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제가회의(諸加會議) (625)
건무왕은 자신이 폐지했던 제가회의를 소집하기에 이르렀다.
제가회의는 국왕과 각부의 상가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는 자리였다. 국왕은 오랜 전통의 제가회의를 중신회의로 바꾸고 국상과 대주부는 물론 욕살들까지 참가하게 만들었으나 그걸 원상 복귀시키기로 했다.
국왕은 참석한 욕살들을 못마땅한 눈초리를 보냈다. 오늘의 회의를 끝으로 그들을 모두 제거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응이 어떻게 전개될지는 알 수가 없어 마음을 다지게 되었다.
"짐이 오늘 제가회의를 소집한 이유는 중대한 사안을 처리하기 위함이다. 상가들은 좋은 의견을 내 주기 바라겠소."
국왕이 상가들의 의견을 구하는 말을 하자 고돌기가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은 중대 사안이란 게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짐은 앞으로 제가회의를 복원시키려고 한다."
"폐하께선 없앤 제가회의를 왜 복원시키려고 하십니까?"
고돌기의 질문은 자못 도전적인데 국왕은 대수롭지 않게 받았다.
"짐은 중신회의는 열지 않기로 했다."
"폐하께서 그러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짐은 뒤늦게나마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을 하게 되어 그런다."
"폐하께선 무슨 잘못과 반성을 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제가회의 폐지는 상가들과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게 없었다."
국왕의 대답에 고돌기는 또 물었다.
"폐하, 그러시면 연맹체를 복원시키겠다는 말씀이 아니십니까?"
"그렇다. 그런데 국상은 무슨 불만이라도 있는가?"
"폐하, 불만이라기보다 재고를 하셨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재고하지 않겠다."
고돌기는 국왕의 단호한 대답에 다른 말을 꺼냈다.
"폐하, 이번에 당에 조공사로 연개소문을 보내셨습니다. 신은 당에 보낼 국서에 강역도에 관한 답변이 담겨져 있지를 여쭙고 싶습니다."
국왕은 고돌기가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곤경 한 처지로 만들려는 의도로 꺼낸 말임을 알았다. 불쾌한 감정을 누르며 반문했다.
"국상이 그걸 묻는 이유는 무엇인가?"
"폐하, 신은 걱정되는 바가 여간 크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국상이 걱정을 할 일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폐하, 강역도를 보내게 된다면 복속을 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짐이 응한다면 잘 한 일로 보는가? 못한 일로 보는가?"
고돌기는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국상은 왜, 대답을 하지 않는가?"
"폐하, 신은 판단이 잘 서지가 않아서 그럽니다."
"국상은 판단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참견을 하려고 드는가?"
"폐하께서 내리시는 결정은 국가의 운명이 좌우되는 일이옵니다."
"물론이다. 국상은 짐이 어떤 결정을 내렸을 것으로 짐작하는가?"
"폐하, 신이 솔직하게 말씀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디 들어 보자."
"강역도를 보내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신 걸로 생각이 됩니다."
"그 말은 짐이 복속을 하는 쪽으로 생각을 하는 것인가?"
"폐하께서 국서를 보내신 걸로 반증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고돌기의 도전적인 답변에 국왕은 모호한 대답을 했다.
"강역도를 보내되 제대로 그려 보내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폐하, 제대로 그려 보내지 않는다고 하시면?"
"짐은 그렇게 할 생각이다. 됐는가?"
회의 벽두부터 국왕과 국상 간의 대립각을 세우자 좌중은 쥐 죽은 듯이 고요하기만 했다. 특히 상가들은 국왕과 고돌기의 대립 감정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는 판단에 추이를 지켜보게 되었다. 그런데 국왕을 물고 늘어질 듯한 기세를 보였던 고돌기가 꼬리를 내리는 말을 했다.
"폐하, 신은 우려될 점이 있지만 더는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려되는 점이 있으면 말을 하는 게 국상의 본분이 아니겠는가?"
"부정확한 강역도를 보냈다가 당이 알게 되면 어찌 되겠습니까?"
"저들이 와서 확인할 수도 없겠고 트집을 잡으면 맞설 뿐이다."
국왕도 그렇게 대답했지만 심경은 매우 복잡했다. 고다 당장 급한 일은 당의 위협이 아니라 보위를 노리는 반역자들을 물리칠 일이었다. 고돌기는 욕살들의 눈길을 의식하며 또 입을 열었다.
"폐하, 경력이 일천한 서부대인을 조공사로 보낸 것도 걱정입니다."
"짐의 생각은 다르다. 국가를 위하는 일에는 경력만을 위주로 한 인재 발탁은 좋지 않다. 서부대인은 약관에 지나지 않으나 능력 면으로 볼 때 이 자리의 어느 누구보다 못지않게 뛰어나다. 짐은 이번에 능력발휘를 제대로 하고 돌아올 것으로 보는데 국상은 무슨 불만이 그리도 큰가?"
국왕이 받아친 대답에 고돌기는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폐하, 요즘에 신라왕 김진평은 당에 사신을 자주 보내고 있습니다. 폐하께선 그러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를 혹시 짐작을 하시옵니까?"
"신라는 아국과 당의 사이를 벌어지게 만들려고 그럴 것이다."
"폐하, 신은 그 정도라면 말씀을 꺼내지 않았을 것입니다."
"짐도 이왕에 말이 나온 김에 국상에게 해야 할 말이 있다."
