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트로포즈(Anthropause)
강이연 작가의 <유한> 프로젝션 매핑 작업은 압도적인 영상과 사운드가 마치 한 편의 영화 같았다. 어두운 전시장 벽면이 온통 수천수만 개의 나뭇잎으로 반짝거리며 숲의 파동이 아찔하게 전해왔다. 그도 잠시, 숲은 불타오르고 나뭇잎들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수많은 빌딩이 세워지고 그러나 도시는 이내 거대한 빙하로 변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산맥들…. 전시장의 벽과 바닥이 영상으로 뒤덮여 마치 온몸이 빨려 들어가는 듯한 착각에 그만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숲의 소리, 세계대전의 소음, 피아노 선율 등 11 채널 음향이 울림을 더했다.
이에 반해 <무한>은 1880년부터 현재까지 총 150년간의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증가량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정밀하게 설계된 스크린을 통해 빛의 투과, 흡수, 반사작용을 공간 전체로 확장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인류 역사와 함께 급증해 온 탄소 배출량에 따라 변해가는 지구 모습을 보는 것은 조금 충격적이었다. 인류의 행위와 기후 변동과의 인과관계를 보여줌으로써 그 영원한 상호작용 속에 유한한 인간이 위치한다는 사실을 보여준 전시회였다.
작가는, 지속해갈 우리의 지구를 아무 생각 없이 써버리고 있는 현대인에게 이렇게 경각심을 주고 싶었던 것 같다. 인터뷰에서, 아이슬란드의 환경운동가인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의 <시간과 물에 대하여>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기후변화와 기후 위기 문제를 팬데믹 현시점에서 다시 한번 고찰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 때문인지 그때 나도 마침 <시간과 물에 대하여>를 다시 읽던 중이라 관심이 컸다.
안드리 스나이르 마그나손은 지구온난화가 아이슬란드 자연에 끼친 거대한 영향에 대한 글을 써오면서 앞으로 100년에 걸쳐 지구상에 있는 물의 성질이 근본적으로 달라질 것이라 예견했다. ‘빙하는 녹아 사라질 것이고 해수면은 상승할 것이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가뭄과 홍수가 빈번하고 해수는 산성화 될 것이다. 이 모든 현상은 오늘 태어난 아이가 할머니 나이인 아흔다섯까지 살아가는 동안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기후변화라는 중요한 이슈는 백색 잡음으로 흩어져버리고 만다.’라고 토로했다.
또한 시간이라는 개념도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고 했다. 우리의 시간은 우리 생애가 지속되는 80년, 100년만이 아니다. 우리가 연결된 시간은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 증조부모 시간으로부터 조부모, 부모, 우리의 자녀, 또 그들의 자녀에 이르는 적어도 200년이 넘는 시간이다. 즉 우리의 시간은 우리가 알고 사랑하고 우리를 빚은 누군가의 시간이며, 우리가 알게 될 우리가 사랑하게 될 우리가 빚어낼 누군가의 시간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렇게 맨손으로 200년 넘는 시간을 만질 수 있다는 말, 신선하고 위로가 되는 말이다. 문득 *이근화 시인의 시가 연상되기도 했다. 할머니는 이제 없지만/엄마의 몸속에 할머니가 다시 살고 있는 것 같다/엄마가 나를 낳아/내 몸속에 엄마가 다시 산다면/ 내 몸속에는 할머니도 있고 엄마도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의 나로부터, 젊은 날의 나, 중년의 나와 새로 태어난 가족, 그리고 그들이 또 새로 맞이한 가족을 통해 어쩌면 내가 들었던 증조할머니의 이야기가 내 손녀와 그 손녀의 훗날 가족에게까지 전해진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 긴 여정의 시간인가! 할머니한테서 듣고 배운 것을 손자 손녀에게 가르칠 수 있다면 우리도 먼 미래에 직접 영향을 줄 수 있다는 희망으로 다가온다.
코로나로 인한 인류 활동의 일시적 정지(anthropause, 앤트로포즈).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지만, 이 일시적 멈춤이 미래를 위한 생산적 멈춤으로 자리바꿈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근화 시인, 우리 몸속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