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강역도(疆域圖) (625)
화창한 봄날은 장안성의 활기를 더해 가고 있었다.
고구려는 대 수전을 승리로 이끈 뒤 명실상부한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건무왕도 중원에 새로 들어선 당(唐)과 대칭시킬 만큼 고구려도 대제국(大帝國)임을 은근히 과시하려고 했다.
건무왕은 중앙 집권을 집권을 시도하고자 독단적으로 여타 부의 주성(主城)들에 일방적으로 욕살(褥薩)을 파견해서 주재시켰다. 그 목적은 연맹체를 해체시키는 데 있었다.
여타 부들은 주성에 우태를 두어 각기 병력을 관리하고 통제해 왔는데 그중 병력의 지휘권을 욕살에게 빼앗겼다. 병력 지휘권을 상실하는 것은 모든 힘을 빼앗기는 타격이었다.
당은 중원의 새 강자로 등장하자 고구려를 복속시키려고 들었다. 거기다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방해로 중원과의 교류가 어렵다는 호소를 하자 당은 화해를 권하는 명목으로 사신을 보냈다.
건무왕은 당의 사신인 주자사(朱子奢)를 맞아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연회석엔 국왕을 위시해 국상인 고돌기, 대주부(大主簿) 고두우(高兜于)를 비롯해 여타 부 상가들과 욕살들이 죽 늘어앉다.
주자사는 건무왕보다 상가와 욕살들의 면모를 뜯어보고 분위기도 살피는 기색이었다. 당은 중원의 위상을 더 높이자면 무엇보다 고구려의 복속이 필요한데 그러질 않았다. 끝내 거부를 하면 정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은 먼저 동돌궐부터 멸망을 시켜 고구려와 연대가 끊어지게 만들려고 준비 중이었다.
건무왕은 수국에 이어 당 또한 침략의 야욕을 품은 걸 잘 알아서 난감하기만 했다. 침략을 막자면 어떻게든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해할 방도를 찾고 내부적으론 결속을 다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고두우가 먼저 주제넘게 입을 열었다.
"우리 대왕 폐하께선 당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계시오. 그러므로 당도 수국 때완 다르게 함께 화평을 누리며 발전해 나가길 바라오. 사신은 그 점을 각별히 황제께 건의를 해 주시오."
주자사는 그 말에 거드름을 피우듯 대답했다.
"먼저 대국의 황제 폐하께서 내린 조서부터 삼가 읽겠소."
--짐은 천명을 받들어 일월이 비추는 곳은 모두 편안하게 만들었노라. 무엇보다 요좌(遼左)를 지키는 고구려왕이 중국의 정삭(正朔)을 받들고 정성껏 직공(職貢)을 닦음은 가상하도다. 서로 사빙(使聘)을 통하고 강역을 보존해 나간다면 이보다 성미(盛美)한 일은 없겠노라.
주자사는 거기서 읽기를 멈추었다. 다음에 나오는 문구는 당의 우월적 지위를 너무 과시한 것이라 읽기엔 부적절하단 판단 때문이었다. 그만큼 고구려를 만만한 여길 생대가 아니란 생각에 그 부분은 건너뛰었다.
--수말의 잦은 병란은 양국의 인민이 많이 죽고 골육 간의 이별이 생기게 해 아내를 잃은 자와 남편을 잃은 자의 억울함과 고통이 심하다. 때문에 두 나라는 화친으로 상대국의 포로를 서로 돌려보냈다. 그걸 계기로 더욱 인서(仁恕)의 도(道)가 넓혀나가길 바라노라.
주자사가 읽기를 마치자 고돌기가 입을 열었다.
"양국은 무모한 전쟁의 피해를 뼈저리게 느껴야만 하오. 함께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인데 당의 사신은 그걸 알고 계신지 모르겠소?"
"내가 모를 게 뭐란 말씀이요?"
"나는 전쟁 후 양국이 교환했던 포로들의 숫자에 대해 말하고 싶소."
"그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하겠다는 것이요?"
주자사의 대꾸가 뻐드름해 국왕은 안색을 흐렸고 고돌기가 말했다.
"당시 수국과 포로 교환의 실상은 중원인 1만여 명과 아국인 1천여 명을 맞바꿨소. 포로 교환의 원칙은 1대 1인데 그걸 10대 1로 했던 것은 고구려가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음을 증명하는 게 아니겠소?"
주자사는 고구려를 복속시킬 속셈으로 왔는데 뜻밖의 말을 듣자 불쾌했다. 건무왕도 고돌기가 함부로 말을 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평소에 자신이 당과 화친을 맺기에 급급해 하는 걸로 봐 비꼬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고구려인에게 대수 전은 악몽이나 다름이 없었다. 전 국토가 피폐해져 백성들의 고통이 지금도 계속되고, 특히 막심한 피해를 입은 여타 부들은 삶의 터전을 복구할 노동력조차 부족한 형편이라 수국 포로들과 전쟁 과부들을 강제로 혼인을 시켜 정착을 하게 만들기까지 했었다.
고돌기는 국왕을 흘끔 본 뒤 속을 더 뒤집을 말을 이었다.
"당시 포로 교환은 매우 불공평했었소. 그 일을 놓고 귀국 황제는 매우 기뻐했다는 소문이나 그에 대한 감사를 표한 적은 없어 유감이요."