"페하, 어떤 말씀이시옵니까?"
"짐이 모르는 게 많다면 그건 국상이 제대로 보고를 않기 때문이다."
국왕의 지적을 받은 고돌기는 변명을 했다.
"신도 최근에 알게 된 일들을 미처 보고를 못 드린 게 있사옵니다. 아무튼 간에 신라의 태도가 매우 심상치 않은 점은 분명해졌습니다."
"매우 심상치가 않은 점에 관해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폐하, 당과 신라는 급속도로 밀착해 가고 있는 점입니다."
"국상, 짐이 그 정도도 모를 걸로 봐서 하는 소리인가?"
국왕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짐은 나름대로 대당 외교에 주력해 왔다. 그 일은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둔 편인데 국상은 부정적인 면만 부각을 시키려는 이유는 뭔가?"
"폐하, 신라는 전에 수양제에게 호응을 약속했으나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이 들어 선 뒤론 사정이 달라졌음을 아셔야 합니다."
"신라가 달라진 사정을 구체적으로 말해 보라."
"폐하, 신라는 당의 고구려 침공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연합 작전을 펼치기 위한 사전 조율을 하고 있다는 소문마저 퍼지고 있습니다."
"당과 신라가 사전 조율을 마쳤다면 그걸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국왕의 질문에 고돌기는 딴 소릴 했다.
"신라는 먼저 고구려에 대한 사단을 벌이고 그걸 당이 돕는 형식을 취해서 고구려 침공에 나설 것 같습니다. 신라가 먼저 사단을 벌이게 된다면 거긴 낭비성이 될 것입니다. 낭비성은 신라의 중원경을 견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신은 그만큼 중요한 성이라 방어력 강화시키기 위해 폐하께 병력 증강을 여러 차례 주청을 드렸습니다."
국왕은 고돌기가 낭비성을 또 쳐들자 그 의도를 알기에 대답했다.
"짐도 낭비성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나 그 지역 백성들은 신라에 대한 저항심이 커서 현재 병력으로도 충분하다."
고돌기가 또 무슨 말을 하려고 했으나 국왕은 손을 내저었다.
"짐은 그보다 동돌궐 쪽 사정에 관한 일을 듣고 싶다."
"폐하, 당은 너무 강성해진데 반해 동돌궐은 국력이 전과 같지 못합니다. 거기다 아국은 우방들이 줄어들어 고립무원의 처지가 되었습니다."
국왕은 그 말을 무시하듯 이번엔 상가들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대인, 근래 동돌궐 쪽 사정을 아는 게 있으면 말해 보오."
"폐하, 신은 근래 동돌궐 쪽 사정을 아는 게 별로 없습니다."
고돌기가 그 말을 받아 또 입을 열었다.
"폐하, 동돌궐이 저 지경이 된 건 두 명의 칸이 알력을 벌이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동돌궐은 곧 내란 상태로 접어들 것으로 봅니다."
"국상은 동돌궐이 왜 내란 상태로 빠져들 걸로 보고 있는가?"
"힐리 칸의 실정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날로 사치에 빠져들고 신하들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해 매일처럼 연회만 열고 있답니다. 그러니 장래가 암담할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도 우리가 희망을 걸 데가 있다면 신은 돌리 칸과 연계를 가질 필요성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고돌기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국왕이 힐리 가한 쪽인데 반해 자신은 돌리와 가까운 점을 모두에게 알리려고 유대관계도 강함을 은근히 부각을 시키려는 의도에 있었다.
"짐도 동돌궐이 분열상을 빚는 것을 크게 걱정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책임을 힐리 칸에게만 돌리는 것은 근본적인 이유를 모르는 소리다."
"폐하, 힐리 칸은 그동안 당을 위협해서 물화를 얻어내는 도적질 행위에만 만족해 왔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국의 군사력을 증강시킬 일은 소홀이 하면서 시기하는 돌리 칸을 누르려는 데만 힘을 씁니다."
고돌기는 말을 하고 의연한 표정을 짓는데 국왕은 고개를 저었다.
"짐도 당이 힐리 칸에 대한 압력을 키우고 있는 걸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동돌궐은 언제라도 대병력을 동원할 저력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짐이 추측을 하건대 당은 동돌궐을 먼저 제압하고 비수를 고구려로 돌릴 것으로 보지만 그 시기는 당장은 아니라고 본다. 그러므로 짐은 그 사이에 서둘러 대비책을 세울 계획이다."
"폐하께선 모르시는 점이 또 하나 있으십니다."
"짐이 모르는 점이 또 무엇이란 말인가?"
"동돌궐에 예속된 타 종족들도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입니다. 또 중원에서 오랜 내전을 겪는 동안에 동돌궐 백성들이 그 쪽으로 많이 흘러들어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의 상당수는 당의 용병으로 근무를 합니다. 그건 큰 문제가 아닐 수가 없는데 거기다 전쟁에 염증을 내는 동돌궐 백성들 또한 가축을 끌고 오지로 들어가서 숨는 형편입니다. 이래저래 힐리 칸은 대병력을 동원하긴 힘들게 되었습니다."
"국상은 그런 사정과 정보들을 어떻게 입수를 하고 있는가?"
"북부 욕살 을불리로부터 보고를 받습니다."
국왕은 하온장을 돌아다보며 물었다.
"하대인도 을부리로부터 그런 보고를 받고 있소?"
"폐하, 전혀 받은 바가 없습니다."
