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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앤 Apr 21. 2022

아무튼, 편지Ⅰ

편지는 곧 수많은 관계의 흔적이다.

 의 출판사가 합작하여 펴낸 <아무튼 시리즈>는 여러 명의 작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한 가지씩 꼽아  에세이 책이다. 류은숙 작가의 <아무튼, 피트니스>를 시작으로 최근작 김겨울 작가의 <아무튼, 피아노>까지 총 마흔여덟 개의 이야기가 나왔고 앞으로도 계속 출간 예정이다. 


위고, 제철소, 코난북스에서 펴낸 '아무튼 시리즈'

 

 <아무튼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내가 만약 이 책을 쓴다면 어떤 이야기를 쓸까?' 꽤나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민만  않고 <아무튼, 피아노>의 마지막 장을 덮기가 무섭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나는 대로 쭉 적어보았다. 가을, 윤동주 시인, 5월, 초록빛 나뭇잎, 파란 하늘, 빨간 머리 앤, 편지, 아이돌, 음악, 시, 빈백에서 책 읽기, 바람 소리,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책모임, 수다... 끝도 없이 적어 내려가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좋아하는 것들이 차고 넘쳐흐르는 사람이라는 걸.


 어떤 주제로 쓸지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무려 34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편지'로 나의 '아무튼 시리즈'를 완성해 보기로 했다. '편지' 이야기를 쓰기로 결단을 내리자마자 곧장 붙박이장 구석에 갇혀있던 편지 상자를 끄집어냈다. 상자 위에 내려앉은 뽀얀 먼지를 쓸어내고,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받았던 수많은 편지들을 바닥에 와르르 쏟아부었다. 바닥 위에 쌓인 편지를 시기별로 나누어 지퍼팩에 차곡차곡 넣은 다음 찾기 쉽게 라벨을 붙였다. 마음이 꽂히는 편지가 있으면 실실거리며 읽기도 하고, 잠시 멍한 상태로 추억 속에 푹 빠져 있기도 했다. 편지 보낸 사람 모습도 떠올려보고, 이런저런 생각도 메모해가며 정리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이 가까워졌다. 두 시간 넘게 이어진 편지 정리는 바닥난 체력과 짙은 피로감을 남겼지만 어릴 적 나와 과거의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해 준 아름다운 추억 여행이 되었기에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이제 30년 넘게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던 나의 편지 역사를, 편지 속에 얽힌 수많은 관계의 흔적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보련다. '아무튼, 편지' 첫 번째 이야기 개봉박두!



여덟, 엄마 아빠에게 전한 생애 첫 편지


 태어나 처음으로 내 손으로 직접 쓴 편지의 주인공은 누구였을까? 바로 엄마, 아빠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한글을 배웠다. 생전 공부란 걸 해 본 적 없는 나에게 30분가량의 수업시간은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고, 처음 써보는 글자는 외계어처럼 어렵기만 했다. 하지만 더디기만 했던 한글 공부도 차츰 발전의 기미를 보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언니 오빠처럼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열 칸 공책  네모칸이 내가 쓴 글자로 채워질 때마다 배움의 기쁨을 느끼곤 했다.


 한글이 익숙해지면서 칭찬받고 싶은 어린 마음에 어설픈 실력으로 엄마, 아빠에게 편지를 썼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저를 열심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개발새발 제 멋대로 뻗어나간 글씨였지만 편지를 받을 때마다 막내딸을 대견해하며 환하게 웃는 엄마, 아빠의 모습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우리 막둥이가 이제 글씨도 쓸 줄 알고 다 컸네. 아이고 기특해라." 하고 궁둥이를 두드려 줄 때마다 내 능력뿐 아니라 나라는 존재까지 인정받는 것 같아 기쁘고 뿌듯했다.

 

 여덟 살의 편지는 엄마 아빠에게 처음으로 말이 아닌 글로 전한 사랑의 표현이었고, 누군가에게 칭찬받고 인정받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기도 했다.



열둘, 나의 꿈을 응원해준 선생님의 편지


 내 삶 모두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때때로 간절하게 그리워지는 선생님이 딱 한 분 계신다. 바로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난 양교식 선생님.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에 자상한 모습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하고 고향이 같다는 공통점 때문인지 선생님과 나 사이는 유독 가까웠다. 선생님의 잔무를 돕고 심부름도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아 방과 후에 일부러 교실에 남기도 했다. 쓰기 시간에 주제에 맞는 글을 써서 씩씩하게 발표하고 나면 선생님은 진심을 다해 칭찬해 주셨고, 나는 선생님의 칭찬에 힘입어 더 열심히 글짓기를 했다.   