국왕은 고돌기가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만 하는 의도를 잘 알기에 화가 폭발할 지경이었다. 주자사도 대국의 체면을 깎는 말을 듣자니 비위가 상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국은 고구려에 그만한 보답을 이미 했지 않았소?"
"무슨 보답을 했단 말씀이오?"
"대국의 황제 폐하께선 귀국에 책봉을 한 일이요."
주자사는 그렇게 대답하고 건무왕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지난해 당은 고구려 국왕을 상주국요동군공고구려국왕(上主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에 책봉을 했다. 그러나 건무왕은 그걸 받은 뒤 지금까지 회답을 않고 내부적으로도 감춰서 신하들이 모르게 했다.
영양왕 때는 수양제로부터 책봉을 받았지만 즉각 거부를 했다. 그러나 건무왕은 복속은 하지 않았지만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당은 그걸 강박하고자 사신을 보낸 것이었다.
고돌기는 사뭇 반박조로 입을 열었다.
"책봉을 받았다는 건 나는 모를 소리요. 그런데 그런 일이 있었다면 아국만이 아닐 것인데 무슨 생색을 내려고 그런 말을 하오?"
주사자는 그 말을 받아쳤다.
"한삼국을 동시에 책봉을 했소만 고구려는 급이 높았소."
당은 한삼국의 왕들을 모두 주국(柱國)으로 봉했다. 그런데 고구려만 상(上) 자를 하나 더 붙였다. 그걸 숨기고 있었던 건무왕은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는데 주자사가 마침내 압박하는 말을 했다.
"대국엔 식화지가 있소. 그 책엔 중원의 산천 경계와 토산품의 산출 지역을 소상하게 밝혀놓았소. 고구려도 그 책을 보고 중원의 지리와 산물을 소상히 알 수가 있지만 대국은 고구려의 사정을 통 알 길이 없소."
주자사는 말을 끊고 좌중을 한번 살핀 뒤 말을 이었다.
"황제 폐하께선 이번에 고구려에 강역도를 바칠 것을 명하셨소."
그 말에 국왕과 신하들은 안색이 변했다.
당이 강역도(疆域圖) 요구하는 것은 도발을 전제로 한 협박이었다. 만약에 바치지 않으면 다음은 침공 수순을 밟겠다는 뜻이었다. 모두는 그걸 잘 알기 갑자기 얼어붙는 분위기가 되었다.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 가운데 건무왕은 얼버무리는 듯 대답을 했다.
"아국은 아직 강역도를 그려놓은 게 없소."
"자국의 지도를 그려놓은 게 없다니 그럴 수가 있습니까?"
주자사의 반문을 고돌기가 퉁명스럽게 받았다.
"아국의 강역도가 필요하면 귀하가 직접 그려 가면 되지 않겠소?"
"내가 직접 그려 갈 수도 있으나 혼자선 수년이 걸릴 일이요. 앞으로 1년의 기한을 정하겠으니 그 안에 그려서 보내주기 바라겠소."
건무왕은 당의 요구를 침공을 하겠다는 최후통첩처럼 느껴졌다. 신하들도 마찬가지라 당혹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특히 누구보다 당과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힘을 써온 국왕으로선 참담한 심경이었다. 이젠 굽히든 침공을 당하든 양자택일을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주자사는 그런 분위기를 즐기듯이 술잔만 기울였다.
건무왕은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직하고 겁이 없는 영양왕은 수양제에게 복속하지 않고 당당히 맞섰다. 그런데 자신은 그렇지가 못해 신하들에게 약한 군주로 비쳐지고 있었다. 전왕이 을지문덕 같은 유능한 신하의 보좌를 받았던 게 부럽기 그지없었다. 자신에겐 그럴 신하도 없어 내부적인 단합도 이뤄내기도 힘들었다.
"짐은 한번 생각을 해보기로 하겠소."
국왕은 그런 대꾸를 남기고 몸을 일으켜 연회장을 떠났다.
그것으로 연회는 끝나고 이튿날 도해선은 국왕의 부름을 받고 궁궐로 들어갔다. 어젯밤 한숨도 잠을 못 이룬 국왕은 얼굴이 푸석하기까지 했다. 도해선도 어제의 일을 잘 알아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 당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냈다는 소문입니다."
"그렇다."
"폐하, 연회를 파한 뒤 욕살들은 국상의 집으로 몰려갔습니다."
"거기서 무슨 얘기들이 오갔는지 모르는가?"
"국상 댁 하인을 통해 단편적으로 들은 게 있습니다. 모두는 당에 적개심을 드러내면서 한편으로 감히 폐하를 성토하는 말도 나왔답니다."
국왕은 당도 그런데다 고돌기와 욕살들 사이에서 불온한 공기가 돌고 있어 더 어렵게 되어 안팎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고 말았다.
"신은 솔직히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폐하께서 당의 책봉을 받은 사실을 감추셨기 때문에 그걸 두고 뭐라 지껄이는 자들이 많습니다."
도해선의 말을 듣고 국왕이 입을 열었다.
"짐이 용기 없는 군주라고 폄하를 하겠지. 그러나 그건 반만 아는 소리다. 국가의 운명과 직결될 사항은 간단히 결정을 내릴 수가 없다."