을불리는 고개를 떨어뜨리는데 국왕은 불황에게 시선을 돌렸다.
"동부 대인, 요즘 말갈족과 관계는 어떻소?"
"폐하, 말갈족과 교류도 전과 같지 않습니다."
불황의 대꾸를 듣고 국왕은 막연에게 물었다.
"막연, 그대 역시 동부 대인께 보고를 하지 않는가?"
막연도 고개만 수그릴 뿐이라 국왕은 길삼에게 눈길을 돌렸다.
"남부는 사정이 어떻소?"
"폐하, 남부 역시 다를 바가 없습니다."
길삼의 대꾸에 국왕은 연생수를 향해 입을 열었다.
"서부의 형편은 더욱 말할 게 없을 걸로 짐작이 가오."
"폐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런 대화로 장내 분위는 착 갈아 앉고 국왕은 작심한 듯 물었다.
"국상, 욕살들이 상가에게 보고를 않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고돌기는 자신이 막았던 일이었으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짐은 사정이 이렇게 된 책임은 모두 국상에게 있다고 본다."
국왕의 질타를 받고 궁지에 몰린 고돌기는 고두우에게 구원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고두우는 외면을 하고 국왕의 언성은 더욱 높아졌다.
"요즘 국상은 대대로 행세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린다. 그러면서 욕살들이 이런 지경이 되도록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이유가 무엇인가?"
고돌기는 대대로(大對盧) 행세를 할 만큼 세력이 커진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대로(對盧)라는 명칭이 생겨난 것은 광개토왕 때였다. 정복 전쟁에 나설 때 여타 부의 상가들도 직접 병력을 이끌어야 했었다. 대로는 병사를 지휘할 때 붙는 호칭인데 장수왕 이후론 세력이 강한 상가가 맹주 노릇을 마면서 대자를 하나 더 붙여 스스로 대대로가 되었다.
"국상은 상가도 아닌데 대대로 행세를 한다면 그 속셈은 뭔지 알고 싶다. 그건 짐의 신하가 아님을 강조하려는 태도로 볼 수밖에 없다."
국왕의 질타에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지고 욕살들도 고개를 떨어뜨리게 되었다. 다만 상가들만이 국왕과 고돌기를 번갈아 보며 사태의 추이를 예의 주시하는 눈길을 보냈다.
고돌기는 겨우 입을 떼었다.
"폐하, 죄송하옵니다."
"닥쳐라. 이게 죄송하다는 말로 그칠 일인가?"
국왕은 고돌기가 공공연하게 도전을 벌이게 된 데는 자신의 책임도 크다는 반성이 일었다. 아무튼 간에 고돌기를 더 이상 국상 직에 둘 수가 없고 내몰기 위해선 여타 부의 도움이 필요했다.
고돌기는 거센 질책을 듣고 정신이 번쩍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왕이 이렇게 나오는 데는 무슨 목적이 있을 것 같았다. 바짝 긴장이 되며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짐과 상가들이 타국의 사정을 깜깜히 모르게 된 것은 여간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타국과 교유하는 일마저 가로챈 욕살들은 상가에겐 일절 보고하지 않고, 국상 또한 짐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국상이 짐과 상가들의 눈과 귀를 가리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왕의 호통에 고돌기와 욕살들은 안색들이 변한 채 묵묵부답이었다. 이번엔 상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짐은 주자사를 맞은 연회석에서 뼈저린 고독감 속에 반성을 했소."
모두는 국왕의 말을 듣고 말없이 눈길을 보내게 되었다.
"수양제가 신하의 손에 죽은 지도 벌써 7년이나 되었소. 그런데 그의 무덤엔 풀이 자라지 못한다고 하오. 왜 그런지 아오?"
국왕의 말에 연생수가 대답을 했다.
"그악 무도한 자의 무덤이라 사람들이 풀이 못 자라게 뽑는답니다."
"맞소."
국왕은 대답하고 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수양제의 시호(諡號) 중 양(煬) 자는 하늘을 거역하고 백성들을 착취했다는 뜻이다. 양광은 색을 좋아하고 예의를 무시하고 사람을 파리 죽였다. 원한이 사무친 백성들이 무덤에 풀이 자리지 못하게 보복을 했다.
"양광은 마땅히 죄과를 깨닫고 감수를 해야 할 자인데 그러질 않았소.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더러 죽음을 당할 때도 오기를 부렸소. 자신은 남의 손에 죽을 수가 없다는 오기로 목을 매어 달라고 요구를 했소. 왜 그랬는지 짐작이 가는 게 있다면 누가 그 이유를 말을 해보오."
하온장이 입을 떼었다.
"무기로 목이 잘리는 죽음을 피하려고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그런 점도 있을 것이나 스스로 숨을 끊겠다는 오기 때문이었소."
"폐하, 스스로 숨을 끊는 건 어떻게 하는 것을 말씀하십니까?"
"양광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남의 손을 빌리려고 했던 것이요."
"스스로 목숨을 끊는데 어떻게 남의 손을 빌릴 수가 있겠습니까?"
"스스로 죽자면 스스로 숨을 쉬지 말아야 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는 일은 아니오. 때문에 남이 목을 조르게 만드는 도움을 얻으려고 했소."
모두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으나 이해가 될 듯 말 듯한 분위기였다.
"짐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수양제와 다르게 반성을 하겠다는 뜻이요. 왜냐하면 그동안에 권력을 독점하고자 고구려의 근간인 연맹체를 깨버리려는 큰 우를 범했음을 뒤늦게 후회를 하기 때문이요."
