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보고서 5
잠시 후 세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다과상이 들어왔다.
진숙의 부축을 받으며 의자에 앉은 부인이 병세가 완연한 위태로운 자세로 직접 녹차를 따랐다.
“제가 나설 자리는 아닙니다만 결례를 무릅쓰고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지금 우리 위원장님의 정신적인 고통이 너무도 크십니다,
어떻게 다른 곳도 아닌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안치되어 계신…”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부인이 눈물을 보였을 때 당황한 연방대통령이 어쩔 줄을 몰라하면서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렇잖아도 오늘 그 문제를 상의드리러 왔습니다,
여사님의 걱정을 방치하진 않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때 진숙의 부축을 받으며 겨우 중심을 잡고 있던 부인의 부럽튼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세 분이서 잘 결정하시겠습니다만 아무리 통일된 세상이라고 해도 오랜 세월 우리 사회를 지탱해 온 기본 정서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고것들을 하루아침에 깡그리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무례가 되었다면 용서하십시오!”
부인의 절규에 가까운 호소를 묵묵히 듣고 있던 정 위원장이 찻잔을 퉁명스럽게 내려놓았다.
정 위원장의 불편한 감정상태를 알아차린 부인이 진숙을 바라보며 무언의 표정으로 말했다.
진숙의 부축으로 자리에서 일어선 부인이 물러가자 연방대통령이 정 위원장을 응시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저들의 집회가 연방행정법원이 인용한 기준을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연방법에 따라서 엄중하게 조치할 생각입니다!
위원장님의 선대 어른들께서 모셔져 있는 주석궁이 모욕당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 이제 그만 노여움을 푸시고”
여전히 딱딱하게 굳은 표정의 정 위원장이 연방대통령의 말을 끊고 나섰다.
“나나 우리 인민들에게 있어 주석궁은 말입니다,
두 분 대통령님들께서 생각하시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감히 떼를 지어서 고래고래 고함이나 지르는 그런 경박스러운 장소가 아니란 말입니다!
나라의 통일조차 인정하지 않는 저런 허접한 자들에게 우리 연방은 합법적으로 집회 허가까지 내줬단 말입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난 이미 충분히 모욕당했습니다,
그 작자들이 누굽니까! 토착왜구와 토착 땟놈들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사주를 받고서 감히 우리 연방을 또다시 두 동강 내겠다고 설쳐대는 역도들이란 말입니다!
앞전 헌법재판소 사건 때도 그렀더니만 우리 연방은 어째서 매사에 끌려만 다니는지 답답해서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도 때를 봐가면서 찾아야지 역도들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뻔히 알면서도 법타령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해서, 아니 화가 치밀어 올라서…”
더 이상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정 위원장의 감정 상태는 격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두 대통령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정 위원장의 격한 감정이 누그러지기를 기다려줄 수밖에 없었다.
정 위원장이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입술 주변을 거칠게 닦은 후 하던 말을 계속했다.
“조국의 통일!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 내가 이룬 것들은 물론이고 선대 어른들께서 물려주신 것들까지 모두 다 내려놓았어요!
그런데 오늘날의 나의 처지는 삼천만 인민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내 안사람한테조차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 지경이 되었습니다!
내가 우리 인민들에게 나누어준 집단농장과 국유기업의 지분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살림집들까지 고것들을 빼앗지를 못해서 온 사방에서 흔들어대고 있어요,
그 난리 통에 모든 것이 난장판이 돼버렸단 말입니다!
들어오시면서 보셨겠습니다만, 지금도 내 집 앞에는 내게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는 인민들이 저렇게도 많습니다.
이런 한심한 상황에서 대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하다 하다 수령님과 장군님의 영전조차도 지키지 못하는 천하의 몹쓸 불효자가 되고 말았으니…”
정 위원장의 한마디 한마디는 두 대통령을 극도로 민망하게 만들었다.
민망한 그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지 각기 딴 곳을 멍하니 바라봤다.
“지금 돌아가는 나라꼴을 보자면 겉으로만 동등한 통일이네 하면서 우리 체면을 살려준 것 같지만 내용적으로는 경제력에서 월등한 남조선한테 흡수당했다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하긴 우리끼리니까 톡 까놓고 얘기해서 틀린 말도 아니지요,
다른 것은 몰라도 경제력에서는 흡수당한 것이 맞지요 우리가!”
