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구이보다 수다가 맛있던 날
얼마 만에 만난 친구들인가! 코로나로 또 개인 사정으로 귀국한 지 2년이 되어가지만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대학 친구들이다. 대학 동창 과 모임이 있긴 하나 나와 친했던 친구들은 참석하지 않는다. 과 전체 모임에 나가는 것이 왠지 부담된다고 했다. 졸업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그 시절을 떠올리면 데면데면할 수밖에 없다고도 했다. 나도 그런 마음이었지만 귀국 인사차 몇 번 참석했다. 서로 나이 들어가서인지 사는 것이 그냥 그냥 그런 모습인지, 많이들 이무럽게 느껴져 다행이었다.
우리는 건강을 생각한다며 오리 구이집에서 만났다. 먹는 것도 그렇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다. 서로 체중이 늘었느니 줄었느니, 먹는 약은 몇 가지나 되는지, 아침은 누가 챙기는지, 골다공증이 의심되어 걷는 운동 열심히 한다는 이야기까지 사는 이야기는 그렇게 흉허물없이 흘러갔다.
사실 전체 과 모임에 나가면 이렇게 속 내놓고 이야기하게 되지는 않는다. 자존심이나 품격 따위보다는 우리 학과 만의 유별난 특성 때문인지 모르겠다. 모두 잘난 아이들이었고 실력도 출중한 고교 출신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A 출신은 A 출신끼리, B 출신끼리 B 출신끼리, C 출신은 C 출신끼리 강의실과 실험실로 뭉쳐 다녔다. 이들 리그에 끼지 못한 대여섯 명의 우리는 나름의 군소정당을 만들어, 모임도 하고 산행도 다녔다.
말이 많지도 않고 나서는 성격도 아닌 나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앞장을 서게 되었다. 강의 시간이 지나도 오지 않는 교수님은 15분 이상 기다리지 않고 땡땡이를 쳐버리곤 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며 우이동 계곡이나 백운대로 돌아다녔다. 여름방학에는 무주구천동과 진안 마이산, 부여 등으로 며칠씩 산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다 우연히 마주쳤던 S대학 남학생들과는 애프터 모임도 했었다. 하도 잘난 체를 해서 아직도 이름이 잊어버려지지 않는 그들.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우리 나름의 대학 시절의 특별한 감성과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들. 어쩌면 전공에 별 흥미가 없었던 것이 우리의 공통분모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유기화학, 무기화학,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아팠던 그 시절, 출석 채우기에도 버거웠다. 친구들은 그래도 내가 리포트를 잘 써서 저들이 베꼈다는 이야기, 시험 때가 되면 내 강의 노트를 빌려 갔다는 이야기도 했다. 유급자 없이 모두 잘 졸업했던 친구들. 나는 소심한 성격이었지만 용의주도했고, 현실에 만족하지는 못했지만, 어떻든 갈등 상황을 지혜롭게 해결했던 모양이다.
우리의 대화는 과 친구들이 모래알처럼 따로따로 놀았던 이유와 우리를 ‘데쳐놓은 시금치’ 같다고 몰아세우시던 젊은 교수님 이야기까지 20대로 돌아가 회상에 젖기도 하고, 갑자기 요즘 여기저기 아프다는 현실 세계로 가고 오며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이런 수다 얼마 만인가? 나는 수다가 그리웠던 모양이다. 그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들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겠다고 나선 걸음이 결국은 나의 문학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그리고 살아가는 이야기로 줄달음쳤다. “야! 영어로 수다 떠는 일 쉽지 않지?”라며 수다 판을 펼쳐 준 친구들. 앞으로는 나의 외로움을 책임지겠다고 했다. 이 얼마나 멋지고 고마운 친구들인가. 대학 친구는 깊이 사귈 수 없다고 하지만 산을 함께 탔던 친구들이라 그런지 우리는 여전히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사는 모습은 달라도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속을 다 뒤집어 내놓아도 부끄럽지도 어색하지도 않은 자리.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속 이야기가 수다로 엮여 시끄러웠던 하루였다. 어쩌면 오리고기보다 수다를 더 많이 먹었던 하루이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그들과 함께했던 시간을 되돌아보면서 카톡방에 고마움의 말을 남긴다.
아직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살아갈 수 있음에 위로받으며 결국 사는 일은 그렇게 특별하지도 그리 허술하지도 않다는 것을 새삼 느낀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