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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50. 철전

50. 철전

by 정완기

50. 철전(鐵戰) (624)



서라벌은 폭풍전야의 긴장감에 휩싸여 들었다.

지난해부터 환후가 잦은 진평왕은 자리보존을 하다시피 했다. 그로 인해 내물계는 국왕의 유고시 왕위 승계 대비 차 화백회의를 열 것을 주장하며 여론 조성에 나섰다.

왕실은 옥좌를 넘보는 내물계의 노골적인 압박 속에 백제와 왜국의 침공까지 받게 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락국을 재건할 구미와 분국(分國)을 시도하는 내물계의 대세(代世)가 반란을 일으켰다.

덕만 공주는 김용춘, 김서현과 더불어 대비책을 의논했다.

"공주님, 왜국 여왕은 침공에 적극성을 띠질 않아 병력 동원은 저조할 것으로 예상되나 철산지 확보에 혈안인 백제는 다를 것입니다."

김서현의 말을 김용춘이 받았다.

"나도 같은 생각이요. 왜국 병력은 1만이 못될 것이나 백제는 그 이상 동원할 걸로 봅니다. 백제와 왜국의 연합 침공을 받게 되면 우린 전선의 폭이 넓어지게 되어 어려움이 더 커질 수밖에 없겠소."

신라는 외부의 적을 막기도 힘든 판에 내부 반란까지 겹쳤다. 그런 이중고 속에 고구려마저 침공에 가담을 하게 된다면 멸망을 면치 못할 크나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덕만 공주는 사면초가에 빠져서 암담한 심경이었다. 김용춘마저 절망적인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라 역사상 이번처럼 큰 어려움에 빠진 적은 없었을 것이요."

"여인의 몸으로 전쟁에 관해선 문외한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타개책을 찾아보고자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공주님은 어떤 타개책이 있다는 말이요?"

"되도록 싸움을 적게 벌이는 쪽에서 해결 방도를 찾고자 합니다."

"전쟁에서 싸움을 적게 벌인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아국은 사방에서 적을 맞게 된 상황이라 전면전을 치르긴 여간 불리하지 않다는 생각이예요. 이런 때 다행이랄까 백제의 의자 왕자로부터 뜻밖의 서신을 받게 되었어요."

"백제의 의자 왕자로부터 서신을 받았다니 그게 사실입니까?"

김용춘의 반문에 덕만은 서신을 한 통 꺼내놓았다.

"두 분께서도 읽어보시고 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세요."

김용춘과 김서현은 서신을 돌려가며 읽은 뒤 다 같이 놀라움과 함께 의문과 복잡한 생각들을 하게 되었다.

"두 분은 이런 제의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 말씀해 주세요."

김용춘이 반문했다.

"공주님의 생각은 어떤 것인지 먼저 듣고 싶소."

"저는 거부할 수가 없는 제의라고 생각을 합니다."

"거부할 수가 없다면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철산지의 일부를 포기해서라도 어려운 사태를 수습해야 합니다. 그런 뒤에 후일을 기약해야 된다는 생각에 이미 답신을 보냈어요."

"어떤 답신을 보냈소?"

"의자 왕자가 원하는 대로 철산지를 넘겨주기로 했어요. 그 대신 백제가 동원할 병력을 1천여 명 이내로 한정시키는 조건을 달았어요."

김용춘과 김서현은 그 대답을 듣고 서로 시선을 마주쳤다. 백제가 요구 조건에 응할지는 미지수였다. 그러나 여인치곤 대담한 배포와 남자들도 어려운 큰 융통성을 지녔다는 생각들을 했다.

"위험한 점이 없지도 않으나 기대를 걸 수밖에 없겠습니다."

김서현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밝히자 덕만은 김용춘의 눈치를 봤다.

"일시 포기한 철산지는 나중에 되찾을 수도 있지 않겠어요?"

김용춘도 일단 내려진 결정에 희망을 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의자 왕자는 도움이 될 많은 정보를 제공한 데다 진정성이 담긴 제의로 생각되오. 다만 백제가 출동 병력 숫자를 지킬지는 의문이요."

"약속은 곧 알게 될 일이 아니겠어요?"

덕만의 말에 김서현이 동감을 표시했다.

"의자 왕자가 제공한 정보는 우리에게 여간 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런 정보를 제공해 주지 않았다면 우린 대세의 반역과 구미의 반란을 까맣게 모를 뻔했습니다."

김용춘도 동감을 표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에 백제와 왜국 간의 공동 전선이 깨어지게 된다면 우린 해볼 만하겠소. 그렇다면 합당한 작전과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겠소."

김서현도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백제의 침공은 육로를 택할 것이나 바다를 거치게 될 왜국의 침공로는 서라벌과 남가라 양 갈래로 침공해 올 것으로 예상이 됩니다."

김용춘도 그 말에 의견을 보탰다.

"내 추측은 백제는 남가라 쪽을 맡을 것 같고 왜국은 서라벌 직공에 나설 것 같소. 때문에 우린 동해안 방어에 더욱 치중해야 하겠소."

덕만도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백제는 철산지를 노리므로 일찌감치 내주면 거기서 공격을 멈추게 될 걸로 기대를 해 볼 수가 있겠어요. 두 분께선 서라벌 방어에 힘을 더 기울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면 동해안과 남가라 방어를 각기 나눠 맡을 일을 놓고 의논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두 장군은 공감하며 즉시 방위 분담을 놓고 의논을 했다. 김용춘은 서라벌 방어를 맡는 게 당연하게 여길 일인데 김서현이 남가라 쪽을 맡는 데는 문제가 있었다. 그 이유는 남가라 지역은 가락국 후예들이 사는 곳이고 김서현에 대한 반감이 컸다. 때문에 불리한 점이 있다는 판단에 서로 위치를 바꿔 맡기로 했다.

