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지점만 고집하던 시선에서 아주 조금 벗어나거나, 혹은 한번 물러서자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무한히 붙들고 있던 문제 하나 너머로 주변에 놓인 모든 것들이 이미 죽어버린 감정들로 겹겹이 덮여 있다는 사실.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숨이 끊어진 자리 옆에서 아직 끝내지 못한 잔재들이 움찔거리며 짧은 비명을 낸다. 그 소리는 크지 않고, 날카롭지도 않다. 마치 얕은 숨이 의미 없이 새어 나오는 것처럼 공간 안에 낮게 울릴 뿐이다.
나는 그것들을 치우려 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정리하겠다는 의지도 지금의 나에게는 과하다. 대신 점철되어 있는 관계와 겹겹이 쌓인 추억, 서로 엉켜 매듭조차 알 수 없는 감정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풀지 않고, 자르지 않고, 그저 놓인 상태로. 이 관조는 무기력과는 다르다. 개입하지 않겠다는 선택, 손대지 않겠다는 판단에 가깝다. 잠시 호흡을 멈추거나 의도적으로 느리게 가져가며 이 모든 것들이 내 안에서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조용히 살핀다.
숨을 고르는 동안 시간은 다시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한다. 빠르지도, 멈춰 있지도 않은 아주 애매한 속도로. 그 속도 안에서 죽은 것과 살아있는 것의 경계는 조금씩 분리되고, 인식된 틈을 서서히 바라본다. 이 틈에서 변화의 바람이 스친다. 강하지도 않고, 확실하지도 않다. 다만, 지금의 상태가 영원히 고정되어 있지는 않다는 미세한 증거처럼 피부를 스친다.
순간을 붙잡지 않는다. 변화를 성취로 만들지도, 의미로 과장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 짧은 바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몸에 남긴 채 다시 숨을 쉰다. 아마 지금의 변화는 이렇게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단이 아니라 시선의 이동으로, 행동이 아니라 관조의 깊이로.
모든 것을 바꾸지 않는다. 한 지점에만 머물던 시선을 조금 풀어 이 공간 전체를 그리고 오늘을 통과하게 한다. 그것만으로도 내 안에서 아주 작은 방향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