국왕이 요령부득의 말을 하자 도해선은 다시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대 수전 때 강화를 주장하신 일이 있어 새삼 비판을 받으시는데 끝내 강역도를 그려 바치게 되면 당에 굴복하시는 것입니다."
"짐이 당과 화평을 원할 뿐이다. 더욱이 수국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이 되어서 너무 어렵다. 당의 상비군이 수국 때보다 숫자는 훨씬 적지만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강군이다. 특히 기병을 대폭 증강시켜 전투력이 막강해진 만큼 우린 당분간 숙이고 힘을 기를 수밖에 없는데 그걸 모르고 맞서 겨루자는 주장만 펴니 답답하기 짝이 없을 노릇이다."
"국상이 특히 강하게 나가는 데는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무슨 이유란 말인가?"
"폐하께서 낭비성 병력을 줄이란 명령을 내리신 것에 국상은 크게 반발하기 때문입니다. 그 점에 대해 신은 감히 말씀을 드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국상을 더 이상 그대로 두면 안 되겠습니다."
국왕은 낭비성(娘臂城)에 관한 말만 나오면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근래 계루부 안의 공기가 더욱 불온해진 이유는 남방 방어의 중요 거점인 낭비성을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돌기는 그곳을 자신의 세력 발판으로 키우려고 해서 뒤늦은 조치를 취하려는 것에 반발을 했다.
국왕은 처음에 고돌기를 한낱 우둔한 무장쯤으로 알고 그를 앞세워 여타 부를 강압적으로 누르려는 목적에 국상에 앉혔던 것이었다. 그런데 음험한 자라 국상 자리를 이용해 자신의 야망을 달성하려고 들었다.
고돌기는 처음에 국력이 커지는 신라에 대비해 낭비성의 병력 증강을 건의했고 국왕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고돌기는 낭비성 성주를 자신의 측근들을 앉혀 다른 목적에 이용하려고 했다. 때문에 측근들은 차례대로 앉히고 연한이 차면 욕살로 추천해 나가게 만들었다. 때문에 무장들 사이에선 낭비성 성주가 되어야 욕살로 승진을 한다는 소문이 났다.
그것은 현재 욕살들의 면모를 보면 잘 알 수가 있었다. 두라문, 을불리, 막연, 불여래가 그들인데 모두는 낭비성 성주를 거친 고돌기의 심복들이었다. 고돌기는 그런 후원으로 욕살들을 장악하고 영향력을 키우게 되자 국왕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존재가 되어 갔다.
뒤늦게 위기의식을 느낀 국왕은 대책을 세우려고 했다. 그것은 고돌기와 갈등은 불가피해지게 만들 뿐만 아니라 그가 품은 야망의 달성을 당기게 만들어 당의 사신 앞에서 서슴없이 불량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국상은 측근들에게 폐하께선 용기와 대담성이 부족해 당과 화평만 추구하려는 한심한 태도만 보이신다는 지적을 자주 한답니다. 그러면서 심지어 나라를 제대로 지켜낼 수가 없게 될 것이란 말까지 했답니다."
국왕이 아무런 대꾸도 않는데 도해선은 조심스럽게 또 입을 열었다.
"폐하, 더욱이 국상은 욕살들에게 옥좌는 강한 인물이 앉아야 한다는 말도 하며 자신의 야심을 은근히 드러내는 태도까지 보였답니다."
국왕도 고돌기의 배반이 날로 무르익어 가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므로 그를 따르는 무장들부터 먼저 처리를 할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함부로 손을 댔다간 어떤 사태를 초래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도해선은 국왕의 그런 고뇌를 헤아리는 터라 강력히 건의를 했다.
"폐하, 국상의 독주를 더 이상 방치하지 마십시오."
국왕은 그 말에 동문서답을 했다.
"도해선, 내일 연개소문에게 궁궐로 들어오라는 명을 전하라."
"폐하, 연개소문을 왜 부르십니까?"
"그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할 게 있어서 그런다."
"폐하, 연개소문에게 무슨 임무를 부여하실 게 있으십니까?"
"당의 사신이 돌아갈 때 연개소문을 조공사로 딸려 보내련다."
"폐하, 관직이 없는 연개소문이 무슨 자격으로 조공사가 됩니까?"
"서부 대인 자격으로 가면 된다."
도해선은 그 말에 아연 놀라며 반문했다.
"폐하, 연개소문에게 상가직을 승계시키겠단 말씀이십니까?"
서부는 3년 전 연태조가 타계를 했다. 상가직 승계는 각 부의 고유한 권한이지만 연개소문은 아직까지 그 직을 승계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국왕의 반대 때문이었다. 국왕은 상가직 승계에 간여할 권한이 없음에도 연개소문의 성격이 포악하다는 이유로 막고 있었다. 그만큼 여타 부의 힘이 약화된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개소문은 여러 번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국왕은 듣지를 않아 속수무책이었다. 반면에 국왕은 중앙집권을 구축하고 강화하는데 연맹체가 걸림돌이라 그중에서 가장 강한 서부를 틀어쥐고 상가들을 통제하고 약화시키는데 힘을 써왔다.