김서현은 귀당(貴幢), 법당(法幢), 서당(誓幢)의 병력과 화랑도를 합친 1만여 병력을 지휘해 서라벌과 동해안의 방어를 맡기로 하고, 김용춘은 상주(上州)의 병력과 각처의 병력을 최대한 끌어 뫄 남가라 지역에서 왜국과 내부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했다.

진평왕은 덕만의 요청대로 전국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구미는 남가라를 위시해 하주(下州)의 백성들이 서라벌에 대한 반감이 큼으로 기대감이 부풀었다. 대세의 반란 병력은 3천이 못 되지만 상륙할 왜국 병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세는 본래 왕위에 대한 야망을 품었던 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국왕의 견제를 받아 중앙관직을 얻지 못해 불만이 매우 컸었다. 때문에 구미의 접근에 쉽게 연계가 이뤄질 수가 있었다. 그런데 대세의 심복 장수인 눌최(訥催)는 반란을 놓고 심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왜국은 침공을 앞두고 신라의 내부를 정탐할 사신을 2명 보냈다. 한 사람은 여왕 쪽인 이와가네(磐金)였고 또 한 명은 우마코 쪽인 구라지(倉下)였다. 남가라 포구에 당도하자 구라지는 왜국 상관으로 들어갔고 이와가네는 서라벌로 향했다.

서라벌에 당도한 이와가네 국왕의 알현부터 청했다. 그러나 덕만은 환후를 핑계로 거절하고 대신 성대한 연회를 베풀었다. 이와가네는 연회석에 늘어앉은 신라 대신들의 분위기를 살폈다. 모두는 왜국의 침공 소식이 알려졌음에도 하나 같이 태평스러운 태도들이었다.

이와가네는 여왕으로부터 부여받은 특별 임무를 수행해야만 해서 왜전(倭典)을 담당하는 적성(積誠)에게 간청을 했다.

"적성님, 국왕 폐하를 꼭 알현하게 해 주십시오."

"폐하께선 요즘 외신의 알현을 일절 받지 않으십니다."

"왜 그러신단 말씀입니까?"

"왜국은 지금 축자주에서 신라 침공군을 모으고 있지 않소?"

적성의 냉담한 대답에 이와가네는 다른 말을 꺼냈다.

"여왕께선 신라와 우호관계를 매우 중요시하는 분입니다."

"신라도 마찬가지나 우마코 대신이 전쟁을 벌이려고 하질 않소?"

이와가네는 신라 국왕에게 은밀히 의논을 나눠야 하는데 뜻대로 되지가 않아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좌중은 자신을 정탐꾼으로 보는 눈길들이라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대신들은 이와가네를 의식하듯 목소리를 높여 대화를 나눴다. 그중엔 이와가네의 귀를 의심케 말이 있었다. 그건 백제에 철산지를 몇 군데를 넘기고 대신 이번 기회에 왜국을 정벌해 축자주를 점령하자는 말이었다.

연회를 파하고 이와가네는 숙소로 들어갔다. 그는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고 돌아가게 될 것 같아 잠이 오질 않았다. 그런데 이슥한 밤에 김춘추의 방문을 받게 되었다.

이와가네는 구원을 받는 심경이었다. 김춘추는 왜국의 신라계 사람들과 유대가 넓고 많은 도움을 줘서 통하는 데 있는 상대로 보고 있었다.

"전군님, 잘 오셨습니다. 그렇잖아도 내일 찾아뵈려던 참입니다."

"길사님은 연회에서 대접을 잘 받으셨습니까?"

"잘 받았습니다만 연회석에선 이상한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무슨 얘길 들으셨기에 이상하단 말을 하시오?"

"신라는 이번 기회에 왜국을 치자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아국 여왕께선 전쟁은 반대하시지만 신라에 그만한 힘이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길사님은 신라가 고구려와 굳건히 대치하고 있는 것을 모르시오?"

"신라의 국력이 신장된 건 인정하나 이번엔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까?"

"길사님은 신라를 걱정하기보다 조국을 걱정할 일이 아니겠소?"

김춘추의 반문에 이와가네는 그만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제가 신라에 온 것은 여왕님이 부여하신 임무가 있기 때문입니다."

"길사님은 정탐 임무를 지니고 오지 않았소?"

"전군님, 저를 정탐꾼으로만 보시지 마십쇼."

"그걸 감춘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닌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소?"

"제가 신라에 온 목적은 여왕의 뜻을 전하려는데 있습니다."

"여왕의 뜻이라니 한번 들어나 봅시다."

"전군님은 쇼토쿠 섭정과 양국의 우호관계를 두텁게 다지신 분입니다. 여왕께선 이번 전역을 반대를 하시나 우마코 대신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것임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나도 그 점은 모르지 않으나 일은 이미 터졌지 않소?"

김춘추의 대꾸에 이와가네는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왕께선 무모한 전쟁을 막고 양국 왕실의 번영을 바라십니다."

"나도 바람직한 일로 여기오. 그런데 우마코는 축자주에 새 왕조를 세운다는 소문이 났소. 그 때문에 여왕께선 심려가 매우 크시겠소?"

"그렇습니다. 우마코는 왕위를 노릴뿐더러 신라도 넘보는 자입니다."

"하긴 그런 자가 축자주에 나라를 세우게 되면 양국은 다 같이 여간 큰 골칫거리가 아니겠소. 때문에 신라는 차제에 축자주를 차지해서 큰 화근을 미리 막자는 여론이 분분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이요."