 선생님은 방학 동안 우편으로 보낸 제자의 편지에 답장을 못한 것이 줄곧 마음에 걸렸는지 개학하자마자 답장을 주셨다.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12년 동안 학교를 다니면서 12명의 선생님을 만났많은 편지를 전했지만 선생님께 받은 답장이 유일했다. 선생님의 편지는 세월의 흐름 속에서 찢기고 누렇게 변색된 낡은 모습으로 아직까지 앨범 속에 고이 보관되어 있다. 내 기억 속 선생님은 5학년 그때처럼 마흔을 넘긴 중년의 모습에 멈춰있지만, 현실 속 선생님은 이제 일흔이 넘은 할아버지가 되었을 것이다.


 스승의 날이 돌아올 때면 어딘가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나눠주고 계실 선생님 모습을 그려보곤 한다. 언젠가 꿈속에서라도 그분을 만나게 되면 선생님의 바람처럼 문학가가 되지는 못했지만 선생님의 격려와 칭찬 덕분에 여전히 책 읽기와 글 쓰기를 좋아한다고, 정말 감사하다고 꼭 전하고 싶다.


 열두 살 선생님의 편지는 세상 밖에서 만난 어른으로부터 받은 첫 편지이자 나의 꿈을 진심으로 지지해준 누군가의 첫 응원이었다.

상냥스런 연○에게
지금도 건강하겠지?연○이를 처음 만났을땐 고향에 있는 다정한 꽃처럼 느껴졌단다. 그렇지만 언제 얘기할 기회가 없더니. 잊지 않고 편지를 보내주어 그 아름다움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다시 또 앉게 해 주는구나. 답장을 보내지 못해 퍽 미안하다. 내가 시골있다 전주있다 하니 그렇게 되었다. 연○이는 이해를 해 줄까. 연○이는 참 문학에 소질이 많아! 열심히 노력해서 훌륭한 문학가가 되어봐. 그러려면 여러가지 폭넓게 다듬으며 조금 더 성장하고 튼튼한 기초를 다지고 기둥을 세워라. 2학기땐 더욱 재미있고 친구들과도 다정스럽고 이해하며 생활하자구나. 다시 한번 답장 못한것 미안하게 생각하며 줄인다.
- 1993.8.29. 선생님



 열여섯, 나의 팬심을 응원해준 친구들의 편지


 좋아하는 연예인을 열심히 쫓아다녔던 그때, 우리는 인기 있는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부인으로 불렸다. 나는 가수 김원준 부인, 누군가는 우지원 부인, 이상민 부인, 강타 부인, 토니 부인, 은지원 부인... 수많은 편지 속에서  이름은 유연○이 아닌 김원준 부인이 되었고, 친구들은 우리 둘의 사랑을 말과 글로 열심히 응원했다. 닿을 수 없는 사랑이란 걸 알지만 편지 속에서나마 가능했던 김원준과의 사랑에 나는 상상만으로도 행복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나는 김원준이 아닌 조성모 팬이 되었고, 어울림(김원준 팬클럽)이 아닌 마리아(조성모 팬클럽) 회원이 되었다. 김원준을 향한 나의 뜨거운 팬심을 응원해 준 친구들의 편지는 중학교 졸업과 함께 막을 내렸지만 편지 속에 남겨진 그녀들과의 이야기는 아직까지 절찬 상영 중이다.


  열여섯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주고받았던 수많은 편지 속에는 좋아하던 연예인을 향한 열렬한 팬심과 매일매일 하고 싶은 말들이 넘쳐났던 친구들과의 시간이 담겨있다. 

원준 부인 보아라. 지금 '박소현의 FM데이트'에서 너의 사랑스러운 남편 원준이가 나왔어. 너도 들으면서 아주 난리가 났겠지? 'TV가요 20'에서 HOT가 1위 했는데 너도 봤지? 토니 진짜 완전 멋지지 않냐? 난 토니가 넘 좋다. 언젠가 너는 원준 부인, 나는 토니 부인이 되어 함께 만나면 완전 좋겠다. 히히^^ 내가 니 꿈속에 너의 사랑 원준이가 매일 나오도록 기도해주께. 너도 내 꿈속에 토니 나오게 기도해줘.

어제 'TV는 사랑을 싣고'에 김원준 나오는거 너도 봤지?나는 원준오빠가 그렇게 잘 생긴지 몰랐는데 어제 보니까 정말 진짜 잘 생겼더라. 장난이 아니더라구. 원준오빠는 좋겠다. 아리땁고 착한 소녀가 사랑을 팍팍 주니 말이야. 연순아 공부 열심히 하고 원준오빠 영원히 좋아하길 바래. 그리고 원준오빠 노래 show도 열심히 들어줄께. 노래 좋으니까 꼭 1위했으면 좋겠다.