그동안 잠자코 듣고만 있던 민 대통령이 이 대목에서 펄쩍 뛰듯이 이의를 제기했다.
“단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대고려연방이 핵무기보유국의 지위를 가지게 된 것부터 우수한 기술 인력과 천연자원까지 수없이 많은 부분에서 북쪽은 통일의 당당한 주역이었습니다,
어느 한쪽의 치우침도 없는 남과 북의 대등하면서도 공정한 균형 속에서 이루어진 통일이 분명합니다!”
이때 정 위원장이 손사래를 치면서 민 대통령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마치 문제의 본질을 흩트리지 말라는 표현 같았다.
“내가 원했던 통일조국은 이런 무례한 나라가 아니었어요,
한번 보세요? 나라의 기강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지 않습니까?
온갖 종류의 역도들이 난장판을 치고 있는데도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손발을 놓고 있는 연방의 현실을 똑똑히 직시해 보시란 말입니다!
이런 허약한 나라는 나나 나를 따르던 삼천만 우리 인민들이 원했던 통일조국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이제는 민 대통령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았다.
“위원장님께서 제기하신 작금의 문제들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조속히 시정되어야 할 문제들입니다,
부동산문제를 우리가 힘을 모아서 잘 해결해 내었듯이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유기업들의 회생문제도 우리가 중지를 모은다면 잘 해결할 수 있습니다,
아니 꼭 해결해야만 합니다!
헌법재판소 문제만 하더라도 우려곡절은 있었지만 위원장님의 지적대로 현재는 폐지절차를 밟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민주주의 국가에서 집회시위의 자유는 마땅히 보장되어야겠지만 통일연방의 분열을 획책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반사회적인 집회시위조차 허용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하다면 헌법을 개정해서라도 위원장님의 말씀대로 나라의 기강을 분명하게 세워 나가야 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연방대통령님께서 따로 생각하신 것도 계시고 하니까 이번에도 잘 정리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위원장님의 섭섭한 마음은 천 번이고 만 번이고 공감합니다만 우리가 인내심을 가지고 하나씩 풀어나갔으면 합니다,
우리 민족의 미래를 위해서 위원장님의 용단으로 일으켜 세우신 대고려연방입니다!
다소간 힘이 드시더라도 우리 연방의 미래를 위해서 위원장님께서 한 번만 더 용기를 내어주십시오!”
연방대통령과 민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간곡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정 위원장의 표정은 여전히 굳은 표정 그대로였다.
두 대통령과는 눈조차 마주치지 않은 채 창밖의 정원으로 얼굴을 돌리며 독백처럼 하는 말이다.
“요사이는 내가 참으로 생각이 많습니다만 통일된 우리 연방과 나와의 갈등구조는 앞으로도 멈출 것 같지가 않습니다!”
방금 이 말은 정 위원장이 통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말로 들렸다.
순간 두 대통령은 심장이 멎는 듯 흠칫했다.
“민주주의는 대고려연방의 대세가 분명한데도 통일이 된 지 5년의 시간이 지나도록 난 아직도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내가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통일조국을 위한 길인지 조만간 결단을 내려야겠습니다!”
이쯤 되자 연방대통령의 두 눈이 지그시 감기면서 얼굴색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민 대통령도 긴 한숨을 내어 쉬면서 우두커니 천장만 바라봤다.
이럴 때 정 위원장의 단호한 목소리가 서제에 울려 퍼졌다.
“더 이상은 역도들에 의해서 수령님과 장군님께서 수모를 당하시는 꼴을 두고만 볼 수는 없습니다!
곧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겠습니다!”
이 말을 끝으로 정 위원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2월의 차디찬 찬 공기에 잔뜩 위축된 창 너머의 정원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로한 연방대통령이 떠나기에 앞서 정 위원장을 한번 안아보려고 했지만 정 위원장은 굳이 사양한 채 악수로 대신했다.
민 대통령과도 표정 없는 간단한 악수로만 인사했을 뿐 잘 가라는 인사말조차 없었다.
두 대통령이 헬기에 오르고 있었을 때 이번에도 정 위원장은 보이지 않았고 정 위원장의 부인과 부인을 부축하던 진숙만이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