"백제도 신라 침공에 가담을 했는데 그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오. 백제는 신라 침공을 포기했소."

"백제가 침공을 포기했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말씀입니까?"

"신라는 서부 철산지 중 일부를 백제에 넘겨주는 걸로 막았소."

"서부 철산지를 넘겨주었다는 게 사실입니까?"

"그렇소. 대신 신라는 축자주를 점령하면 더 큰 이익이 되오."

이와가네는 김춘추의 말을 믿어야 좋을지 모르겠으나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볼 수도 없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이번 신라 침공은 더욱 무모한 일이 되고 말겠다는 생각이었다.

"전군님, 여왕께선 우마코의 뜻을 꺾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병력을 내었으나 그렇게 하신 데는 다른 계획을 숨겨놓고 하신 일입니다."

"다른 계획을 숨겨놓다니 그건 무슨 말씀이요?"

"여왕께선 우마코가 축자주에 나라를 세우는 걸 막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 때문에 이번 전쟁을 이용해 우마코를 몰락하게 만들 방법을 찾고 계십니다. 바로 그 일에서 신라의 도움을 받고자 하십니다."

"우마코의 몰락시키는데 신라의 도움을 얻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는데 아국에 무슨 도움을 청할 게 있다는 말이요?"

"전군님도 구체적인 계획을 들으시면 공감이 가실 것입니다."

"무슨 말인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이건 우마코의 병력이 출병을 전제로 하는 계획입니다."

"출병을 전제로 하는 계획이라?"

"여왕님과 우마코의 병력은 출병을 해도 서로 경계를 할 뿐 협력 관계는 이뤄지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양쪽은 신라 침공 목표는 같아도 움직임을 각기 달라질 것이므로 거기서 방법을 찾으면 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을 찾겠다는 것인지 듣고 싶소."

"신라 침공을 양 갈래로 하게 만드는 방법이 있습니다. 한쪽은 동해안에 상륙해 서라벌을 직공하고 또 한쪽은 남가라에 상륙해 신라군의 분산을 유도하는 작전을 쓰는 데서 방법을 찾자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다는 생각인데 더 구체적으로 듣고 싶소."

김춘추의 말에 이와가네는 빙긋이 웃고 말을 이었다.

"여왕께선 이번 기회에 우마코의 병력이 신라 땅에서 큰 타격을 받게 만들려고 하십니다. 신라군에 의해 궤멸을 당하게 만들기 위해 모든 정보를 제공하며 신라에 협력을 할 계획이십니까?"

"우마코의 병력을 궤멸시켜 자멸하게 만들자는 뜻이군요?"

"그렇습니다. 우마코 병력을 신라군이 섬멸시켜 줄 것을 바라십니다."

김춘추는 한동안 생각을 한 끝에 입을 열었다.

"우마코의 병력은 대략 얼마쯤 되오?"

"우마코 쪽은 5천여 명이고 여왕님 쪽은 4천 가량 됩니다."

"그렇게 만들기 위해 구체적인 작전을 세운 게 있소?"

"여왕님 병력은 출병을 해도 전투엔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라군은 오직 우마코 병력만 집중적으로 공략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자면 우마코의 병력을 동해안에 상륙하게 만들어야 하오. 그래야 섬멸이 가능한데 그렇게 만들 수가 있을지 모르겠소?"

"왜 동해안에 상륙해야 완전 섬멸이 가능하단 말씀입니까?"

"남가라에 상륙하면 구미나 대세의 반군과 협력이 이뤄져 불리하오. 관계를 끊어놔야 섬멸이 쉬워질 수가 있다는 말이요."

"동해안에 상륙을 하게 만드는 게 뜻대로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이와가네의 대답에 김춘추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신라도 여왕이 바라는 대로 만들고 싶소. 큰 위기를 행운으로 바꿔놓자면 우마코의 몰락은 필수적인 일이요. 길사님이 한번 해보시오."

김춘추는 고개만 끄덕이는 이와가네에게 다시 말했다.

"남가라에 와 있는 구라지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소."

"구라지 역시 이번 전역을 그리 내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 자를 앞세워 우마코 쪽 장수들 마음을 움직여보면 어떻겠소?"

"구라지를 이용해 본다? 하긴 우마코 쪽 장수들도 마지못해 침공에 나선 자들이 많아서 전투에 별 열의를 보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전군님의 말씀대로 한번 해 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마코의 장수들을 설득하기 전에 먼저 감안해 둘 점이 있소."

"전군님, 어떤 점을 감안하라는 말씀입니까?"

"신라는 백제군과 내부 반란을 소탕하기 위해 전 병력을 남가라 쪽에 투입을 했다. 때문에 남가라 쪽의 전투는 치열하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해안 쪽은 상대적으로 병력이 적을 것이라고 설득해 보시오."

"전군님의 말씀대로 동해안 쪽으로 유도하면 먹혀들 것 같습니다."

"나는 길사님에게 금덩이를 두 개 내드리겠소."

"전군님은 왜 금덩어리를 두 개씩이 내주겠다고 하십니까?"

"하나는 길사님 몫이고 또 하나는 구라지를 설득하는데 쓰시오."

김춘추는 이와가네에게 또 다른 조언도 했다.

"구라지에게 이런 얘기도 해 보면 어떻겠소? 신라는 금을 많이 생산하기 때문에 서라벌의 왕궁을 비롯해 귀족들은 상당량의 금덩이를 보유하고 있다. 서라벌을 함락하면 많은 금을 노획할 수가 있다. 그런 말을 들으면 우마코 쪽 장수들을 동해안으로 유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요."