좌중은 국왕의 솔직한 말에 도리어 중압감 같은 것을 느꼈다.
"국가의 보위는 왕자나 왕족이 오르게 되오. 그러나 백성들보다 학덕이 많고 능력이 커서 되는 게 아니오. 제왕이나 백성이나 사는 방법도 생각하는 바가 다 비슷하기 마련이요. 때문에 국왕이 나라를 잘 다스리자면 현명하고 능력이 있는 신하들의 보좌를 받아야만 하오. 그런데 짐은 그걸 망각했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소. 그러나 짐에겐 다행스러운 점이 없지 않소.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오? 친구들과 같은 여타 부 상가들님이 있기 때문이요. 그 점을 뒤늦게 깨달은 짐은 상가님들과 국사를 논의해 나가려고 하니 동감이 되면 말씀을 해주기 바라오."
길삼은 국왕의 말에 진정성이 담겨 있다는 생각에 입을 열었다.
"폐하, 상가들을 친구로 여긴다는 말씀 진정을 느끼게 됩니다."
"진정성에 믿음성이 간다면 말을 더 하겠소."
국왕은 그때부터 상가들을 설득하려고 들었다.
"광개토왕이 영역을 크게 넓힐 수 있었던 것은 연맹체의 단합이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요. 그런데 짐은 연맹체를 해체하려고 들다가 종묘사직을 무너뜨릴 제왕이 될 뻔했소. 이젠 어리석음을 떨쳐내고자 상가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하오. 그러므로 상각님들은 나라를 위한 건의와 애로 사항들을 기탄없이 말씀을 해주시오. 북부 대인부터 듣고 싶소."
하온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폐하, 여타 부의 가장 큰 애로 사항부터 말씀을 드리겠니다. 여타 부는 전부 대외교역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욕살들이 직접 교역상단을 꾸려서 운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욕살들이 교역상단을 직접 운영을 하고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이요?"
국왕은 반문을 했지만 그 실상을 잘 알고 있었다.
"욕살들은 여타 부 주성에 주재하게 된 걸 기화로 하나 같이 돈벌이에 나섰습니다. 직접 상단을 꾸려 운영을 하며 여타 부 상단에 대한 심한 간섭과 방해를 해서 교역을 못하게 만들어 해체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짐은 그런 놀랍고 한심스러운 일이 있을 줄은 몰랐소?!"
국왕이 분개하며 반문을 하자 길삼이 입을 열었다.
"여타 부 상단은 대외 교역을 포기하고 관할지역 내를 도는 행상에 지나지 않게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욕살이 물품을 통제하면서 조달이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물품은 욕살의 상단에서만 구입을 하게 만들어 놓은 데다 너무 비싼 가격으로 구입을 해야만 해서 전혀 이익을 남길 수가 없어 잔사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말도 못 하게 수익이 줄어들어 여타 부는 전부 재정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불황도 그 말을 거들고 나섰다.
"그런가 하면 욕살 상단들도 대외 교역량을 크게 위축시켜 놓게 만들었습니다. 때문에 전보다 거래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국가의 전체적인 재정의 악화를 초래하는 결과를 빚게 되었습니다."
하온장은 그 말을 받아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했다.
"욕살 상단의 대원은 전부 병사들로 채웠습니다. 돈을 만지게 되자 병사들의 풍기가 극도로 문란해졌습니다. 또 상단에 들지 못한 자는 불평이 커지고 그로 인해 군의 기강이 무너져서 큰 걱정입니다."
국왕은 너무도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심하도다! 욕살들이 그 지경이라면 나라가 망하고 말겠다."
길삼은 그에 힘을 입듯 욕살들을 대놓고 비판하고 나섰다.
"폐하, 내부인 일만이 아니고 외부적인 문제도 심각합니다."
"외부적인 문제가 심각하다니 그건 뭘 말하는 것이요?"
"욕살의 상단들이 교역을 장악한 뒤로 유목민들은 고구려와 거래를 기피하려고 듭니다. 욕살 상단들은 유목민들과 거래에서 일방적 이익민 추구하려고 들어 공평한 거래가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건 여간 큰 문제가 아니로다! 그렇게 되면 전통적으로 유대가 강한 유목민들마저 고구려에 등을 돌려서 고립상태를 자초하게 되지 않는가?"
서부 우태인 연생수는 또 다른 문제를 제기했다.
"폐하, 그보다 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욕살들은 백성들에게 과도한 조세부담을 지우고 있습니다. 고통이 심한 여타 부 백성들은 백제와 신라는 물론 왜국 땅으로 떠나는데 그러다 붙잡히면 반역죄로 처형합니다."
"만약에 외침이라도 당하게 되면 맞서 싸울 백성들이 없게 되겠다!"
국왕은 답답한 마음에 주먹으로 가슴을 탁탁 쳤다.
고돌기와 욕살들은 여타 부 상가들이 쏟아낸 불평과 불만 속에 유구무언이었다. 국왕은 상가들의 반감을 여세로 몰아 고돌기와 욕살들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을 생각이었다.
"욕살들이 백성들에게 그처럼 과다한 조세를 부담시켰다면 중앙으로 올리는 많아져야 할 것인데 도리어 국고는 줄어들게 되었다. 이것은 욕살들은 전부 착복을 했다는 말이 되는 게 아닌가?"
