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기로(岐路) (623)
무왕은 즉위 초부터 강성한 귀족들의 견제 속에 취약한 왕권을 지켜내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그러나 진도를 숙청함으로써 왕권 강화의 전기가 되고 착실하게 기반을 다질 수가 있었다.
의자는 왕궁 호위 임무를 잘 수행해 냄으로써 입지를 굳혀나갔다. 그러나 태자 책봉은 여전히 막연한 소망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도 유리해진 여건을 십분 활용해 목적을 달성할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백제의 귀족세력인 8가는 6가로 축소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 같이 야망을 품은 자들로 여전히 국왕 자리를 노렸다. 6가가 그럴 수가 있는 데는 자신들만의 단합된 특수한 배경을 믿기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상좌평인 목돈은 단연 앞선 위치에 있었다.
그런 목돈도 근래에 와선 위치가 좀 흔들리고 있었다. 원인은 가잠성을 다시 상실해 철정 부족 사태를 빚게 되자 나라 전체가 타격을 받고 거길 관할했던 목돈에게 책임이 돌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6가들은 심한 철정 부족으로 대외 교역에서 막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재정의 결핍은 사병(私兵)을 유지하는데 매우 큰 어려움을 겪게 만들고 세력 약화로 이어지게 되었다.
의자 또한 큰 위기의식을 느꼈다. 목돈이 병관좌평 사진(沙珍)에게 접근하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목돈은 진도를 축출할 때 의자의 태자 책봉에 앞장을 서겠다고 약속했으나 상좌평이 되자 8가의 설득이 어렵다는 핑계로 유야무야를 시켰다.
왕비는 위사좌평인 의자가 왕궁 수비 병력을 지휘하는 걸 여간 두렵게 여기지 않았다. 때문에 소생인 새상이 20세가 되자 국왕에게 건의해서 병력의 절반을 지휘하게 만들었다.
새상은 외조부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데다 왕궁 수비병의 절반을 지휘하게 됨으로써 태자 책봉에 한 발짝 다가서게 되었다. 반면 의자는 목돈이 사진에게 붙으면 태자 책봉은커녕 목숨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의자는 부왕을 믿지만 새상이 강력한 경쟁상대로 부상하자 책봉 문제를 놓고 저울질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일었다. 자신을 택하면 왕실의 기반이 흔들릴 수도 있어 사진의 보위와 지원을 받는 새상을 택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절박한 사정을 타개하자면 무슨 수를 쓰지 않으면 안 될 고민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 때 신라 지물촌의 임나부 거수인 구미가 백제에 왔다. 구미는 의자를 은밀히 만나 자신은 옛 안나 가락국 왕실 후손으로 조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도움을 받고자 찾아왔음을 밝혔다.
의자는 구미의 포부와 계획을 듣고 내심 큰 자극을 받게 되었다. 임나부를 발판으로 나라를 세우려는 자도 있는데 자신도 책봉을 받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해야만 한다는 자각이 일었다.
두 사람은 각기 목적 달성을 위해 서로 협조할 필요성을 느꼈다. 자력으로 안 되면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서라도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서로 돕고 힘을 보태기로 합의를 봤다.
구미는 백제가 왜국과 함께 신라를 쳐 임나국을 세우게 되면 철산지의 절반을 넘겨주겠다고 제안했다. 옛 가락국의 중요 철산지인 속함(速含), 기잠(岐岑), 용책(冗柵), 앵잠(櫻岑), 봉잠(烽岑), 기현(旗縣) 중 백제와 가까운 세 곳을 돌리겠다는 것이었다.
의자는 철정 부족을 해결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한 공적은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뜨기까지 했다. 성공을 하면 입지가 크게 강화되어 책봉을 받는 데도 매우 유리해질 수가 있었다.
"왕자님으로부터 사전 보장을 받을 게 있습니다."
구미의 말에 의자는 반문했다.
"구미님, 어떤 사전 보장을 말씀하십니까?"
"임나국이 건설되어도 자체적인 힘으론 국체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백제와 왜국은 공동으로 임나국의 독립을 보장해 줘야 합니다."
