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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셀린 Dec 19. 2022

아버지의 커피

그는 왜 바리스타가 되었을까

 

 온 세상이 갑자기 꽁꽁 얼어버렸다. 된추위에 놀라 밖으로는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종일 집안에만 있으려니 답답증이 인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마음조차 뒤숭숭해진다. 이렇게 속이 들썩일 때는 드립 커피 한 잔이 제격이다. 커피를 내리고, 파란 꽃무늬에 금박을 입힌 화사한 커피잔을 준비한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젖은 창가에 앉으면 마음은 서서히 가라앉고 달곰쌉쌀한 추억들이 커피 향을 따라 물에구룸처럼 피어오른다.      


 아버지는 남도 여수에서 다방을 운영하셨다. 군청 공무원으로 일하시다 왜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는 아직도 알 길이 없다. 중학교 갈 때가 되면 우리는 무조건 서울로 유학을 떠났다. 딸이든 아들이든 본인이 원하면 공부시켜야 한다던 아버지셨다. 더 배우고 싶었지만 엄하신 할아버지 때문에 전문학교로 학업을 끝낸 것에 대한 아쉬움은 아니었을까 싶다. 

 ‘바리스타’. 그 시절에는 바리스타라는 이름을 쓰지 않았지만, 멋과 풍류를 즐기고 담소 나누는 것을 좋아하셨던 아버지에게는 참 잘 어울렸을 이름이다. 아침마다 커피를 내리고 차를 준비하고 그날 들려줄 음악을 고르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커피 향을 따라 주방에 들어가 기웃거리면, ‘넌 아직 커피 맛을 알기에는 이른 나이야.’ 하시며 커피 대신 따뜻한 우유를 챙겨 주시곤 했다.      

  

 시골 출신인 내가 서울 토박이 아이들에 비해 자랑스럽게 갖고 있던 유일한 자부심은 방학 때마다 돌아갈 고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즐거움 중의 하나는 무엇보다 아버지가 내리는 커피 향을 맡으며 골라놓은 음악을 듣는 일이었다. 그때는 뮤직 박스가 다방 홀 안에 있지 않았다. 방에 있는 전축에다 레코드판을 걸어주곤 했는데, 방학 동안 이 일은 내 차지였다. 지금도 옛 팝송이나 경음악을 들으면 그 시절 내가 걸어주었던, 이제는 뒤틀리고 여기저기 흠집이 나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옛 레코드판들이 빛바랜 사진처럼 떠오르곤 한다.      

 오늘처럼 몹시 추웠던 어느 겨울날, 아버지의 심장은 그만 멎고 말았다. 육 남매를 유학시키느라 그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는지, 또 그의 심장은 얼마나 졸아들고 있었는지 자식들은 알지 못했다. 넉넉하지 못한 서울 살림을 늘 미안해하시던 아버지셨다. 무엇보다 자식들의 성공을 보지 못하고 일찍 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어제는 아버지 기일이었다. 올해는 코로나19 사태로 가족이 함께 모이지 못했다. 추도식은 각자 집에서 지내고 저녁 시간대에 가족 대화방에서 줌으로 만났다. 대화는 매일의 일상사에서 시작하여 자식들 안부와 그리고 나이 들어가면서 중요하다는 건강 이야기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누군가가 이렇게 성장한 자식들을 보지 못하고 떠나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꺼내 놓자 그에 대한 추억과 일화로 대화방은 이내 시끄러워졌다. 이제는 상실에 대한 슬픔보다는 옛 시절에 대한 향수와 익살이 오가는 자리다.      

 겨울이 되면 늘 가슴 한쪽이 시린 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의 거리가 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가 내리시던 커피를 한 번도 함께 마셔보지 못한 회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늘 같은 날에는 아버지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싶다. 아니 내가 내린 커피를 아버지께 한 잔 대접하고 싶다. ‘아버지는 왜 바리스타를 하셨을까?’여전히 답은 들을 수가 없다.     

 

 ‘커피는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 주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해 준다.’ 알랭 스텔라(Alain Stella)의 말처럼 오랜만에 아버지를 만난다. 오십 년도 훌쩍 지난 그 시절의 옛 마을 다방에서 아버지가 틀어주셨던 나나 무스쿠리(Nana Mouskouri)의 노래, ‘한 떨기 장미꽃( The last rose of summer)’을 함께 들으면서. 커피를 내리시던 아버지의 키 큰 뒷모습과 그가 내리던 커피 향이 수묵화처럼 번져가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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