상가들도 연개소문의 상가직 승계를 막는 게 월권임을 모르지 않으나 각자도생이 급급한 판이라 찍소리도 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다 연개소문이 양신과 여선을 중원 땅으로 도주시키는 걸 도왔다. 때문에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해 온 것만도 다행으로 여길 판이었다.
도해선은 그런 연개소문을 죽일 것을 수차례 권했던 입장이었다. 때문에 복권을 시킨다는 것은 말도 되지가 않아 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폐하, 복권을 시키려는 이유가 뭔지 말씀을 해 주십시오."
"너도 알만한 일인데 그걸 몰라서 묻는가?"
"폐하, 신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당의 침략을 받게 된 걸 모르느냐? 그걸 막기 위함이다."
"국인들은 폐하께서 이미 당에 굴복하신 걸로 알고들 있습니다."
도해선이 당돌한 말까지 했으나 국왕은 한숨만 흘려내었다.
"당은 수국보다 강하므로 어쩔 수가 없다."
"당이 아무리 강해도 수국 때처럼 거국적인 단합과 대항으로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다시 일치단결로 맞서면 충분히 막을 수가 있습니다."
"짐도 바라는 바이나 누가 그걸 이끌어 낼 수가 있단 말인가?"
국왕의 대꾸에 도해선은 속으로 본인이 할 일을 누구에게 돌리느냐고 반발하고 싶었다. 아무튼 간에 연맹체 해체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 온 국왕이 새삼 단합을 외지게 되긴 힘들게 되었다.
"짐이 단합을 시도해 본들 이반 된 여타 부가 따르려 하겠는가? 그 문제를 해결하는데 연개소문을 앞세우는 방법을 써볼까 하는 생각이다."
"폐하, 연개소문을 앞세운다고 무슨 해결책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국왕은 그 말에 또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연개소문을 해치려고 들 도해선에게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이젠 자신의 속내를 감추고 다뤄나갈 생각이었다.
"상가직을 잇게 해서 당에 국서를 전하는 임무를 맡기련다."
"폐하, 그런 임무를 수행할 사람은 많지 않습니까?"
"짐은 생각을 바꾸었다. 어렵겠지만 연맹체를 다시 부활시켜 내부 단합의 불씨를 살려야 하겠다. 당은 연맹체가 해체된 상태를 알고 있다. 때문에 연개소문이 사행으로 가면 당은 도발을 자제할 수도 있겠다."
고구려는 밖으론 당의 침략, 안으론 반란에 직면해 있었다. 국왕은 연맹체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멸망의 위기를 맞게 되고 만다는 판단에 연맹체를 복원해서 극복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폐하, 신은 연맹체 복원은 너무 늦었다는 생각입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 그러니 너도 짐을 적극 돕기 바란다."
국왕은 연맹체 복원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리고 그 일에는 연개소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도해선은 응할 생각이 없어 입을 꾹 다물고만 있었다.
"연두리 장군이 기다리고 있으니 함께 가서 연개소문을 데려 와라."
국왕은 명령을 내리고 눈을 감았다. 도해선은 할 수없이 그 자리를 물러나오고 말았다. 그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호위병 1백 명을 거느린 연두리와 함께 갈 수밖에 없었다.
연개소문은 두 사람이 찾아오자 놀라며 맞았다.
"두 분은 무슨 일로 여길 왔소?"
도해선이 대답했다.
"폐하께서 연개소문님을 부르십니다."
연개소문은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이 없는데 연생수가 물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로 부르신단 말인가?"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나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연개소문은 연생수의 얼굴을 바라본 뒤 반문했다.
"나쁜 일이 아니라면 무슨 일인지 말해 줄 수는 없겠소?"
"폐하께선 좋은 일로 부르시니 안심을 하고 입궐하십시오."
연개소문이 고개만 끄덕이는데 연생수가 경계심을 품고 말했다.
"내가 호위를 하겠소."
연생수가 그런 말을 하고 나서자 도해선은 안심시켰다.
"폐하께선 연두리 장군께 호위를 맡기셨으니 안심을 하셔도 됩니다."
그 말에 연두리는 조금 안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장안성의 수비 병력은 총 3천여 명이었다. 그건 계루부와 여타 부 병력들을 반씩으로 구성이 된 것이었다. 때문에 지휘를 맡은 장수도 2명이고 여타 부의 병력은 연두리가 지휘를 했다.
연개소문은 국왕이 연두리에게 호위 임무를 맡긴 것에 좀 안심이었다. 국왕이 그런 배려를 한 데는 자신을 안심시키려는데 있었다. 그런 판단을 내리고 즉각 따라 나서 왕궁으로 향했다.
국왕은 궁궐로 들어온 연개소문을 반갑게 맞았다.
"연개소문, 오래간만일세."
"폐하의 부름을 받고 신은 급히 달려왔습니다."
"짐은 그대에게 맡길 임무가 있어 불렀다."
"폐하, 신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려고 하십니까?"
"내일 당의 사신이 돌아간다. 그대가 동행을 하도록 하게."
"폐하, 신이 무슨 일로 당의 사신과 동행을 하게 됩니까?"
"당에 조공사 자격으로 간다."
"폐하, 신이 무슨 자격으로 조공사 임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서부대인 자격이다."
국왕의 대꾸에 연개소문은 매우 놀랐다.