"저도 전군님의 말씀은 효과가 클 걸로 생각됩니다. 서라벌은 방위 병력도 적은 데다 금덩이를 노획할 수 있다면 마음들이 흔들릴 것입니다."

"길사님, 마음을 정했으면 이 밤으로 떠나시오."

김춘추는 금덩이를 2개를 내주고 구라지를 말에 태워 병사들의 호위를 받게 하며 남가라로 향하게 만들었다.


백제는 의자에 의해 출병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목돈 부자가 제거된 뒤로 사진은 새상 왕자를 자기 집에 두고 두문불출이었다. 극도로 위축된 6가도 와해 상태나 다름없게 되었다.

8가는 백제의 건국 전에 마한(馬韓)의 소국(小國) 왕들이었다. 모두 백제에 흡수를 당한 뒤 신하들로 전락한 가문들인데 이젠 6가로 줄었다. 무왕은 의자에게 병관좌평의 업무까지 대행하게 했다.

의자는 6가로부터 병력을 동원하는 관행부터 깨뜨렸다. 지방의 태수들에게 직접 병력을 동원할 것을 명령했다. 그에 따라 전국에서 6천여 병력을 모으게 되고 거기에 왕궁 수비병 1천을 보태기로 했다.

신라에서 온 회신으로 자신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을 알게 되자 출병했다. 그러나 진군하는 행군 속도를 느리게 했다. 이미 출병한 왜국 병력이 신라 상륙이 이뤄진 뒤 국경을 넘기로 했다.

왜국 병력은 김춘추와 이와가네의 모의대로 성공을 거둬서 우마코의 병력은 동해안으로 여왕의 병력은 남가라로 향하게 되었다. 그런데 동상이몽의 양측 장수들은 전쟁을 꺼리는 점은 마찬가지였다.

백제군은 금마저(金馬渚)에 이르자 행군을 멈추었다. 그곳엔 선화공주의 무덤이 있었다. 의자는 모친의 무덤 곁에서 사흘간을 머물며 백제 선단을 이끄는 마립의 보고를 기다렸다. 마침내 왜국의 병력이 신라의 동해안과 남가라에 상륙 작전을 편다는 보고를 접했다.

의자는 병력을 발진시켜 섬진강(贍賑江) 상류에 이르렀다. 거기선 덕만 공주의 요구대로 1천 병력만 거느리고 도강을 했다. 5천 병력은 윤충에게 맡겨 백제 영토에서 대기하게 했다.

신라의 첩보병들은 백제군 1천 명이 도강한 것을 상부에 보고했다. 그 보고를 받은 김춘추는 열기를 시켜 속함, 기잠, 용책성의 병력을 철수하게 해서 모두 기현성으로 옮기게 만들었다.

계백은 백제군 선봉장으로 1천 병력을 이끌고 신라의 야철소가 표시된 지도를 보며 국경에서 젤 가까운 속함성으로 진군했다. 도착해 보니 뜻밖에도 성문들이 열려 있고 지키는 병사들이 없었다. 백성들에게 그 사정을 물어보았더니 야장들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여서 성병들이 성을 떠났다는 모호한 답변만 듣게 되었다.

백제군은 싱겁게 속함성을 점령하자 여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다. 계백은 성을 점령하고 사정을 보고했다. 그러자 의자는 속함성에 소수의 병력만 주둔시키고 기잠성으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기잠성의 사정도 속함성과 똑같았다. 불로소득으로 2개의 성을 점령하고 난 계백은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진군을 중지하고 의자에게 이상하다는 보고를 했다.

의자는 덕만 공주와 약속을 비밀에 부치고 있었다. 그걸 밝히지 않고 무조건 용책성으로 진군할 것을 명했다. 계백은 신중을 기하고자 정찰병으로 먼저 용책성을 살폈다. 그랬더니 용책성마저 신라군이 철수를 했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백제 병사들도 전투도 없이 2개의 성을 점령하게 되자 이상하게 불감함 같은 것에 젖어드는 분위기가 되었다. 더욱이 점령한 성은 성벽을 제대로 갖추고 있어 방비가 충분한 데도 신라군이 버리고 떠난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도리어 불편한 마음들이 되었다.

계백은 마침내 3개 성을 전부 점령했다. 그제야 의자는 용책성으로 왔다. 거기서 기현, 앵잠, 봉잠성은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다. 그동안 파악한 바로는 나머지 3개 성은 성벽을 쌓고 있던 중이었다. 때문에 방비가 재대로 이뤄지기는 힘든 상태였다.

의자는 비로소 진격을 멈추게 했다. 상상을 못 할 불로소득의 전공을 세운 터였으나 장수나 병사들처럼 불감 같은 것은 느끼지 않았다. 그 대신 방비에 힘을 쓸 생각을 하며 한편으론 그 지역의 신라 백성들의 동태와 분위기를 살피는데 힘을 썼다.

한편 동해안에 당도한 왜국 선단은 상륙 작전을 놓고 내분이 일어났다. 그 이유는 대부분의 장수들이 상륙을 꺼려하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병력을 총지휘하는 마리세는 난관에 처하고 말았다.

구라지는 장수들을 적극 설득한 결과 동해안으로 오게 만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상륙 여부는 권한 밖의 일이었다. 때문에 마리세는 물론 장수들에게 빠른 공격을 주문하고자 극도의 위기에 처한 신라의 사정을 아리며 상륙을 적극 채근했다. 또 서라벌을 점령하게 되면 많은 금덩이를 손에 넣을 수가 있다는 말도 했다. 그렇지만 주저하는 장수들이 많아서 마리세는 끝내 군법으로 처단하겠다고 위협을 가해 겨우 상륙을 시켰다.