"옛날에 백제와 왜국은 가락국과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했던 사이라 당연하다는 생각입니다. 나도 구미님에서 요구를 할 게 있습니다."
"왕자님은 어떤 요구를 하시렵니까?"
"임나국은 백제에 신속하길 원합니다. 그게 받아들여진다면 나는 폐하께 주청해 책임을 지고 출병 결정을 이끌어 내겠습니다."
"임나국은 백제와 왜국에 다 같이 신속할 것입니다."
구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이유는 양측에 다 신속해야만 삼각 구도가 형성되고 그렇게 돼야 공평성도 유지가 됨으로써 확실한 안전보장이 지속될 수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의자는 구미의 의도를 알만해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내심은 달랐다. 육지로 접한 백제는 바다를 격한 왜국보다 지정학적인 조건이 유리해서 우위를 점할 수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구미도 내심 그 점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백제와 왜국 어느 쪽도 임나국을 독점하지 못하게 할 안전장치를 필요로 했다. 그 해결책을 신라의 내부 사정에서 찾기로 했다. 그것은 내물계를 부추겨 신라 영토 중 낙동강 서쪽에 새로 나라를 세우게 만드는 접촉을 시작했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은 신라 침공의 연합전선을 구축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앞으로 백제와 왜국의 사정을 감안해 효과적인 계획을 세워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만남을 계속 갖기로 했다.
구미는 의자와 접촉을 끝내자 거기서 왜국으로 향했다.
이때 왜국에선 큰 상황의 변화가 일어났다. 조정의 두 실력자 중 쇼토쿠가 갑작스럽게 타계했다. 때문에 신라 침공에 적극성을 띤 우마코의 독단과 가능성이 커지게 되었다.
구미는 신라 침공에 박차를 가하고자 백제와 왜국 사이를 자주 드나들어야 했다. 의자는 그런 구미를 통해 신라와 왜국의 사정을 잘 알 수가 있었다. 구미가 예정보다 빨리 찾아왔다.
"왕자님에게 긴급한 정보를 전할 게 있습니다."
"구미님, 어떤 정보이기에 그러십니까?"
"전에 모반을 일으켰다 왜국으로 축출된 진도를 아십니까?"
"알지요. 그 자에 관한 일을 왜 새삼스레 꺼내십니까?"
의자의 반문에 구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진도는 우마코의 참모로 있는데 그가 중요한 정보를 흘렸습니다."
구미는 그렇게 입을 뗀 뒤 의자를 크게 놀랄 말을 꺼냈다.
"사진과 목돈은 왕자님을 제거할 공작을 꾸미고 있습니다."
"날 제거한다? 무엇 때문에 그런단 말입니까?"
"그 목적은 새상 왕자의 태자 책봉을 서두르기 위함입니다."
의자 역시 근래에 목돈에 대한 석연치 않은 의문을 품고 있었다. 그 이유는 목돈과 사진이 비밀리에 만나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왕자님, 우마코가 사진에게 손을 뻗은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다른 데 있다니요?"
"우마코는 백제를 두 개의 나라로 쪼갤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그래야만 앞으로 주무르기가 쉽다는 판단입니다. 그런 획책에 사진이 먼저 넘어갔고 사진은 정적인 목돈을 끌어들이는 결과를 빚게 되었습니다."
"사진과 목돈이 한 패가 되었다니 믿어지지가 않을 일입니다."
"사진은 외손자가 태자로 책봉하게 만든 뒤 자신이 보위를 넘겨받으려고 합니다. 목돈 또한 백제를 남북으로 쪼개면 자신은 남쪽을 차지해서 나라를 세울 수가 있다고 해서 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밀약을 맺게 된 두 사람은 사전에 왕자님의 목숨부터 빼앗기로 했습니다. 목돈이 그 역할을 맡기로 되었으니 왕자님은 서둘러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구미는 바로 돌아갔고 며칠 뒤 의자는 목돈의 집을 방문했다.
"왕자님, 어떻게 우리 집을 다 찾아오게 되셨소?"
목돈은 좀 놀라면서 경계하는 빛을 드러냈다.
"저는 폐하의 명을 받잡고 왔습니다."