"폐하, 그 말씀은 신이 상가 직을 승계하게 된다는 뜻입니까?"
연개소문은 반문하며 기쁨에 가슴이 마구 뛰었다.
"서부상가, 그동안에 짐을 많이 원망했을 것으로 안다."
"폐하, 황공합니다. 신은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짐은 한때 그대를 죽이고 싶기까지 했었다. 짐이 왜 그랬는지는 그대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이젠 서로 모든 사원을 털어버리기로 하자."
국왕은 솔직한 심경을 토로했고 연개소문은 무겁게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갑작스레 태도를 바꾼 것에 대한 의문을 풀을 수가 없는데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짐은 연맹체를 복구시키려 한다. 서부상가는 어찌 생각을 하는가?"
연개소문은 의아하게 여기며 대답했다.
"폐하, 신도 무엇보다 바라는 바입니다."
"서부상가의 생각이 그렇다면 그에 관한 의논을 하고자 한다."
"폐하, 그 의논을 신과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입니까?"
"짐은 수국 때보다 당의 침공을 더 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국왕이 솔직한 심경을 토로하자 연개소문도 수긍하는 말을 했다.
"신도 여간 심각한 사태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짐은 막아낼 힘도 없거니와 연대할 세력도 없다. 그렇다고 대내외적으로 연계와 단합을 이룩해 낼 인물도 없는 형편이다. 당은 고구려가 전쟁 복구에 허덕이는 사이에 북방의 새외 종족들을 회유하는데 힘을 기울여 왔다. 그 목적은 고구려와 새외 종족들 간의 관계를 소원해지게 만들려는데 있다.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
"폐하, 신도 같은 생각입니다."
"짐은 대수 전 때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자면 을지문덕과 양신이 떠오르게 된다. 두 사람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가장 큰 기여를 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가 없다. 특히 양신은 고구려만이 아닌 중원을 비롯해 주변국들까지 모두 인정을 하고 있는 전쟁 영웅이다. 짐은 그런 양신과 함께 큰 활약을 했던 연개소문도 거기에 낄 만하다고 본다."
연개소문은 자신을 치켜세운 국왕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짐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는 그런 인물들이 너무도 절실하고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을지문덕은 이제 없고 양신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게 되었다. 짐은 양신이 조국으로 돌아오게 만들고 싶다."
연개소문은 국왕이 그런 말을 하는 의도가 뭔지 궁금했다.
"폐하, 그 말씀은 진정이십니까?"
"진심이다. 양신이 돌아오게 만들 수가 있는 사람은 서부상가다."
"폐하, 신은 양신이 있는 데를 모르고 권해도 올 사람이 아닙니다."
"그럴 것이다. 그러나 짐은 양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폐하, 어떤 제안을 말씀입니까?"
"만약에 돌아오게 되면 고구려의 총병권을 맡기고 싶다. 앞으로 그가 당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기여를 한다면 국상 직도 맡기고 싶다."
연개소문은 그 말에 고개만 끄덕이는데 국왕이 말을 이었다.
"서부상가는 당의 내부 사정을 살필 겸 달리 알아볼 것도 있다."
"폐하, 어떤 일을 알아보라는 말씀입니까?"
"양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게."
"폐하, 신은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부상가는 당에 가서 양신을 만나게 되면 짐의 간곡한 뜻을 전하고 꼭 돌아올 수 있게 설득을 하는 중요한 임무도 부여를 하겠다."
"폐하의 명을 받들어 힘을 써 보겠습니다."
"이 일은 매우 중요하나 도해선이 모르게 해야만 한다. 그리고 서부상가는 당에서 돌아오는 길에 동돌궐도 들려서 오길 바란다."
"폐하, 양신이 동돌궐에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하지만 동돌궐의 힐리 칸도 만나야 한다."
"폐하, 신이 힐리 칸을 어떻게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
"서부상가는 전에 동돌궐에 가서 힐리 칸을 만난 적이 있지 않는가? 그때 도움을 준 흑발은 지금 만호장이 되었다. 흑발은 힐리 칸의 최측근이므로 그가 힘을 쓰면 가능할 일로 생각이 된다."
"폐하, 힐리 칸은 무슨 일로 만나게 됩니까?"
"고구려와 동돌궐은 매우 소원해진 관계가 되고 말았다. 그것은 양국에 다 같이 이로울 게 없다. 개선할 방법을 찾고자 함이다."
"신이 힐리 칸을 만난다고 그런 성과를 거둘 수가 있겠습니까?"
"그래도 힘을 써야 한다. 당의 강역도 요구는 침공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때문에 더욱 동돌궐과 연대할 필요성이 커졌다. 짐은 그에 관한 의논에 서부상가가 나서 준다면 효과가 클 것으로 생각된다."
"폐하, 신이 나선다고 효과가 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서부상가가 나서면 고구려의 내부 단합이 이뤄진 걸로 받아들인다."
연개소문은 그런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나 한편으론 당에 보내는 국서의 내용은 복속인지 거부인지 알 길이 없어 매우 궁금했다.
"폐하, 힐리 칸은 당에 복속하지 않은 걸로 생각됩니다. 신은 폐하께서 어떤 결정을 내리시냐가 동돌궐도 큰 관심을 가질 걸로 생각됩니다."
