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따라 하는 것 실은 좋은 것
"나도 모르게 그 사람 말투를 따라 하더라고요."
처음엔 조금 민망했죠. 내가 왜 이러지? 자존감이 낮은 건가? 독립적이지 못한 걸까? 하지만 그런 경험은 누구나 한 번쯤 있지 않나요? 가까운 친구의 말버릇을 닮아가거나, 연인의 제스처를 자연스레 따라 하는 순간들.
이런 무의식적인 행동 뒤에는 단순한 ‘모방’ 이상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건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뇌의 아주 정교한 생존 전략이었던 거죠.
관계의 첫걸음, 뇌는 ‘따라 하라’고 말한다
우리는 보통 ‘따라 한다’는 행동을 낮춰 보거나, 창의성이 없는 사람의 특성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 뇌는 기본적으로 따라 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마치 스마트폰이 처음 켜지면 와이파이를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사람의 뇌도 관계라는 네트워크에 접속하려는 ‘기본 설정’이 켜져 있는 셈입니다.
2025년 3월 21일 메디칼프레스에 소개된 미국 버지니아대학교 심리학자 짐 코언(Jim Coan)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은 타인을 무의식적으로 모방함으로써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합니다. 이때 활성화되는 것이 바로 ‘미러링(mirroring)’이라는 뇌의 활동입니다.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 상대가 물을 마시면 나도 입을 축이고, 상대가 턱을 괴면 나도 모르게 같은 포즈를 취하는 것. 이런 동기화 현상은 거울 뉴런(mirror neurons)에서 비롯된 반응으로, 인간은 유전적으로 타인을 따라 하도록 진화한 존재라는 것을 시사합니다.
생후 42분 아기도 따라 한다?
흥미로운 실험이 있습니다. 1977년, 워싱턴대학교 심리학자 앤드루 멜조프는 생후 42분 된 신생아에게 혀를 내밀어 보였습니다. 놀랍게도, 아기는 그걸 따라 했습니다.
즉,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따라 하기’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 작은 모방은 단순한 장난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점이었던 거죠.
이러한 무의식적 모방은 어린 시절 부모의 말투나 표정을 배우는 데서 시작해, 성장 후에는 친구나 사회 구성원의 행동과 분위기를 감지하고 ‘적응’하는 도구가 됩니다. 말투, 억양, 걸음걸이, 심지어 취향까지도 무의식 중에 서로 닮아가는 것은 단순히 동화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뇌의 전략입니다.
나는 나인데, 왜 남을 닮아가야 할까?
여기서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남을 따라 하기만 하면 나는 누구일까?”
“나만의 개성은 어떻게 되는 걸까?”
코언 교수는 이런 의문에 명쾌하게 답합니다.
"우리 뇌에는 ‘자아(self)’라는 기관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자아는 나 혼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재조정되는 개념입니다."
즉, 남을 따라 한다고 해서 나 자신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통해 ‘더 입체적인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닮아가고, 자주 보는 친구와 말투가 비슷해지는 이유는 나약함 때문이 아니라, 뇌가 관계의 접점을 찾아가는 자연스러운 움직임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건 ‘진심’이라는 전제
하지만 모든 모방이 긍정적인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모방은 오히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코언 교수는 “사람은 상대가 자신을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따라 하고 있는지를 무척 민감하게 알아챈다”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회사 후배가 상사의 말투를 지나치게 따라 한다면 오히려 반감을 살 수도 있겠죠. 그래서 모방은 ‘자연스러움’과 ‘진정성’이 핵심입니다. 무의식적인 공감은 관계를 살리고, 의도된 위장술은 오히려 거리감을 만들 수 있습니다.
협력하면서도 ‘중복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
가장 인상 깊었던 코언 교수의 말은 이 문장이었습니다.
“벌이나 개미는 서로 똑같기 때문에 협력하지만, 인간은 서로 다르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협력할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각자의 개성을 유지한 채, 그러나 서로 연결되고,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간다는 것. 그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닮음’은 동일함이 아니라 공존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따라 하며 ‘너와 내가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우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남을 따라 하는 것은 나의 결핍이 아니라, 내가 속한 사회를 향해 내민 손짓이며,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원초적이고 정직한 뇌의 언어입니다.
관계를 맺고 싶은 뇌, 그 따뜻한 신호
앞사람의 보폭에 맞춰 걷는 당신,
상대의 말투가 닮아가는 당신,
친구가 좋아하는 음악을 같이 듣게 된 당신.
그 모든 모습은, 당신이 누군가와 연결되고 싶다는 신호일지도 모릅니다.
‘따라 한다’는 건 결코 수동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나를 더 풍부하게 만드는 선택, 관계를 깊게 만드는 섬세한 기술입니다.
다음번, 당신이 누군가를 따라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이렇게 물어보세요.
“나는 지금, 누구와 연결되고 싶은 걸까?”
� 여러분은 최근에 누구의 행동을 따라 해 본 적이 있나요?
혹은 누군가의 모방이 반갑거나 불쾌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당신의 경험을 댓글로 나눠 주세요. ‘따라 하기’ 속에 숨어 있는 당신의 이야기,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