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설픈 물리주의자의 좌충우돌기
작년에 환갑의 터널을 지나온 이제는 삶의 잔여 배터리가 25%가량 남은 사람으로서 병오년 새해를 맞이하여 지나온 인생을 자평해 본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제아무리 후하게 점수를 준다고 하더라도 A학점은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C학점은 다소 야박한 것 같고, 그냥 B학점 정도가 무난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사실 개인적인 관점에서 B학점의 무개감을 생각해 보면 나름 꽤 선방한 점수로 기억된다.
사십 년 전의 꿈 많던 학창 시절, B학점의 성적표를 받아 들고 무난한 표정으로 친구들과 소주잔을 부딪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엄혹했던 당시의 시대상황에서도 최루가스를 마셔가며 사법고시, 공인회계사를 준비하는 이들도 많았으니,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 학업을 소홀히 했던 것은 오롯이 나 자신의 책임이었뿐.
어쨌든 온통 관심이 엉뚱한 곳에 가있던 상황에서 보낸 학창 시절 B학점에 대한 기억은 그럭저럭 선방한 무난한 점수로 남아있다.
귀소본능이라고 했던가. 요사이 내 주변은 온통 육 십년지기 초딩 동창들로 둘러싸여 있다.
함께 초등학교를 다닌 고향마을에서 무려 사십 년 이상을 그것도 매달 계모임을 하면서 어울려 살고 있으니 특별한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경계심이 없으니 허물이 있을 리 없고, 만나면 그냥 마음이 편안해지는 현상은 서로 간에 숨길 것 하나 없는 동병상련의 처지이기 때문이다.
너무 잘난 녀석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못난 녀석도 없는 대충 무난하게 B학점의 인생을 살아가는 엇비슷한 친구들 간 만남의 의미는 이제 후반기 잔여 인생을 살아가는 입장에서는 한마디로 종합비타민제 그 자체다.
지난주 토요일, 초딩 동창들의 연초 정기총회모임에서 우리 또래의 공통현상인 머리숱이 단연 화재거리로 등장했다.
모임에 참여한 열댓 명 친구들 가운데 이마나 정수리 부위가 민숭민숭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는데 오히려 이런 현상을 연륜의 훈장쯤으로 생각하면서 대부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데 외눈박이 세상에서는 두 눈을 가진 정상인이 놀림감이 된다고 흰머리만 조밀하게 섞여있을 뿐 아직도 그럭저럭 보아줄 만한 멀쩡한 녀석들이 딱 세명 있었다.
소위말해서 B학점들 틈새로 A학점이 섞여있는 형국이었으니 그 세 녀석들이 오히려 신기한 별종취급을 받았던 거다.
솔직히 말해서 머리숱의 있고 없음에 따라서는 그 이전과 그 이후로 나누어도 될 만큼 육 십년지기 남자아이들의 이미지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인 장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그래도 자세히 뜯어보면 초딩 때의 기본 이미지가 남아있지만 머리숱이 눈에 띄게 헐 건 해지면서는 옛 모습마저 함께 사라지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서글픈 현실이 된다.
그런 만큼 중년남자들의 이미지를 평가할 때 머리숱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 무엇보다도 압도적이다.
이날의 신년 총회에서는 무려 십 년 이상 우리 계모임의 살림을 책임졌던 정 총무가 드디어 회장으로 승진하는 대이변이 발생했다.
십여 년의 재임기간 동안, 각종 경조사가 몰려오는 인생의 황금기를 지나오면서도 인수당시 천만 원이던 살림살이를 무려 따블로 증액시킨 그야말로 마이더스의 손이었다.
얼마나 살림을 깐깐하게 잘 살았던지 계모임 식사자리에서 값비싼 추가 음식을 함부로 주문하다가는 정 총무의 찌릿찌릿 강력한 레이저 시선을 의식해야 할 정도였다.
그동안 총무살림을 너무 잘 살았던 것이 사단이 되어 정 총무 본인이나 다른 친구들 입장에서도 문제 아닌 문제가 되었다.
잘해도 그냥 잘한 것이 아니라 너무 잘한 것, 바로 그것이 큰 부담으로 작용하여 다들 손사래를 치는 실정이라 그 다음번 바통을 이어받을 후임자를 물색하기가 쉽지 않은 현실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정 총무로서는 정말 이제는 그만두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자충수에 빠져버렸고, 어쩔 수 없이 종신총무를 해야 할 딱하디 딱한 사정이었다.
그런데 작년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 속에서 그놈의 술 때문에 정 총무의 바통을 그만 허 부장이 이어받게 되는 축배를 들만한 큰 사건이 발생했다.
정 총무의 딱한 사정을 해결해 줄 요량으로 평소 우리 모임의 주당으로 평판이 자자한 친구들이 모여서 작전에 들어갔다.
참석자들의 만장일치로 다음 총무의 유력한 후보감으로 허 부장을 지목하고 집중 공략하기로 했는데 작전상 정 총무는 나중에 합류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스크린 골프나 한번 치자며 작전세력들이 허 부장을 불러내었고 적당히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평소 허 부장의 지론을 부추겨 나갔다.