"짐은 힐리 칸의 반응을 알아내는 게 중요하다."
국왕이 애매한 대답을 한 데는 다른 속셈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고구려와 동돌궐이 연합이 이뤄진다고 해도 우위에 선 당의 힘을 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당이 강해진 이유는 이연의 아들인 이세민 때문인데 그는 이세민은 야심이 커 고구려를 침공에 앞장을 설 것으로 보고 있었다. 더욱이 그는 부친의 보위를 잇기 위해서 큰 전공을 세울 데를 고구려에 두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만 이세민의 잘 야심을 알고 있는 황제는 가까운 시일 내엔 고구려 침공을 원치 않을 걸로 보고 있었다. 때문에 황제의 환심을 살 일에 보다 치중을 하고자 힐리 칸의 도움이라도 받을 방법을 찾고 싶었다.
"폐하, 얼마 전 동돌궐 군은 당에 막심한 피해를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이세민이 그 전투는 주도했는데 그는 일찍부터 기병의 중요성을 알고 꾸준히 강화시킨 결과로 봅니다. 이세민이 대규모의 기병단을 키워 보유하게 된 목적은 고구려를 염두에 둔 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국은 어떻습니까? 기병은 절반 이상으로 줄어든 형편입니다."
국왕은 연개소문의 말에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대수 전이 끝나고 전쟁 복구가 시급해서 군마들까지 전부 사역에 투입을 시켜야 만했던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로 인해 군마들은 대부분이 못 쓰게 되고 남은 것도 관리할 인력 부족으로 대폭 줄어들고 말았다.
"짐도 군마를 늘리는 것을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로 여긴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동돌궐과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 서부상가는 그런 면도 유념해서 힐리 칸을 못 만나면 다른 방법이라도 찾아야만 한다."
"폐하, 다른 방법을 어떻게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호리소코루에 있는 돌리 칸을 은밀히 만나는 방법도 있다."
"폐하, 동돌궐엔 칸이 두 명씩이나 있다는 말씀입니까?"
"돌궐족은 형제간의 보위 승계가 원칙인데 근래에 와선 중원에 물이 들어 그 전통이 깨지고 부자간의 승계가 일어나며 그런 일이 벌어졌다."
국왕은 그런 대답을 하고 동돌궐의 내부 사정도 들려주었다.
처라가한은 아들인 돌리에게 보위를 넘겨주고 싶었으나 동생인 힐리의 세력이 너무 커서 뜻을 이룰 수가 없었다. 때문에 돌리에게 가한 칭호를 쓰게 하는 조건을 달아 힐리에게 자리를 넘기는 편법을 썼다. 그러나 처라가 죽자마자 힐리 가한은 돌리를 자신의 근거지인 동부로 내몰았다. 그런데 돌리가 관할하게 된 동부 지역은 군마 생산지로 유명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돌리로부터 군마를 얻는 교섭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국왕은 그런 당부와 함께 당에 보낼 국서를 내주었다.
"폐하, 신은 명을 성실히 수행하고 돌아오겠습니다."
연개소문이 국서를 지니고 집으로 돌아오자 연생수가 물었다.
"폐하께서 무슨 일로 부르셨는가?"
연개소문은 자신이 상가 직을 잇게 된 것부터 알렸다. 그러자 연생수는 너무도 기뻐 어쩔 줄 모르다가 엄숙한 태도로 말투마저 달라졌다.
"서부대인, 상가 직을 승계하게 된 것을 축하하오."
연생수가 존댓말을 쓰자 연개소문은 어색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삼촌, 갑자기 왜 존대를 쓰고 그러십니까?"
"이젠 상가님에게 마땅히 예를 갖춰야 하오. 만시지탄이나 이런 날이 오길 얼마나 기다렸는가? 그런데 폐하가 이런 결정을 내린 데는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에 대해선 아는 게 없소?"
"저는 국서를 지니고 당에 사행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당에 국서를 보낸다?"
"돌아오는 길엔 동돌궐도 들려 교섭을 하는 임무도 부여받았습니다."
"동돌궐에서 교섭할 임무는 무엇이요?"
"당의 침공을 공동으로 막는 연대를 모색해 보자는 것입니다."
"동돌궐과 연대를 모색한다? 그게 잘 될까?"
"삼촌, 저는 그보다 국서의 내용이 더 궁금합니다."
"나도 같은 생각인데 아무래도 강역도에 관한 게 아닐까?"
"저는 다른 쪽도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다른 쪽이라면 어떤 점을 말함이요?"
"폐하는 지금 국상에게 밀리고 있는 형편입니다."
"그 점은 누구나가 다 알고 있는 일이 아니오?"
"그 때문인지 폐하로부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니 그건 무슨 말이요?"
"폐하는 양신이 대수 전을 승리로 이끈 영웅이라며 조국으로 돌아오면 군사 지휘권을 맡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당의 침략을 막아내면 국상으로 기용을 할 수도 있다는 말씀까지 했습니다."
"정말로 뜻밖의 말이 아닐 수가 없군!"
"저는 폐하의 그런 말에 별 감동도 감흥도 느끼질 못했습니다."
연개소문의 말에 연생수는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폐하의 교활성은 끝을 모를 지경이라 조심에 조심을 해야 할 뿐이요. 지금은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어 갑자기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요. 상가 직 승계를 허락한 데도 무슨 꿍꿍이속이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우리도 방심은 금물이겠소."