국왕의 말에 고돌기와 욕살들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당의 침공을 면치 못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되면 수양제 때보다 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짐은 연맹체로 다시 단합하지 않고는 위기를 극복할 수가 없다는 판단에 이 자리에서 연맹체의 복원을 선언하겠다."
그 말에 상가들은 표정이 밝아졌으나 고돌기와 욕살들은 흐려졌다.
"짐은 당의 침공이 가까운 시일 내에 일어날 것으로 보진 않는다. 때문에 방비할 시간은 어느 정도 있다고 본다. 방비를 하자면 연맹체가 거국적인 단합을 이루지 않으면 안 되게 짐은 여러 상가들님의 협조와 동참을 호소하는 바요."
국왕은 말하고 파격적인 제안까지 했다.
"그동안 상가들은 국도에서만 살아야 하는 게 관례였소. 그러나 짐은 관할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 상가들이 주성으로 나가서 백성들을 직접 다스리고 통제할 수 있게 할 용의가 있음을 밝히겠소."
연생수가 그 말을 받아 입을 열었다.
"폐하, 그보다 욕살들을 어찌하실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짐은 욕살 직을 없앨 생각이요."
국왕은 그렇게 대답하고 제가회의를 끝냈다.
고돌기는 극도로 의기소침해진 채 집으로 돌아가야 만했다. 큰 위기가 닥쳤음을 깨닫고 불안한 심경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그런데 풀들이 죽은 욕살들은 국상의 집으로 모여들었다.
욕살들도 자신들의 직위가 없어지는 것에 맥 살이 빠지고 말았다. 권세도 재물도 한꺼번에 잃게 된 데다 목숨마저 위태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모두는 말들을 잃고 말았다.
두라문이 적개심에 찬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가 어느 틈에 상가들과 한 패가 된 걸 까맣게 몰랐다니?!"
"연맹체를 부활하고 욕살 직을 없앤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욕살들은 심각한 분위기 속에 설왕설래가 분분한 속에 고두우가 나타났다. 고돌기는 마치 구원이라도 받는 사람처럼 그를 반기며 물었다.
"대주부, 폐하가 무슨 말씀을 하신 건 또 없는가?"
"폐하께선 욕살들이 당분간 장안성에 머물도록 명하셨습니다."
"대체 그러는 이유가 뭔가?"
고두우는 난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폐하는 욕살들이 많은 재물을 축적한 것에 분노하십니다."
"재물을 축적한 게 무슨 죄가 그리도 크다고 그러신담?"
고돌기의 반문에 고두우는 또 다른 말을 꺼냈다.
"서부 우태가 요동성으로 돌아가게 되면 걱정은 더 커집니다."
"연생수가 돌아가면 무슨 걱정이 더 커진다는 말인가?"
"폐하는 욕살들이 축적한 재물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고두우의 대답에 욕살들은 일제히 흥분하며 떠들어 댔다.
"폐하가 우리 재물을 뺏으려고 드는 게 분명해!"
"폐하라고 해서 우리가 모은 재물을 빼앗을 권리는 없소."
"나는 결코 빼앗기지 않겠소."
고돌기는 과격한 반응을 보이는 욕살들에게 소리쳤다.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은 틀림없지만 그만들 소란을 떨게."
욕살들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더욱 와글대었다.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폐하의 명이라고 우리가 장안성에 주저앉아 있으면 큰일 나지!"
"우리가 무슨 힘을 못 쓰게 만들려고 잡아두는 것이니 벗어나야 해!"
"폐하가 여타 부 우태들에게 군령권을 돌리게 되면 끝장이야."
욕살들의 동요가 커지는 속에 불여래는 선동하는 말을 했다.
"막판에 몰린 우리로선 폐하를 몰아낼 수밖에 없소."
"그렇지만 무슨 힘으로 몰아낸단 말인가?"
"각자 끌고 온 병력만으로도 거사를 벌여야 하오."
고돌기는 욕살들을 가로막듯 외쳤다.
"각자 끌고 온 병력은 백여 명도 못되는데 어림도 없는 소리다."
욕살들은 조용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의 병력들도 성 밖의 둔막소(屯幕所)에 두어 쓸 수가 없으므로 주눅이 든 채 의견들을 나누었다.
"이것으로 우리는 끝장을 당해야만 하는 것인가?"
"우린 너무 안일에 빠졌다가 이런 지경을 당했어!"
"국상께선 하필이며 이런 때 우릴 장안성으로 불러들이셨습니까?"
욕살들은 모두 국상을 원망하게 되었다.
고돌기는 약삭빠르게 대처를 못한 자신의 실책을 통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욕살들을 분발시켜 맞서지 않으면 모두 죽음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기소침해진 욕살들을 끌고 거사를 할 마음을 먹었던 자신이 한심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사람들아! 한탄만 하고 있을 것인가? 왈가불가로 떠들어 봤자 소용없다. 냉정하게 마음을 도사려 먹고 폐하를 쓰러뜨릴 방도를 찾자."
고돌기가 용기를 북돋우려고 하자 두라문이 입을 열었다.
"국상께선 무슨 방책이라도 쓸게 있으시다면 말씀해 보십시오."
"우선 욕살들은 각자 임지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한다."
욕살들도 아닌 게 아니라 걱정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어떻게든 임지로 도망을 쳐야만 했다. 그러나 왕명을 어기고 몰래 성을 빠져나가려고 한다면 그냥 내버려 둘리가 없을 것이었다.