이때 신라군 1만여 명을 거느린 김서현은 산속에 숨어 해안에 상륙하는 왜국 병력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상륙한 왜국 병력은 해안가에 자리를 잡듯 멈춘 뒤 더는 움직이질 않았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신라군 특공대가 움직였다. 크고 작은 수십 척에 기름과 마른 장작을 싣고 어둠 속에서 왜국 함선들로 몰래 접근해 들었다. 그런 뒤 기름을 ane인 장작에 불을 붙여 왜국 함선 속으로 마구 던져 넣었다. 뒤늦게 놀란 선원들은 불이 붙는 배안에서 당황해하다 하나둘씩 물로 뛰어들어 해안에 올랐다.

여왕의 병력도 남가라에 도착했으나 상륙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장수들은 새삼 신라 침공을 놓고 득실을 따지는 토론을 했다. 전체적으론 전쟁을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이번 출정은 생각해 볼 점이 많소. 목숨을 걸고 가락국을 재건해 준들 존속되긴 힘들 것이요. 도리어 백제에게 좋은 일을 시킬 엉뚱한 결과만 빚을 것인데 우리가 위험한 상륙을 꼭 해야만 하겠소?"

"맞소, 성공을 거둔다고 해도 우린 백제에 더 굽실거리게 되오."

장수들은 여왕의 뜻을 알기에 하는 말이나 일부러 병사들이 듣게 만들려고 목소리를 놓여서 떠들어 대었다.

"구미가 임나국을 세우게 만들어 준다고 우리는 철정을 거저 얻게 되질 않소. 그럼에도 인명을 희생시킬 전투에 참가할 이유가 무엇이요?"

왜국 병사들도 그런 말을 듣고 호응하는 분위기였다. 이번 출병이 우마코의 야욕 때문임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실익도 적고 성공할 가능성도 적은 전투에 목숨을 잃고 싶은 자는 없었다.

반면에 구미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이제나 저제나 왜국 병력의 상륙을 기다렸지만 도착한 지 사흘이 넘도록 상륙할 기미가 없어 배에 올라가 장수들을 만나 사정을 알아보았다.

"장졸들이 싸울 의욕을 보이지 않아 상륙할 수가 없소."

구미는 말도 안 될 소리를 듣고 기가 막혔다. 그러나 설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백제군 2만이 국경을 넘어 신라의 여러 성들을 격파했고 서라벌 쪽으로 계속 진군할 것이라며 상륙을 독촉했다.

"신라 정복은 시간문제이니 빨리 상륙을 해서 합동 작전을 펼쳐 승리를 거둘 수가 있음을 장담하오. 당장 상륙 명령을 내려 주시오."

왜국 장수들은 구미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질 않았다.

김용춘은 겨우 5천 여 병력을 모았으나 남가라에 당도한 왜국 함선의 동태만 살릴 뿐 해안으로 나가질 않았다. 그보다 반란을 일으킨 대세의 주력 병력이 있는 기현성만 주시하고 있었다.

반면 기현성을 지키는 눌최는 마음의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상관인 대세가 나라를 세우면 자신은 공신으로 출세를 하겠다는 욕심에 반란에 동조를 했다. 그런데 백제군은 더 이상 진군을 않고 남가라에서도 왜국 병력이 상륙하지 않아 반란은 허사로 끝날 것 같았다.

기현성의 병력은 속함, 기잠, 용책에서 후퇴해온 병력까지 합쳐 3천여 명이었다. 대세로부터 백제군과 함께 김용춘의 병력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는데 내부적으론 병사들의 동요가 심해졌다.

기현성은 성이 큰 편이나 성벽을 쌓고 있던 중이었다. 성벽은 어느 정도 꼴은 갖추었지만 성문을 미처 달지 못한 상태였다. 임시방편으로 목책을 세워서 성문을 막아놓은 상태였다.

대세도 남가라에 왜국 병력이 상륙하지 않아 불안감이 커졌다. 만약에 그대로 돌아간다면 반란자인 자신은 죽음을 면치 못했다. 야망 때문에 임나국을 세우려는 구미에게 동조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락국 후예들인 백성들은 은근히 기대에 찬 분위기였다. 조국의 부활을 염원했기 때문에 동참을 하려는데 반란군의 움직임이 없어서 가세를 할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구미는 다급한 나머지 용책성을 점령하고 있는 의자를 찾아갔다.

"왕자님, 빨리 진군해 신라군을 무찔러야지 왜 여기에 계십니까?"

의자는 마립의 보고로 왜국 군이 남가라에서 상륙을 하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군이 스스로 3 개 성을 내준 것도 감추고 도리어 구미에게 타박만 했다.

"구미님, 나는 신라의 3 개 성을 획득하는 전과를 올렸소. 그런데 반란군과 왜국 병력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으니 나로선 큰 의문이요. 약속대로 구미님의 임무는 기현, 앵잠, 봉잠성을 점령하는 일이요."

의자의 말에 구미는 하소연을 하듯 대답했다.

"왕자님, 임나부가 무슨 힘으로 성들을 점령할 수가 있겠습니까?"

"무슨 말씀이요? 나는 점령한 성들로 만족하고 앞으론 지켜내기에 힘을 써야 할 형편이요. 진군은 여기서 끝을 낼 수밖에 없소. 구마님이나 어서 돌아가 왜국 병력과 합세하여 임나국 건설에 힘을 써 주시오."