"삼촌은 폐하가 어떤 꿍꿍이속을 품고 있을 것으로 보십니까?"
"한 마디로 여타 부의 도움을 얻고자 손을 내밀 것이요."
"저를 조공사로 당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당은 고구려의 연맹체가 해체된 걸로 보고 있소. 그렇기 때문에 만만히 보고 있소. 그걸 아는 폐하는 그 점을 불식시키고자 서부대인을 이용하려는 것이요. 서부대인이 당에 조공사로 간다면 그건 연맹체가 복원되었다는 증거가 됨으로 그걸 알리려는 속셈이요."
"당은 고구려 연맹체가 건재해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도 않소. 고구려는 연맹체가 가동되면 국력이 몇 배로 늘어나는 효과가 생기게 되오. 당도 그걸 모르지 않소. 다만 폐하의 국서가 복속 일지 거부 일지에 따라서 앞으로 상황은 달라지 게 될 것이요."
"복속 여부는 모르겠으나 저는 강역도를 바칠 걸로 봅니다."
"대인은 왜 그렇게 생각을 하오?"
"당은 아직 고구려와 전역을 치르길 꺼릴 걸로 생각됩니다. 폐하도 그 점을 알고 강역도만 바쳐서 어물쩍 넘기려는 속셈이 아닐까요?"
"아무튼 간에 사행 길에 나선 대인에게도 모든 게 잘 풀리길 바라오."
"폐하는 당을 다녀오는 길에 동돌궐도 들릴 것을 명하셨습니다."
"동돌궐과도 관계 개선을 모색해 볼 임무도 지우셨군!"
"폐하는 군마 공급을 타진해 볼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건 매우 중요한 일이므로 잘 되었으면 하오."
연개소문이 조공사로 당으로 떠난 이틀 뒤였다.
고돌기의 집으로 욕살들이 모여들었다. 국왕이 연개소문의 상가직 승계를 허락한 일로 모두는 너무도 놀란 분위기였다. 고돌기는 황당한 속에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울 의논을 하기로 했다.
두라문이 먼저 입을 열었다.
"폐하가 연개소문의 상가 직 승계를 허락한 이유는 알만합니다. 국상께 밀리는 처지라 여타 부에 협조를 구하기 위함일 뿐입니다."
"맞는 말이요. 폐하도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으신 것이군!"
"그렇다면 우리도 즉각 대책을 세워야만 하오."
모두가 한 마디 씩 하자 고돌기는 무겁게 입을 떼었다.
"폐하는 다급해진 나머지 반격에 나설 것이나 때는 늦었다."
두라문이 그 말을 받았다.
"국상께선 먼저 폐하의 속셈을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국상과 상의도 없이 상가 승계 결정을 내린 걸 따져야 합니다."
"그걸 따져서 뭘 하겠다는 말인가?"
고돌기가 대수롭지 않게 반문하자 두라문은 목청을 높였다.
"국상은 무슨 말씀을 하십니까? 연개소문의 상가 직을 있게 된 걸 걸어서 낭비성의 병력 증강 요구를 담판을 지어야 합니다."
두라문의 강경 발언에 고돌기는 비로소 말을 꺼냈다.
"나도 매우 심각한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음을 잘 알고 있다."
"매우 심각한 사태라니요? 국상께서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폐하는 대주부를 통해서 명령을 내리신 게 있다."
"어떤 명령을 내렸기에 그러십니까?"
"욕살들은 당분간 장안성을 떠나지 말고 머물란 명령이다."
그 말에 욕살들은 와글대기 시작했다.
"당분간 우리가 왜 장안성에 머물러야 합니까?"
"아무래도 폐하가 무슨 감을 잡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고돌기의 대답에 욕살들은 표정들이 굳어들었다.
"감을 잡았다면 폐하가 무슨 조치를 취할 것이란 말씀입니까?"
"폐하는 이삼일 내로 중신회의를 열기로 했다."
"무슨 일로 중신회의를 연다는 말씀입니까?"
"연개소문의 상가 직 승계를 추인하려는 의도로 본다."
고돌기의 대답에 두라문이 입을 열었다.
"그건 절대 반대로 없었던 일로 되돌려야 합니다."
"나는 승계 문제만이 아닌 다른 사유도 있을 것으로 본다."
"다른 사유가 있다면 무엇이란 말씀입니까?"
"폐하는 연맹체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속셈이다."
그 말에 모두는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맹체 부활은 욕살 직을 없애겠다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럴 순 없지! 어림없는 소리다!"
"암, 우린 결코 용납할 수가 없다!"
고돌기는 욕살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자 입을 열었다.
"폐하가 연맹체를 부활시키려는 목적은 여타 부의 세력을 회복시키는 데 있다. 그렇게 되면 욕살 직을 없애려고 들 게 분명해졌다."
"국상께선 연맹체 부활을 용납하실 생각입니까?"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서 그런 말을 하는가?"
고돌기의 반문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들은 심각했다. 그런 데다 국왕이 욕살들을 전부 장안성에 묶어두려는 의도가 뭔지 몰라 궁금증과 더불어 불안감이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욕살들은 모두 불안감을 금치 못하자 고돌기가 말을 이었다.