"도해선이 우릴 감시하고 있을 게 분명해!"
"감시를 당해도 성을 빠져나가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뾰족한 수가 없는 욕살들은 절망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탈출을 시도해 보자는 데로 의견을 모았다. 때마침 그믐께라 어두운 밤중엔 감시의 눈을 피해 성벽을 넘기로 했다.
고돌기도 마침내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욕살들은 내일 밤 각자 성벽을 넘어 빠져나간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서 준비를 해라. 이 시간 이후론 서로 간의 연락도 일체 끊기로 한다."
욕살들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각자 집으로 향했다. 고돌기는 혼자 남은 고두우를 붙잡고 무슨 얘길 장시간을 나눈 뒤 돌려보냈다.
한편 궁궐에선 도해선이 국왕에게 보고를 하고 있었다.
"폐하, 욕살들은 국상의 집을 나와 각자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자들이 앞으로 어떤 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보는가?"
"신의 예상으론 밤중에 각자 성벽을 넘어 도주할 걸로 봅니다."
"그들에 대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인가?"
"감시를 철저히 하면서 상황에 따른 대책을 세워 두었습니다."
"국상을 찾아간 대주부는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모르겠군?"
"폐하, 대주부도 곧 궁궐로 들어올 시간이 되었습니다."
"짐은 그대에게 전적으로 맡길 것이니 알아서 하라."
"폐하, 염려하지 마옵소서. 깔축없게 처리를 하겠습니다."
얼마 후 고두우가 궁궐로 들어왔다.
"대주부, 네 얼굴이 왜 그렇게 죽을상이 되었는가?"
"폐하, 국상이 반역을 일으킬 줄은 몰랐사옵니다."
"대주부는 그걸 알면서 어울렸을 사람이 새삼 무슨 소린가?"
국왕의 반문에 고두우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을 죽여주소서."
"그간에 짐을 잘도 속여 왔다만 그래도 널 고맙게 여긴다."
국왕이 흘려낸 비수 같은 말에 고두우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폐하, 그게 무, 무슨 말씀이시옵니까?"
"고돌기는 네게 국상 직을 제의했을 것이다."
고두우는 국왕이 불쑥 던진 말에 무릎을 풀썩 꿇고 말았다.
"폐하, 신은 잠시 분에 넘칠 욕심을 낸 죄는 죽어 마땅하옵니다."
"너는 고돌기의 꼬임에 빠져 반역에 동참을 했다. 하시라도 짐에게 비수를 꽂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질 못한 갈등이 컸을 것이다."
국왕의 말에 고두우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폐하, 신은 죽어 마땅하오나 살려주옵소."
"죽어 마땅할 자이나 짐은 죽이지 않겠다."
고두우는 멍청한 표정이 되어 국왕을 바라보기만 했다.
"짐은 고돌기를 국상 자리에서 내몰고 그대를 대신 앉히겠다."
"폐하, 제게 국상 자리를 내리시겠다고 하셨습니까?"
"그렇다. 사람은 살아가며 누구나 선과 악을 되풀이 짓게 마련이다. 그러나 짐은 선보다 악이 더 많았음을 반성하게 되었다. 선과 악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고 손바닥과 손등처럼 붙어 있어 손바닥이 선이라면 손등은 악이 되겠다. 손바닥을 많이 쓰면 삶이 편안해지지만 주먹을 쥔 손등을 많이 쓰면 삶이 고달파진다. 앞으론 손바닥을 많이 쓰려고 하는 짐을 도와주겠는가?"
고두우는 국왕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국왕은 그만 나가라는 손짓을 했다. 고두우는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며 억지로 편전에서 물러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도해선이 다가들었다.
"대주부님, 아니 앞으로 국상이 되실 분이지요."
"도해선,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고 너는 날 언제 죽일 것인가?"
"대주부님은 폐하로부터 무슨 말씀을 들으셨기에 그러십니까?"
고두우는 국왕의 말을 믿지 못함으로 도해선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도해선은 실실 터지려는 웃음을 억지로 참는 듯한 표정만 지었다.
"도해선, 날 죽이기 전에 가족들의 얼굴이나 한번 보게 해 주게."
"대주부님, 절 그만 떠보시고 정신을 차리십시오."
도해선의 대꾸에 고두우는 반문했다.
"죽을 사람이 정신을 차려서 뭘 하겠는가?"
"대주부님은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이행해 주십시오."
"무슨 일인가?"
"대주부님은 그전에 절 위해 약속을 하나 해주셨으면 합니다."
"자네를 위해 내가 무슨 약속을 한단 말인가?"
"대주부님이 국상이 되시면 절 폐하께 천거해 주셨으면 합니다."
"무슨 천거를 하란 말인가?"
"저는 대주부 자리를 이어받고 싶습니다."
고두우는 그 말을 듣고 긴가민가하던 의심이 조금씩 풀려갔다.
"자네가 대주부 자리를 잇고 싶다고?"
"아직은 힘들겠지요? 아무튼 간에 대주부님은 그 점을 유념하시고 언제 절 밀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제부터 여쭙겠습니다."
"내게 뭘 묻겠다는 것인가?"
"고돌기가 하려는 일과 계획을 전부 밝혀 주십시오."
"국상은 내일 밤 욕살들에게 성벽을 넘어 도주할 것을 지시했네. 욕살들은 각자 임지로 가서 병력을 끌고 다시 돌아오게 되었네. 국상과 나는 성문을 지키는 수비병들을 처치하고 병력을 안으로 끌어들이기로 했네."