"왕자님,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왜국 병력은 남가라에 상륙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백제군이 나머지 성들을 점령해 줘야 하겠습니다."

막판에 몰린 구미는 솔직하게 사정을 털어놓고 매달렸다.

"구미님은 반란을 일으키면 옛 가락국 후예들인 백성들이 전부 호응을 하게 될 것이라고 장담을 했었소. 그게 헛말이었소?"

"백성들은 어느 정도 승기를 잡아야 일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엄두를 못 내어 백제군이 진격을 하면 호응하게 될 것입니다."

"구미님은 내게 지나친 요구를 계속 해선 안 되오."

의자의 입에서 냉랭한 대답이 나오자 구미는 완전히 절망감을 느꼈다. 큰 위기 속에 자신으로선 어찌해 볼 수가 없어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남가라로 빨리 돌아가 탈출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자는 구미를 돌려보낸 뒤 이제부턴 자신에 관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전투도 없이 신라 성을 셋이나 점령한 것은 자신에게 무슨 도움은커녕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었다.

병력을 거느리고 지휘하게 된 절호의 기회를 십분 활용해서 자신의 위상을 부각해야만 했다. 그러자면 직접 전투를 지휘해서 큰 전공을 세워야 했다. 그걸 장병들에게 보여줘야 앞길이 열린다는 생각이었다.

의자는 기현성을 지키는 신라 장수가 내물계 모반자의 부하임을 알고 있었다. 신라의 반란자를 쳐서 궤멸시키면 철산지를 내준 덕만 공주에게 보답이 되었다. 그러나 전투는 큰 모험이 아닐 수가 없어 신중을 기해야 하나 전공은 세우자면 위험을 무릅써야 했다. 기현성의 병력은 3천이 못 되어 배를 투입시키면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즉각 국경에서 머물고 있는 윤충에게 병력을 끌고 도강할 것을 명령했다.

윤충은 대병력을 이끌고 당도했다. 그런데 의자는 직접 병력을 지휘해 성을 공격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윤충은 병력을 지휘한 경험이 없는 의자에게 우려를 표하고 만류했다.

의자는 자신의 운명을 시험해 볼 기회로 삼고자 단호히 말했다.

"윤충, 대 병력을 지휘해 본 경험이 없음을 걱정하지 말라."

"그렇지만 여러 경우를 생각해 소장에게 맡겨주셨으면 합니다."

"병법에 적을 알고 자신을 알면 백전을 치러도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적의 사정을 속속들이 파악해 두었다. 나와 그대 중 누가 더 기현성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겠는가? 우리 병력이 적보다 두 배가 됨을 믿는 게 아니다. 중요한 점은 내가 앞으로 어떤 전술로 성을 함락시키는지를 병사들에게 보여주고 경험을 쌓게 만들려는 목적이다."

의자의 말에 윤충은 더 이상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이튿날 의자는 직접 대 병력을 끄고 발진했다. 그리고 이틀 후 저녁 무렵 전격적으로 기현성을 포위해 버렸다.

성안의 신라군은 백제 병력이 많은 것에 잔뜩 위축되었다. 방어 병력도 적은 데다 미완성인 성을 의지하는 방어엔 허술한 데가 너무 많아서 불안하기가 그지없었다.

의자는 기현성의 포위한 뒤 먼저 성안에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냈다. 성주인 눌최는 그에 대해 고민에 빠졌다. 대세를 따르자면 백제군은 우군이 되나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반란은 싹수가 노랗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므로 반란군의 입장을 벗어나 백제군에 항전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성벽으로 나가 백제군을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의자는 항복을 하지 않겠다는 반응에 성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무리한 전투보다 성 안의 신라 병사들을 상대로 선무 공작을 폈다. 성을 이탈하는 자는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백제군은 한편으로 산속에서 고사목들을 주어 모았다. 그것을 밤이 되면 성문들마다 치쌓아 놓았다. 고사목에 불을 질러 이틀간을 태우고 나자 성문들마다 퀭하게 뚫리고 말았다.

의자는 그럼에도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그 대신 계속 신라 병사들을 상대로 선무 공작에만 열을 올렸다. 그렇게 하자 밤마다 신라 병사들은 뚫린 성문들을 통해서 도망을 쳤다.

성 안의 신라 병사들은 원병이 올 데도 없음으로 도망을 치는 자들이 계속 늘기만 해서 사기도 극도로 떨어졌다. 방어에 한계를 느끼는 눌최도 백제군이 공격을 하지 않음에도 속이 타들어 갔다.

그런 틈을 타고 김용춘 휘하 장수인 열기가 성안으로 들어왔다.

"열기, 기현성은 매우 위급하다. 그런데 무슨 일로 들어왔는가?"

눌최가 묻자 열기가 대답했다.

"왜병들이 동해안에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서라벌 방어를 맡으신 김서현 대장군에 의해 섬멸당한 왜국 병력들은 풍지박산으로 동해안을 끼고 북쪽으로 도망을 쳤습니다."

"열기는 그걸 내게 알려주려고 여길 들어왔는가?"

"기현성이 함락을 당하면 철산지는 전부 백제의 차지가 됩니다. 대장군님은 절 성안으로 들여보내신 이유는 장군님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전군님이 날 격려를 하신다고?"

"장군님은 반란군에 속하지만 기현성이 무너지면 백제군에 점령을 당하게 됩니다. 그걸 막아놓세 된다면 장군님은 구명이 될 것입니다."

"내가 구명이 된다고?"

눌최의 반문에 열기는 대답했다.