 열여덟,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던 노력의 편지


 어려서부터 편지 쓰는 걸 좋아했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어서도 아기자기하게 꾸민 편지지에 많은 편지를 썼다. 친구들은 예쁜 편지지에 정성스럽게 쓴 내 편지를 받고 나면 기쁨의 웃음을 지었다. 내 자랑 같아 좀 부끄럽지만 나는 손재주가 좋아 꾸미기나 그리기를 잘했고, 글씨도 잘 써서 초등시절 서기를 도맡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실력들을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낌없이 마구 쏟아부었다.


 내가 쓴 편지의 대부분은 상대방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은 진심에서 우러난 것이었지만 때론 어긋난 관계가 불편해서, 멀어져 가는 친구의 마음을 붙잡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어떤 편지는 위태로워진 관계를 회복시키고픈 몸부림과 비굴함으로, 쓰라린 상처들로 얼룩져 있었다. 어느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나를 더 아프게 했고, 더 많이 울게 했다. 친구 관계가 힘들 때도 있었지만 그들과 주고받았던 편지는 잠시나마 입시의 불안감을 잊게 해 주었고 크고 작은 위로가 되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부터는 아픈 기억도 추억이란 이름으로 내 곁에 머물렀다.


 열여덟 살의 편지를 읽을 때면 문학소녀가 되고 싶었던 나의 어설픈 허세가 한없이 부끄러워지고, 세상의 전부라 느꼈던 친구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자 안간힘을 썼던 내 모습이 어쩐지 좀 안쓰럽기도 하다.

유연○은 인기가 좋아. 유소은 따위는 거들떠 보지도 않지. 나는 너를 최대한 챙겨주려고 하는데... 너는 나를 거지 발싸개로 여기지? 맨날 은영이랑 은이한테만 편지쓰고... 아무튼 나는 너한테 아주 실망했다네. 나는 돼지 똥구녁에 붙은 보리밥풀같은 존재라네. 오늘도 연○이의 돼지털이 바람에 스치운다. 내일 면바지 좋은거 사라. 너가 같이 가자고해도 같이 안갈꺼야.

연○아 벌써 너랑 앉은지도 3주가 되었구나. 첨엔 니가 날 맘에 안 들어하는 것 같아서 증말증말 소외감 느꼈다. 전에도 한번 짝꿍 했었잖아. 그때 난 나중에 가서는 사이가 괜찮아진줄로 알았었는데. 야영 가서 장기자랑 했던 일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네게 서운한 마음이 많이 들었어. 그런데 니가 내게로 와서 울때는 마음이 수그러지더라. 가끔 네가 무안을 주기도 하지만 나는 네게 정이 많이 가. 이제 정들쯤 되니까 너랑 헤어진다니 너무 안타깝다. 새 짝꿍 승희한테도 나한테 했던 것보다 더 잘해주고... 근데 너무 친하게 지내면 나 질투 날꺼야. 자신있고 명랑하고 웃기도 잘하는 네 모습이 참 좋아. 유연○ 화이팅! 스터디 하드하고 앞으로도 서로를 꼭 찾아주기. 안녕!!


수많은 관계의 흔적 속에서 어른이 되다


 아마도 나는 상자 속을 가득 채운 편지보다 훨씬 더 많은 편지를 정성들여 누군가에게 썼을 것이다. 그렇게 쓴 편지는 때론 누군가의 손위전해졌고, 네모난 우표를 달고 우체통으로 흘러들어 다. 혹은 친구들 책상 서랍 어딘가에 살며시 놓이기도 했고, 제삼자를 거쳐 불편하게 전해지기도 했다.


 편지 속 이야기뿐 아니라 편지를 주고받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은 누군가와 얽히고설킨 관계의 흔적이자 지나온 내 삶의 기록이기도 하다. 편지의 대상이 되었던 엄마와 아빠, 친구, 선생님, 가족, 아는 동생과 언니, 얼굴도 모르는 펜팔 친구에서부터 편지 쓰기에 필요한 재료들을 사기 위해 뻔질나게 드나들었던 문구점 사장님까지. 더 나아가 편지와 소포를 보내러 다니면서 가까워진 우체국 직원까지. '편지'라는 매개체는 인간관계를 넘어 훨씬 더 많은 곳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내 삶 깊숙이 파고들었다.


 편지는 나를 둘러싼 또 하나의 세계이기도 했다. 그 세계 안에서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고, 중학생, 고등학생이 되었고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어른이 되어가는 동안 편지 속에 존재했던 사람들은 하나둘 멀어지고 끊어지다 결국 기억 속에서조차 희미해졌다. 친구들로 가득 차 있던 세계는 조금씩 작아졌, 그 안에는 사회에서 만난 또 다른 사람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아무튼, 편지' 두 번째 이야기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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