"폐하가 욕살 직을 폐지하려고 든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말에 욕살들은 더욱 위기의식을 느끼며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말을 한 목소리로 내었다. 그렇지만 큰 소릴 치면서도 난감한 표정들이었다. 고돌기는 그런 분위기를 살피면서 강한 음성을 내었다.
"나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겠다."
고돌기에 말에 두라문이 물었다.
"그렇지만 폐하가 하는 일을 우리로선 막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욕살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고돌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막아야 한다. 막는 길은 단 한 가지뿐이다."
고돌기의 말에 모두는 그게 반역을 일으키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두라문도 선동을 하듯 큰 음성으로 외쳤다.
"방법은 단 한 가지! 폐하를 옥좌에서 끌어내리는 방법밖에 없소."
두라문의 막나가는 발언은 분개하던 욕살들조차 차분해지는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다. 그만큼 사태의 심각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돌기는 이번 기회에 자신의 야망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었다. 쓸데없는 토론만 분분해선 별 소득이 없으므로 빨리 결단을 내릴 결심을 했다.
"거사에 돌입하는 길밖에 없다!"
마침내 반역을 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욕살들은 조용해졌다.
"그런데 문제는 병력이로다."
고돌기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변을 일으키자면 왕성 수비군을 제압해야 만 하는데 그럴 만한 병력이 없었다. 가장 많은 낭비성의 병력을 끌어올려도 2천 명이 못되는데 왕성의 수비군은 3천 명이었다.
"먼저 병력을 증강시킬 일이 급하다."
고돌기는 말하고 욕살들을 둘러보자 을불리가 입을 열었다.
"욕살들이 임지에 있다면 그만한 병력을 동원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선 그럴 수가 없는 처지들이라 막막한 심경입니다."
"각자 임지의 병력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만 한다."
고돌기의 말에 욕살들은 고개를 끄덕였으나 표정들은 난감했다. 왜냐하면 장안성에서 발목들이 잡힌 터라 불안하기만 했다. 거사는커녕 모두가 몰락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두라문이 입을 열었다.
"욕살들이 장안성을 빠져나갈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소."
"그렇소. 각자가 도주를 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겠소."
"안 되오. 도주는 위험을 자초할뿐더러 불가능한 일이요."
욕살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했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왜 해보지도 않고 그런 말들만 하는가?"
고돌기의 질타에 두라문이 대답했다.
"폐하에겐 도해선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는 그 말에 더욱 표정들만 어두워졌다. 도해선은 지금도 자기들을 감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움마저 일었다.
"암, 감시를 하고도 남을 자야!"
모두가 공포감에 젖어드는데 두라문이 입을 열었다.
"국상께서 응백라 장군을 포섭할 방법은 없겠습니까?"
"응백라를 포섭한다?"
고돌기가 중얼거리자 욕살들을 기대를 거는 기색들이었다. 왕궁 수비 병력의 절반을 지휘하고 있는 응백라가 마음을 세운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런데 고돌기는 한숨을 쉬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오죽이나 좋겠나?"
욕살들은 기대에 찼다 다시 어두운 표정인데 고돌기가 또 말했다.
"응백라에게 접근을 했다간 도리어 불리해질 수도 있다."
"국상께선 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응백라는 국상 직을 노리고 있는 자이기 때문이다."
고돌기의 대답에 욕살들은 두 눈들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응백라에게 접근하면 더욱 위험을 자초하겠습니다."
모두는 고개만 끄덕이는데 고돌기는 용기를 불러일으키고 했다.
"내일 우린 모두 중신회의에 참석을 하게 된다. 그 자리에서 상황을 더 살피고 나서 각자는 임지로 떠날 방책을 다시 찾을 수밖에 없겠다."
욕살들은 그런 결정이 내려지자 수군대었다.
"우린 중신회의에서 더욱 똘똘 뭉친 자세를 보여줘야 해!"
"암, 강경한 자세를 보여야 폐하가 겁을 먹게 돼."
고돌기는 그런 말이 나오자 손을 내저어 막았다.
"그래선 안 된다."
"왜, 안 된다는 말씀입니까?"
"폐하에게 반발하는 태도를 보여선 절대로 안 된다."
고돌기의 말에 모두는 의아한 표정들만 지었다.
"국상께선 왜 그런 약한 말씀만 하시는지 이유를 밝히십시오."
"우리는 시간을 벌지 않으면 안 된다. 폐하는 욕살들의 태도를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여 의심을 사지 않게 해야 장안성을 빠져나가는데 도움이 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폐하가 계속 막으려고 든다면 달리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탈출은 쉽지가 않다. 각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가야 한다."
"우리들도 무리수를 쓰는 건 위험만 자초할 뿐으로 생각합니다."
욕살들도 의기소침한 분위기가 되었다. 그걸 보면서 고돌기는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에 욕살들이 뿔뿔이 도망을 쳐 흩어지면 모든 책임을 혼자서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건 자신의 목숨만 위태해지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욕살 중 하나가 물었다.
"만약에 임지로 무사히 돌아간다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고돌기는 그 말에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각자 임지의 병력을 끌고 다시 장안성으로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내 명령이 있을 때까진 누구도 도주를 해선 안 된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