일행들은 지금까지 정 총무가 지향해 온 일련의 긴축재정 정책을 비판하면서 앞으로는 복지정책을 대폭 강화하는 방향으로 계모임의 미래상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우리 총무는 말이야, 열이면 아홉은 다 좋은데 너무 짠돌이라서 문제야! 우리도 이제 나이가 환갑을 넘어 진갑에 들어서는데 좀 쓰면서 살 때도 안 됐나!"
"인제 돈은 그만 모아도 되니까 해외여행까지는 아니더라도 국내여행정도는 매년 다녀야 되지 않겠나! 내 말이 틀렸나?"
"계모임 때마다 먼저 만나서 스크린골프나 당구도 치면서 사전에 친목도모도 하고, 또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나 연극, 오페라, 하다못해 전망 좋은 카페 탐방 같은 문화생활에도 팍팍 지원을 해 주고 말이야!"
이러면서 자연스럽게 반주까지 곁들이면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되었고, 이때 정 총무가 일행의 연락을 받자마자 쏜살같이 달려왔다.
취중이었지만 분위기는 완전히 새해부터 달라진 계모임의 방향설정에 대한 열기로 가득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성장정책보다는 복지정책에 방향성을 두자면서 앞장서 열변을 토하는 이는 단연 허 부장이었다.
일행들의 얼굴에서는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회심의 미소가 묻어났고, 이 절묘한 타이밍에 맞추어 정 총무가 등장하여 기회를 놓치지 않고 빈틈을 향하여 깊숙이 정곡을 찔렀다.
암만 생각해 봐도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의 평소 스타일상 태도변화가 쉽지 않았다면서 치밀하게 계산된 정 총무의 자아비판이 시작됐다.
적극적으로 밀어줄 테니 허 부장이 한번 맡아서 진행해 보라며 단도직입식으로 제안했고, 모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침을 꼴깍 삼키면서 허 부장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우리 모임의 회칙에는 전임 총무가 자동으로 회장으로 승진하는 구조였으므로 허 부장의 동의여하에 따라서는 십여 년 만에 새로운 회장단이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남자들 간의 술자리는 수많은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어떨 때는 제대로 된 순기능을 발휘하는 법인데 바로 지금이 그랬다.
정 총무의 쾌도난마와 같은 기습제안에 모두 허 부장을 바라보며 최대한 분위기를 북돋으며 거들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신임 총무가 하는 일에 회장이랍씨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면 안 되는 거 알제!"
"우리는 무조건 총무가 돌격 앞으로! 하면 앞뒤 안 가리고 무조건 돌격하는 거다, 딴소리 없기다!"
이때 허 부장이 씨익 웃으면서 하는 다음 말이 걸작이었다.
"당신들 혹시 약소대련 아니여? 냄새가 좀 나긴 하는데 그래 알았다 알았어, 진짜로 내 마음대로 한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내 성질 알제? 장부 확 집어던짔뿐다!"
다음날 우린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단체 카톡방을 기웃거리며 혹시 전날의 도원결의를 취중실수로 치부하는 카톡문자가 날라들지 않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우리 동기들 가운데 유일하게 대기업 간부로서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허 부장의 책임감은 역시 필부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지난주에 있었던 총회자리에서 반포된 신임 총무의 신년 계획은 늙은 초딩 친구들의 기대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이제는 청산의 대상으로 지목된 바야흐로 성장의 시대는 가고 분배의 시대로 접어들었음을 만천하에 선포했다.
매년 부부동반 국내여행은 물론이고, 연극, 영화, 오페라, 카페탐방 같은 요사이의 젊은 트렌드를 따라가는 다양한 문화 활동들을 이번에도 요목조목 구체적으로 설명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 치밀한 허 부장답게 모든 내용은 회칙에 추가되어 대못을 박아버렸다.
사실 지난 사십 년 동안 계모임하면 연상되었던 저녁식사 자리에서의 과도한 술문화는 케케묵은 남성문화의 상징처럼 군림했지만 이제 낡은 구시대는 사라지고 희망찬 새 시대가 도래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잔여 배터리를 1/4 가량 남겨둔 시점에서 우리 스스로 철옹성처럼 굳건하기만 하던 술자리 위주의 모임 문화를 타파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특히 부인네들이 좋아할 만한 다양한 문화생활을 접목하겠다는 가히 혁명적인 발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발상일 수가 없다.
역시 대기업현장에서 온갖 설움과 핍박 속에서도 꿋꿋이 정년의 끄트머리에서 살아남은 강인한 생명력의 소유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발상이렷다!
예전부터 난 비슷한 처지의 여러 명이 함께 움직이는 중간자적인 삶이 심리적으로 훨씬 편안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그 이유를 알고 보니 인류역사 600만 년 가운데 99.5%를 차지한 시대가 바로 구석기시대라고 하는데 현대인의 몸속 유전자도 대부분 구석기인의 유전자 그대로라고 한다.
맹수를 만나면 함께 대항하기도 함께 도망치기도 하고, 또 수렵채집을 위해서 함께 몰려다니던 구석기인들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았다고 생각하니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이제야 그 연유를 알게 된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금 B학점의 인생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너무 잘난 친구도, 그렇다고 너무 못난 친구도 없는 평균 B학점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육 십년지기의 초딩 친구들아!
앞으로도 남은 인생, 가능하면 아프지 말고 부족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평균 B학점의 인생을 우리 서로 만족하면서 잘 살아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