"이번 일은 욕살들만 처리를 하면 간단히 끝나게 됩니다. 저는 욕살들의 도주부터 막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어떻게 막을 생각인가?"
"자는 되도록이면 도성 안에서 공공연한 충돌로 살상을 빚는 사태를 만들지는 않겠습니다. 모든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대주부님은 집으로 돌아가셔 편안히 주무십시오. 내일 아참 일찍 찾아뵙겠습니다."
고두우는 무슨 말을 더 할 게 없었다. 도해선의 말대로 무거운 발길을 끌고 집으로 향하면서 고돌기를 찾아갈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모든 게다 끝났다는 생각에 고개를 젓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이 밝았다.
밤새도록 한숨도 잠을 못 이룬 고두우는 궁궐로 다시 들어갔다. 국왕에게 절하고 부복했다. 국왕은 부드러운 음성을 흘려냈다.
"너는 어젯밤에 편히 잠을 이뤘는가?"
"폐하, 신은 지금도 정신이 혼미하고 등줄기엔 식은땀이 흐릅니다."
"너는 서푼 어치도 안 될 담력을 가지고 모반에 가담을 했단 말인가?"
국왕의 말에 고두우는 자신이 살아남게 될 것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폐하, 신의 목숨을 살려주신 은혜를 어찌 갚아야 되겠습니까?"
고두우가 더 떠보려는 말임을 아는 국왕은 대답했다.
"그대처럼 담력이 적은 자가 국상 직을 잘 수행해 낼지 모르겠다."
"폐하, 신은 시키시는 대로만 따를 뿐이옵니다."
"짐은 그런 걸 원하지 않는다. 네 스스로 할 일을 찾기 바란다."
"폐하, 신은 죽기로 노력을 기울이겠습니다."
"짐이 이번에 내린 결정으로 상가들의 위치를 회복시켜 놓았다. 이제부터 짐은 모두의 힘을 뭉쳐서 국가 발전의 동력으로 키우려고 한다. 그러나 왕실과 여타 부 간의 반목과 견제가 다시 일어나게 될 것이다. 너는 앞으로 상가들을 잘 다루고 협조가 잘 이뤄지는 일에 힘을 써라."
"폐하, 신은 혼신의 힘을 기울이겠으나 잘 해낼지는 모르겠습니다."
"고구려는 연맹체의 단합과 반목으로 성장해 왔으나 거기엔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부정적인 면도 있다. 그것은 언제까지나 상존하게 될 것이다. 때문에 조화가 필요한데 거기엔 서로 간에 양보가 있어야 한다. 짐은 그런 일에서 널 최적격 자로 보고 있으니 많을 연구를 하기 바란다."
"폐하, 신은 모르는 점이 많으므로 늘 폐하께 여쭙고 행하겠습니다."
"우선 이번 사태를 놓고 짐은 어느 한쪽만의 일방적인 승패로 끝나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 너는 항상 균형을 잡는 점을 염두에 둬라."
"폐하의 말씀을 명심하겠습니다."
"연맹체를 회복시킨 만큼 계루부의 내부 단합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짐이 고돌기와 네 목숨을 빼앗지 않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너는 무엇보다 계루부의 내부 단합을 다져나가는 일에도 힘을 기울여라."
"폐하, 신은 황공무지로 받들겠습니다."
고두우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감복의 눈물을 흘렸다.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고두우가 밖으로 나가자 도해선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대주부님은 지금부터 즉시 움직여 주셔야 하겠습니다."
"무슨 일로 내가 움직인단 말인가?"
"둔막소에 있는 욕살들의 병력을 서한만 염청으로 옮기게 하십시오."
"그렇게 해보겠네."
그날 저녁노을은 유난히도 서녘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여놓았다.
고두우는 둔막소로 나가서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조의들은 병력을 끌고 나와 함께 서한만 염청으로 이동한다."
조의들은 고두우의 명령을 놓고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따를 수밖에 없었다. 군관과 병사들도 무엇 때문에 이동하는지 모른 채 따라갔다.
어느 새 어둠이 내려지고 도해선은 왕실 검사단에서 선발된 부하들을 끌고 둔막소로 향했다. 한편 욕살들도 밤이 깊어가자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각자 성벽을 넘어서 나갔다.
욕살들은 도해선이 함정을 파놓은 것을 깜깜하게 모른 채 하나둘씩 둔막소로 모여들었다. 그러나 거기서 차례대로 목숨을 잃었다. 도해선은 욕살들을 전부 처치한 뒤 고돌기의 집으로 갔다.
고돌기는 도해선이 찾아오자 불길함을 직감했다.
"국상께선 저와 함께 궁으로 들어가셔야 하겠습니다."
도해선의 말에 고돌기는 묻지도 않고 순순히 따랐다. 궁궐로 들어가자 국왕은 술상을 차려놓고 앉아 있었다.
"고돌기 들어왔는가?"
"폐하."
"앉게, 짐의 술이나 한 잔 받게."
"폐하, 대주부와 욕살들은 어찌 되었습니까?"
"욕살들이 어찌 된 걸 왜 짐에게 묻는가?"
"폐하, 대주부도 죽이셨습니까?"
"고두우는 이제 대주부가 아니다."
"고두우가 죽었기 때문에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짐은 고두우에게 국상 직을 제수하기로 했다."
