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울 건너 찐빵집

동네 생활 에세이 | 동네에 관한 사소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동네 생활 에세이]는 필진이 살고 있는, 살았던 동네에 대한 사소한 이야기를 담습니다. 동네에서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통해 여러분이 동네와 새롭게 관계 맺기를 바랍니다.



개울 건너 찐빵집 / 노석미 작가


날이 몹시 흐리지만 길을 나선다. 곧 나올 책의 프롤로그를 쓰다가 머리도 식힐 겸 나선 길이다. 자전거를 놓고 그냥 걷기로 한다. 집에서 있던 차림새에 부스스한 머리를 감춰줄 모자 하나 대충 휘리릭 쓰고 나서려다 그래도 혹시 몰라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생수도 작은 걸로 한 병 챙겨 넣은 가방을 어깨에 멘다. 늘 다니던 길, 이 길에서 음악도 듣고 여러 생각을 정리도 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도 얻고, 그림의 소재들도 많이 주웠다. 그렇지만 주로 하는 일은 멍을 때리는 일이다. 느린 걸음으로 터덜터덜 걷는다. 초록들이 열매들을 달고 무겁게 축축 쳐져있다. 그들도 마감을 하고 있다.


mountainsandhouse.jpg 노석미<산과 집 Mountains and house>, 2017.acrylic on canvas, 31.8*40.9cm.


나는 서울을 기준으로 조금만 더 가면 강원도 횡성이 나오는 경기도 양평의 동쪽 끝자락에 살고 있다. 면내 중심가에서 떨어져있는 도의 경계면이다 보니 인적이 드물다. 크고 작은 산들 사이로 난 지방도를 끼고 논, 밭, 비닐하우스 등이 있고 그것들의 주인들이 살고 있을 집들이 드문드문 보인다. 작은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 옆에 둑길이 있는데 내가 집을 나와 걷거나 자전거를 끌고 나오는 산책길이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둑길이다.

afterthesnow39.jpg 노석미<눈이 온 뒤 After the snow_39>, 2018.acrylic on canvas, 31.8*40.9cm.


개울은 내가 걷는 방향과 반대로 흐르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개울을 거슬러 걷기 시작한다. 거기서 만나는 모든 것들은 그다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하다. 어쩌면 너무 초라하기도 하다. 하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고 신기하다. 멀리 보이는 산들도 가까이에 밭과 논, 길섶의 풀들도 매번 같은 모습이 아니다. 개울 역시 매번 같은 소리를 내지 않는다. 같은 것이 있다면 야생 오리나 백로를 가끔 만나 인사를 건네는데 그들은 언제나 내게 무심하다는 것이다.


걷다보면 길 건너편 지방도로가에 놓인 찐빵집이 나타난다. 왜 가끔 자동차를 타고 한적한 도로를 달리다 만나는 그 붉은 간판, 그 찐빵집, 맞다. 하지만 이 찐빵집은 내겐 특별하다. 왜냐하면 그 주인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 개울에 놓인 다리를 건너 길로 이어진 곳을 따라 가면되는 찐빵집을 굳이 나는 개울을 건너서 간다. 흐르는 물 사이 징검다리를 디디며 어어어하며 개울을 건너오는 손님은 아마도 나 밖에 없을 거다. 내겐 개울을 건너서 가야하는 찐빵집이라 더 특별하다. 찐빵을 먹겠구나. 생각하겠지만 찐빵을 먹은 적은 별로 없다. 찐빵집 주인이 내주는 종이컵에 담긴 달달한 커피를 한잔 얻어먹을 때가 더 많다.


찐빵집 간판이 보일 즈음 찐빵집 주인에게 문자를 넣는다. 찐빵집 여주인은 같은 면내 배드민턴클럽 회원이고 나와 동년배이다. 나의 문자에 그녀는 전화를 걸어온다. 반가운 목소리로 놀러오라고 한다. 찐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자 대낮에 흐리멍덩한 영혼으로 길을 걷던 나와는 달리 그녀는 활력이 넘친다. 찐빵을 팔고 농부인 남편이 지은 각종 농산물들을 정리하는 일 등 그녀의 근황에 대해 말하는 입과 손이 분주하다. 그들의 주력작물인 수박은 농사일정이 끝났고 남은 가을은 호박 수확만이 남겨져있다. 문득 그녀의 얼굴과 커다란 갈색 눈동자를 보는데 물론 지금도 예쁘장한 얼굴이지만 한때 상당한 미녀였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녀는 역시 당연하게 내게 커피를 권한다. 혹시 블랙을 먹겠냐고해서 나는 언제나처럼 다방스타일을 먹겠다고 한다. 달달한 종이컵에 담긴 봉지커피를 앞에 두고 그녀와 나는 주로 농사이야기, 배드민턴클럽에서 일어난 소소한 일들에 대한 뒤담화를 한다. 그녀와 내가 나누는 우리의 공통관심사이다. 잠시 후 찐빵집에 손님들이 들이닥쳐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저녁운동 때 만나자는 인사를 남기고 찐빵집을 나선다.


돌아오는 길은 다시 개울을 건너지 않고 다리를 건너 집으로 향한다. 곧 비가 내리려는지 회색 구름 낀 하늘은 빵 터지기 일보직전처럼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하지만 집이 그다지 멀지 않음으로 발걸음을 재촉하지는 않는다.


✱ 노석미 작가

서울에서 태어나 홍익대에서 회화를 공부했고, 다양한 분야의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인, 인형 만들기, 아트상품 제작 등을 하며 여러 차례 개인전과 기획전을 열었다. 20대 후반 도시를 벗어나 초록이 많은 곳으로 이동했다. 산이 보이는 정원이 딸린 작업실에서 작은 텃밭을 일구며 고양이 씽싱과 함께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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