"장군님은 그 점을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열기는 그런 말만 남기고 성을 빠져나갔다. 눌최는 열기가 성을 마음대로 드나들 수가 있다면 모든 게 끝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미 철산지의 절반을 백제에 빼앗겼다. 대세와 더불어 처형을 면하자면 성을 지킬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백제군 쪽에선 윤충이 의자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좌평님, 성 안의 적의 병력은 밤마다 도주를 해서 절반 이상이 줄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왜 공격 명령을 내리시지 않습니까?"

윤충은 병력을 지휘해본 경험이 없는 의자를 한심하게 여기며 한 말이었다. 그러자 의자는 그런 말이 나오길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는 아국의 장병들의 목숨을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의자의 대답에 주변의 장졸들은 무슨 소린가 싶어 귀를 기울였다.

"적을 공격하자면 아군의 피해를 무릅써야 한다. 나는 장졸들이 임무를 수행하고 되도록 모두가 온전하게 회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장졸들은 그 말을 듣고 의자의 깊은 뜻을 할게 되어 감사하는 마음들이 되었다. 반면 의자는 자신의 인자함을 모두에게 알릴 수가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성안으로 진입을 시도하겠다. 이젠 적병들의 반격이 심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졸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힘을 쓰고 적에 대한 공을 하지 말기를 바란다. 인명의 중요함은 피아를 가릴 일이 아니다. 장졸들에게 내 말을 숙지시키고 진입을 하라."

드디어 백제군은 뚫린 성문마다 진입을 시작했다.

반면 성안에선 눌최가 장수들을 향해 말했다.

"줏대 없는 장수로 이름을 남기는 건 비참한 일이다."

장수들은 뜻 모를 말에 모두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남은 병사들은 얼마 안 되고 도주가 계속되는데 무슨 뜬금없는 말인가 싶은데 병사 하나가 달려와 백제군이 진입을 알렸다. 그 말을 듣고 눌최는 말했다.

"외로운 성을 구원해 줄 원병은 오질 않으니 이젠 끝이다."

곁에 있던 부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장군님, 성을 점령당했는데 우린 어찌해야 좋겠습니까?"

눌최는 최후의 순간이 왔음에도 호기를 부리듯 대답했다.

"이제부터 모두는 사나이로 한번 이름을 날릴 기회로 삼자!"

부하들은 무슨 소리냐 싶은 표정들인데 눌최는 말을 이었다.

"나는 의기 남아답게 죽음을 맞아 지사의 절개를 지키련다."

눌최가 비장하게 의기남아(義氣男兒)와 지사(志士)를 운운하자 부하들은 뚱딴지같은 소리는 듣고 싶지도 않다는 듯 외면들을 했다.

"초목은 푸름을 자랑하나 송백은 깊은 겨울에도 홀로 푸르고 맨 나중에 퇴색한다. 나는 사나이로 비겁하게 목숨을 구하기보다 장렬하게 죽음을 빛내고자 한다. 우리는 모두 함께 그런 죽음을 택하자."

남은 장졸들은 이제 헛되이 목숨을 잃고 싶지가 않았다. 눌최는 구차스럽게 살기보다 죽음을 택하자는 말이나 하나 둘 그 자리를 떠났다. 남은 장수는 단 두 명이다. 그들은 눌최와 오랜 정리 때문에 어쩔 줄을 몰라했으나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장군님의 말씀대로 저도 송백이 되고 싶기는 합니다만."

다른 자도 입을 열었다.

"도망칠 자는 다 떠났으나 저도 장렬한 죽음을 택하고 싶지만."

두 장수는 그런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려서 떠났다. 이제 눌최 곁에 남은 자는 주인을 모시던 종만 남았다. 종은 활을 잘 쏘아 접근해 드는 백제군을 몇 명 쓰러뜨려 놓았다.

눌최는 백발백중으로 적을 맞추는 종이 대견하다는 듯 말했다.

"전에 누가 널 두고 한 말이 있었다. 특이한 재주를 지닌 너는 나중에 주인을 해칠지 모르니 곁에 두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곁에 계속 두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 같다. 너도 그만 여길 벗어나서 집으로 돌아가도록 해라. 그리고 내가 장렬하게 전사를 했음을 알려다오."

"전 주인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종의 말에 눌최는 감격하듯 물었다.

"네가 날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적이 주인님의 목을 치게 할 순 없으니 제 손으로 쳐드리겠습니다."

눌최는 내심 놀라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멀리서 백제군이 이쪽을 지켜만 볼 뿐 접근하려 하질 않았다. 그런데 종은 허리춤에서 도끼를 꺼내 들고 말했다.

"주인께선 목을 느려주십시오."

"네가 내 목을 어찌 치겠단 말인가?"

"왜 못 칩니까? 주인은 대세의 반역에 가담했다 뒤늦게 마음을 돌린 대역 죄인입니다. 적이 목을 거두게 만들 순 없지 않겠습니까?"

종은 말하고 주인을 강제로 무릎을 꿇고 앉게 만들었다. 눌최는 창백해진 얼굴로 땅바닥에 머리를 대야만 했다. 종은 치켜든 도끼로 가차 없이 내리쳐 버리고 나서 허공에 대고 외쳤다.

"나는 가락국 후예로 그동안의 한을 풀었다!"

종은 어디로 사라지고 기현성의 전투는 끝이 났다. 백제군은 입성을 마친 뒤 의자는 윤충을 비롯한 막료들에게 뜻밖의 말을 꺼냈다.

"우린 세 곳의 철산지를 얻었으니 기현성은 돌려주고 철수를 하겠다."

윤충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애써 얻은 성을 왜 내버리십니까?"

"신라는 철산지를 완전히 포기할 리가 없다. 사태를 수습하고 나면 탈환 작전을 펼치게 될 것이다. 그에 대비하자면 여긴 버리는 게 좋다."