"폐하, 고두우를 신과 같은 반역자입니다."
"짐은 반역자들에게 관용을 베풀기로 했다"
"폐하, 신은 저승으로 떠나기 전에 술이나 한 잔 마시고 싶습니다."
고돌기는 스스로 술을 따라서 단숨에 술잔을 비워냈다.
"폐하, 죽음을 앞둔 신은 더 마셔야 하겠습니다."
국왕은 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는 고돌기에게 말했다.
"자네는 죽어 마땅하나 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겠지?"
"신이 바란들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하긴 저지른 간이 있는데 살기를 바랄 수는 없겠지!"
"폐하는 신이 살려달라고 빌면 살려 주실 분은 아니겠습니다."
"그런가? 그러나 자네가 진정으로 반성을 한다면 살려주겠다."
고돌기는 국왕의 말을 결코 믿을 수가 없어 또 술잔을 채웠다.
"폐하, 술이나 실컷 마시겠습니다."
"그렇게 하게나."
국왕은 말하고 직접 술병을 들고 따라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술잔을 쳐들고 건배를 청하자 고돌기는 마침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짐은 그대와 축배의 잔을 들려고 하는데 동참을 해주게."
"폐하, 신은 패자로 고별의 잔을 들겠습니다."
각자 술잔을 비워내고 국왕이 입을 열었다.
"짐과 그대는 같은 왕족이나 제왕의 운을 탔고 못한 사이일 뿐이다."
"폐하, 무슨 말씀을 하려고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댄 국상이 될 자격은 충분하지만 지나친 과욕을 부렸다."
"폐하, 죽음을 당할 사람을 놓고 그만 희롱을 하십시오."
"불쾌하게 생각을 한다면 그만하겠다."
"신은 술이나 실컷 먹고 취해서 죽겠습니다."
그때 고두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국상, 이리로 와서 앉게."
국왕의 말에 고두우가 무릎을 꿇고 앉자 고돌기가 입을 열었다.
"배신자!"
고돌기의 일갈에 고두우는 잠자코만 있고 국왕이 입을 열었다.
"고두우는 짐의 신하이다. 왜 배신자란 말이 나오는가?"
"폐하, 고두우는 신과 함께 반역을 도모했습니다. 같은 배신자임으로 함께 처형을 해야 하는데 왜 불공평한 처분을 내리신단 말씀입니까?"
"두 사람의 지나친 헛된 야망을 품었으나 고두우는 반성을 했고 그댄 반성하지 않는데 짐이 어찌 공평한 처분을 내릴 수가 있겠는가?"
국왕의 말을 못 들은 척 고돌기는 외쳤다.
"고두우 나쁜 놈, 더러운 배신자!"
고두우는 그런 욕설을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데 국왕이 말했다.
"고돌기는 국상이 된 고두우를 축하해줄 용의는 없겠는가?"
"폐하도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그대는 고두우를 국상 직에 앉히는 게 싫어서 그러는가?"
"폐하, 고두우를 국상에 앉히시면 목숨을 살려주는 게 아닙니까?"
"그렇다. 그대도 살고 싶다면 반성을 하고 용서를 빌라."
국왕의 말을 믿을 수가 없는 고돌기는 다른 대답을 했다.
"폐하, 고두우를 국상 직에 앉히면 또 배신을 당할 것이요."
"고돌기, 고두우는 그대와 다른 점이 있다."
"뭐가 다를 게 있겠습니까?"
"고두우는 죄를 뉘우쳤을뿐더러 국상 직의 제수를 사양했다."
고돌기는 이왕 죽을 몸인데 끝까지 숙이고 싶지가 않았다.
"폐하, 신이 마지막으로 간언을 할 게 있다면 고두우를 믿지 말기를 바라오. 폐하는 더 큰 위험에 처할 것이니 신과 함께 처형하소서."
"고돌기, 끝까지 뉘우칠 기미가 없군?!"
고돌기는 그 말에 비로소 의아감이 일어서 더듬듯 반문했다.
"폐하, 신이 뉘우친다면 그걸 진심으로 믿어주실 수가 있겠습니까?"
"짐은 일구이언을 않겠다. 그대의 진심을 믿겠다."
국왕의 대답에 고돌기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기만 했다. 한참을 그러다가 머리를 떨어뜨리고 기어드는 음성을 흘려냈다.
"폐하, 용서를 비옵니다. 부디 살려만 주옵소서."
고돌기는 몸을 일으키더니 사배를 올렸다. 국왕은 고개만 끄덕였다.
"폐하, 신을 살려주신다면 다시는 불측한 마음을 먹지 않겠습니다."
"좋다. 짐은 용서하되 고두우와 급이 다른 대접을 할 수밖에 없다."
"폐하, 다르면 신에게 어떤 대접을 하시렵니까?"
"고두우는 애초 살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그댄 살기를 바랐다. 짐은 죽음을 감수하려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똑 같이 대우는 하지 않겠다."
"폐하, 다른 대우를 하신다면 어떻게?"
"고돌기를 낭비성 성주로 나가서 그곳 방비에 책임을 져라."
"폐하, 신은 일국의 국상이었는데 낭비성을 맡기시는 건 좀."
"불복종이면 목을 베는 수밖에 없겠다."
"폐하, 신은 명을 받잡고 당장 떠나겠습니다."
고돌기는 급히 몸을 일으켜 허둥지둥 밖으로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