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틀대는 반통일 세력 1
시월중순 백두산에 첫눈이 내렸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기 시작하던 어느 날 저녁이었다.
삼지연관광특구의 울창한 숲 속에 위치한 고적한 배개봉 호텔을 향해서 백발이 성성한 노병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3년 전, 친 중국 군부쿠데타를 주도하다 정 위원장에 의해서 숙청되었던 전 보위부장 박철이 주선한 친목모임이다.
당시 박철은 가까스로 목숨만 유지한 채 죽기보다도 싫은 아오지탄광 무기교화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그런 그에게 일어났던 일을 두고서 가히 기적이라고 할만했다.
재작년 연방정부가 출범하면서 정치범들의 대사면 조치가 이루어졌고 그 틈에 끼여 그도 사면 조치된 상태였다.
이후 박철을 중심으로 결성된 이 친목모임은 처음엔 소백수 초대소에서 서너 명씩 모이기 시작하다가 이내 수십 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지금은 일백이 넘는 대규모의 세력으로 커짐에 따라서 장소를 이곳 배개봉 호텔로 옮겨 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박철은 영악하게도 백두혈통의 근거지인 이곳 백두산을 중심으로 인민군대의 재건과 정 위원장의 총사령관직 복위를 명분으로 북한군 퇴역장성들을 규합해 나갔다.
비록 자신들이 정 위원장의 결단으로 연방군 창설의 희생양이 되기는 했지만 3대에 걸친 우상화작업의 산물은 그렇게 간단치가 않았다.
여전히 정 위원장을 총사령관으로 부르면서 자신들의 구심점으로 떠받들던 퇴역장성들을 박철이 교묘하게 이용했다.
온갖 산해진미들로 뷔페음식이 차려졌다.
대형 연회장을 꽉 채운 노병들이 시끌벅적하게 떠들면서 음식과 술을 들고 있을 때 앞자리 단상으로 걸어 나온 박철이 마이크를 잡았다.
단상뒤 벽에는 인공기가 걸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붉은 글씨로 ‘북조선재건회의’라고 쓰인 현수막이 나붙어 있었다.
“우리 총사령관님 아직 오십 줄에도 이르지 못한 창창한 연세지만 요사이는 하시는 일도 없이 외로이 관사에만 계신다고 합니다!
이제는 인민군대마저 다 내어준 마당에 연방의 국정자문위원장이라는 직책도 사실은 허울 좋은 빈껍데기에 불과합니다,
경애하는 총사령관님도! 위대한 우리 인민군대도! 교활한 남조선당국에 의해서 철저하게 속았던 겁니다!
우리 모두가 배신을 당했다 이 말입니다!”
박철이 제법 손동작까지 구사하면서 선동의 톤을 높여 나가자 노회 한 퇴역장성들이 박수로 화답했다.
“옳소!”
“그래 맞는 말이야! 박철이 속 시원하게 말 한번 잘한다!”
여기저기서 자신의 주장에 동조하는 소리들이 터져 나오자 한껏 고무된 박철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총사령관님께서 남조선괴뢰도당에 이용당한 것이 맞다면 우리가 이대로 있을 수는 없지 안갔습니까!
경애하는 총사령관님을 모시고 와서 그 옛날 수령님께서 일제에 맞섰던 그 방식대로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가지고서리 인민의 철천지 원수 연방괴뢰도당에 빼앗긴 우리 공화국을 다시 되찾아 와야 하지 안갔습니까!”
이 대목에서는 모두가 벌떡 일어나 결의에 찬 표정으로 우렁찬 박수를 보냈다.
“맞소! 총사령관님을 중심으로 인민들이 떨쳐 일어나야 합니다!”
“수령님께서 세우신 우리 조선인민공화국을 되찾아 와야 합니다!”
이제 웬만큼 상황정리가 끝났다고 판단한 박철이 여유로운 미소까지 지으며 차분한 톤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아쉽게도 지금 우리에겐 군대도 없고 무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야요!
우리 뒤에는 팔십 년의 혈맹이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말입니다,
다들 아시갔지만 나는 중국에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이 아주 많은 사람입니다,
제대로 된 우리의 역량만 보여준다면 얼마든지 지원을 해주겠다는 것이 중국군부의 답변입니다,
최근에 내가 그 답변을 받아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는 우리도 한번 해볼 만하지 안갔습니까!”
그런데 잔뜩 달아올랐던 방금까지의 분위기와는 달리 갑자기 장내가 냉랭해졌다.
박철이 과거 중국을 등에 업고 정 위원장을 배신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악한 박철이 아무런 대비책도 없이 이런 논쟁적인 말을 무턱대고 꺼냈을 리 없다.
“당시 총사령관님께서 왜 나를 살려주신 줄 아십니까?
고것들을 모르시면 오해들을 할 수도 있갔지요! 암요 충분히 이해합니다,
지금부터 내가 차근히 설명해 줄 테니까 내 말을 잘 들어시라요!”
간교한 박철이 한 명 한 명을 찬찬히 훑어보면서 자신의 주장을 말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임박한 미제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선군 체재로 복원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가졌더랬습니다,
고것이 경애하는 우리 총사령관님을 잘 받들어 모실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지만 미제와의 한판 결전에 대비하려면 기렇게 하는 것이 옳다는 소신을 가졌더랬지요!
하지만 총사령관님께서는 당시의 정세 형편상 우선적으로 남조선과 협력하기로 하시고, 그 다음번의 대응 수단으로써 나를 잠시 은둔시켜 두었던 겁니다,
기렇치 않았다면 난 벌써 곡사포로 대갈통이 박살이 났갔지 날 살려 줬갔습니까!
바로 이것이 총사령관님과 나만이 알고 있는 알려지지 않은 진실이다 이 말입니다!
이제야 동무들의 오해가 좀 풀렸습니까!”
대부분의 퇴역장성들은 박철의 이 말에 반신반의하면서도 점차 박수소리가 늘어났다.
비록 이들은 노회 한 퇴역군인들이었지만 아직도 선군정치의 기억들이 살아있어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이들의 가슴속에는 과거의 영광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었고 박철로 인하여 점차 자신감을 회복해 나갔다.
그동안 울화통이 치밀어서 도무지 제정신으로는 살 수 없었던 퇴역 장성들의 표정에선 이판사판 한번 붙어보자는 결기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