모두는 그 말을 고개를 끄덕이며 의자가 명장의 자질을 지녔음을 내심 인정하게 되었다. 윤충도 내심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물었다.

"좌평님,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하시렵니까?"

의자는 모두의 눈길을 받으면서 자신의 계획을 밝혔다.

"점령한 속함, 기잠, 용책 3 개성은 본국에 가깝다. 비록 성들은 작으나 성벽이 튼튼해서 지켜내기가 용이한 편이다. 그러나 기현성은 성벽이 미비하고 3개 성과 거리가 멀어 방위가 어려워 포기를 할 뿐이다."

장수들은 그 말에 모두가 동의하는 빛을 보였다. 그리고 이번 전역을 주도한 의자는 뛰어난 전술도 인정을 하게 되었다. 그건 무엇보다 병사들까지 부인할 수가 없는 사실이 되었다. 인지한 데다 큰 역량을 발휘한 의자가 장차 보위를 잇게 되길 바라는 마음들이 되었다.

의자는 그런 여세를 몰아서 한 걸음 더 나갈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은 복잡한 사비성의 내부 사정을 한꺼번에 쓸어낼 일이었다.

남가라의 구미는 요지부동이던 왜국 병력이 회군하게 됨을 마립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젠 신라군에 체포돼 처형을 당할 일만 남게 되자 야장과 가족들을 전부 야장선에 태우고 왜국으로 떠나고 말았다.

대세도 관할했던 철산지를 다 잃고 말아 내물계는 발판이 무너졌다. 왕실과 맞설 힘을 완전히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반역자로 몰려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구미는 이미 왜국으로 떠났으므로 자신도 가족을 끌고 망명길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든 게 일장춘몽으로 끝난 대세는 당나라로 떠나기로 했다.

"세상이 넓은 것을 알지 못하면 연못 속 물고기나 새장 속의 새와 다를 게 없다. 나는 좁은 신라 땅에서 일생을 보내고 싶지가 않아 중원 땅으로 간다. 거기서 스승을 찾고 도를 닦으며 살겠다."

대세는 준비해 둔 배에 가족들을 태웠다. 그런 주인을 따라 심복인 구칠(九柒)을 비롯해 몇몇 수하들이 함께 타고 떠났다.

의자는 기현성에서 철수해 용책성으로 후퇴했다. 3개 성의 방어는 당분간 윤충에게 맡기고 자신은 먼저 처리할 일이 있어 계백이 사비성으로 급히 향하게 만들었다.

사비성에 도착한 계백은 은밀히 사진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의자가 전군을 지휘해 신라의 철산지인 속함, 기잠, 용책 3 개성을 함락시켜 새로운 철산지를 확보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의자가 인명을 중시하는 여러 면에서 인자함을 보여 모든 장졸들이 감복한 분위도 전했다.

"참으로 경축할 일일세."

"위사좌평은 병관좌평님과 목돈이 작성한 맹약서를 갖고 계십니다."

"맹약서를 갖고 있다? 그걸 어떻게 위사좌평이?"

"마립이 손에 넣은 뒤 위사좌평에게 전했습니다."

"위사좌평이 내게 무슨 하려는 말이 있는가?"

"개선장군으로 회군하기 전에 병관좌평님은 새상 왕자와 함께 왜국으로 조용히 떠나시면 맹약서를 불태워 없애 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사진은 그 말을 듣고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목돈의 발설로 자신의 반역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사태를 관망하고자 새상 왕자와 함께 은거 중이었다. 국왕은 가타부타 일체 반응을 보이지 않으나 의자가 돌아오면 자신은 목숨을 잃게 될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요구대로 왜국으로 떠나겠다."

"사흘 이내로 떠나셔야 합니다."

이틀 뒤 사진은 가족과 새상을 데리고 조용히 배를 타고 왜국으로 떠났다. 그것을 확인한 계백은 다시 의자에게 돌아가 보고했다.

의자는 그날 밤에 서라벌로 보낼 서찰을 썼다.


--의자는 큰 이모님께 삼가 글을 올립니다. 백제군은 신라가 위기를 극복하게 도와 임나부는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의자는 속함, 기잠, 용책의 철산지를 얻게 된 보답으로 내물계의 서부 근거지인 기현성의 병력을 소탕했습니다. 의자는 큰 군공을 세워 앞날이 열리게 되었으니 큰 이모님도 꼭 보위를 이으시길 기원합니다. 백제국 왕자 의자 올림.


서라벌 왕궁은 의자의 서찰을 전해 받았다. 덕만은 읽고 양쪽이 다 큰 위기를 넘기게 되자 선화공주의 얼굴을 떠올리게 되었다. 며칠 뒤 김용춘과 김서현의 노고를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김용춘은 지물촌에서 떼어온 임나부 현판을 덕만에게 바쳤다. 덕만은 그것을 받아 들고 감개무량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신라가 거둔 전과 중 이보다 더 큰 것도 없겠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인 김서현이 물었다.

"공주님, 백제에 내준 철산지는 언제 되찾으시렵니까?"

그 말을 받아 김용춘이 입을 열었다.

"하여간에 김서현 대장군의 급한 성격은 알아줘야 만하오."

덕만은 의자가 보낸 서찰을 내놓았고 두 사람은 그걸 읽었다.

"의자가 책봉을 받을 때까진 기다려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만의 대답에 두 남자는 부끄러움을 느끼듯 고개를 끄덕였다. 또 덕만 공주는 여인이나 한 나라를 맡을 만한 그릇이 된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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