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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구리 Feb 20. 2023

지구에서 여자로 살기 5

건조기와 나


  건조기에서 갓 나온 빨래는 따듯하고 폭신폭신하게 구김도 없어서 갤 때 포근하게 손에 감기는 맛이 있다. 그런데 어쩐지 건조기가 땡땡거리자마자 바로 빨래를 갤 타이밍을 잡기란 꽤나 어려운 것이어서 결국 빨래들은 언제 폭신했냐는 듯 공기 중의 수분을 머금고 무거워져서 서로의 무게로 서로를 짓눌러 주름지고 눅눅하게 구겨져버린다. 이 눅눅한 빨래를 개는 시간은 주로 아이를 재우고 피곤함이 절정에 이른 시간일 때가 많은데 그때 구겨진 주름을 손바닥으로 온기를 주고, 토닥 토닥해주고, 펼치고 그렇게 반복적으로 차곡차곡 빨래들을 개고 있노라면 도 닦는 게 이런 기분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모든 집안일이라는 게 결국은 이렇게 반복되고 그러면서도 애정을 필요로 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하면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난다.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집안일에 소질이 없는 내가 십 년이나 주부로 살아버렸다. 아직도 나는 밥도 잘 못하고 청소도 미흡하고 빨래도 항상 빨래통에 산처럼 쌓여있다. 냉장고에는 늘 뒷칸에 날짜가 지난 요거트들이 폐기를 기다리고 있다. 쉬지 않고 일함에도 불구하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집안일의 굴레에서 빨래는 다른 일들에 비하면 힐링 수준이다. -다른 일에 비해서 힐링이라는 거지, 진심 힐링은 아니고!!- 이렇게 십 년을 보내다 보면 자존감이라는 게 바닥이 도대체 어디인가 싶을 만큼 떨어진다. 이제는 더 이상 나는 참 소중하고 귀한 존재라고 어거지를 쓸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다.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까지 오를만한 의지도 지구력도 머리도 없다는 게 아쉽고 속상하고 억울하다. 일타강사 이지영샘이 말하기를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려면 적당히 독해야 한다는데 독기라는 게 부부싸움 외에는 발현되지 않는다. 그 독기라는 게 나에게는 없는 것인 줄 알았는데, 쥐똥만큼 있기는 있었다. 남편하고 싸울 때 보니.

집안일은 끝없이 싸움을 만드는 화두다. 나는 반쪽짜리 전업주부인데 그 이유는 집안일 중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는 밥을 대부분 남편이 하기 때문이다. 시간적으로 아무리 많은 시간을 집안일에 할애해도 남편이 보기에 나란 여자는 세끼 밥 얻어먹고 집에서 노는 삼식이에 불과한 것이다. 청소라는 것은 꽤 지겹고 힘이 들지만 좀 미룬다고 해도 사는 데는 별 지장이 없다. 그치만 밥은 당장 입에 안 넣으면 살 수가 없는 것이라 나는 사실 전업주부로서도 그다지 입지가 없다. 그래서인지 남편은 절대 본인의 월급의 절반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킹받는다. 그래서 나는 남편하고 한판 붙을 때 법을 들먹이며 그 절반이 내 소유라고 우겨대지만 우기면서도 좀 비참하다. 내가 남자 하나 따위는 응당 먹여 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꽉 찬 시절도 있었는데, 내가 어리석었다. 누가 누굴 먹여 살리는 일 따위는 부부사이에 그닥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어느덧 내 세계는 슈퍼 전단지와 학부모 단체톡방 어딘가에만 머무른다. 이 좁은 세상에서 나는 오그라드는 나 자신을 매일 구겨진 빨래를 도닥여 펴듯 펼치며 먼지처럼 소멸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아마도 핸드폰을 붙들고 끄적이는 그것들이 내 발버둥의 흔적일 것이다. 눅눅하게 구겨졌더라도 펼쳤다 개었다를 반복하며 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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