 가기를 재촉하는 정 과장에게서 은하가 한두 발작 뒷걸음질을 치면서 말했다.
“잠깐만요 과장님! 잠깐만이라도 생각을 좀 더 해봐야겠네요,
죄송합니다만 잠시 다녀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리둥절해하는 정 과장 일행을 남겨두고 은하가 빠른 걸음으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