의자의 대답에 목돈은 매우 의아해하는 눈길이 되었다.
"폐하께서 신에게 무슨 명을 내리실 게 있으십니까?"
"명을 전하기 전에 먼저 상좌평님과 상의를 드릴 게 있습니다."
"왕자님은 나와 무슨 상의를 할 게 있소?"
"상좌평께선 쇼토쿠 섭정이 타계한 소식을 들으셨습니까?"
"글쎄 말이요. 금년에 48세 젊은 나이로 병을 앓았던 것도 아니요. 밤중에 잠을 자다 타계했는데 그 죽음에 대해선 우마코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소문도 들려서 애석하기가 그지없소. 나는 누구보다도 슬픔과 불안이 클 여왕이 걱정되오."
"상좌평께선 우마코와 관계를 그만 개선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도 우마코와 사이가 너무 소원해서 걱정이 없지도 않소."
"우마코는 쇼토쿠가 없으니 더욱 보위를 노리게 될 것입니다. 독주는 다시 심해질 것이라 여왕은 큰 위기에 봉착할 것 같습니다."
의자는 말하면서 목돈의 반응을 주시하고 있었다.
"걱정은 되겠지만 우마코가 보위를 찬탈하긴 어렵게 되었소."
"상좌평께선 어떤 이유로 그런 판단을 하시게 됩니까?"
"왜국 조정의 사정이 크게 바뀐 때문이요. 왕궁의 수비 병력은 여왕에게 충성도가 높은 고구려계 장수가 장악하고 있소. 우마코도 든든한 보위 세력을 갖게 된 여왕을 함부로 넘볼 수는 없게 되었소."
"그럴 수만 있다면 상좌평께선 마음이 좀 놓이시겠습니다."
목돈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말을 하는 의자가 기특하기까지 했다.
"상좌평께선 요즘 제 심경이 어떨지 짐작이 되시는지요?"
"왕자님의 심경이 어떻기에 그런 말씀을 하오?"
"국인들 사이에 도는 소문 때문에 큰 불안을 느끼고 있습니다."
"왕자님, 어떤 소문을 들었기에 그러오?"
"태자 책봉은 가망이 없고 자칫 목숨만 잃게 되었다고 합니다."
"왕자님은 혹시 제게 무슨 불만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오?"
"상좌평께선 절 위해 애를 많이 써주신 분인데 무슨 불만을 품겠습니까? 다만 절 매우 못마땅하게 여길 병관좌평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왕자님의 심경은 이해가 되나 나로선 무슨 말을 할 게 없겠소."
"저는 결심한 바가 있어 상좌평님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목돈은 좀 의아해하는 눈길로 의자에게 반문했다.
"왕자께선 어떤 결심을 한 게 있기에 그러오?"
"장자로 태어났으나 배경이 없어 줄곧 몸을 낮추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해도 위험을 덜 수가 없어 책봉을 포기하기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의자가 뜻밖의 말을 꺼내자 목돈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의 고뇌가 얼마나 큰지 알만 하겠소만."
"폐하께선 옥좌를 지키는 일도 힘이 드시는데 제 책봉까지 신경을 쓰시게 할 수가 없어 스스로 포기하는 게 자식 된 도리로 생각됩니다."
목돈은 생각을 잘했다고 여기면서도 물었다.
"왕자님의 고충은 이해가 되나 나중에 후회를 하진 않겠소?"
"저는 마음을 정하고 나니 후회할 일보다 다른 고민이 생겼습니다."
"어떤 고민이 생겼소?"
"태자는 못 되어도 부귀는 누리면서 살고 싶습니다."
"부귀는 이미 타고나셨는데 무슨 그런 걱정을 다 하시오?"
"부귀를 누린다고 해도 무위도식을 해선 살맛이 나겠습니까?"
"왕자님은 혹시 달리 바라는 게 있으시오?"
"사람이 제대로 산다는 건 일거리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건 그렇소만, 왕자님은 새로 하고 싶은 일이 뭐요?"
"저는 돈을 많이 벌어서 큰 부자가 되었으면 합니다."
"왕자님은 무슨 일을 해서 많은 돈을 벌려고 하오?"
"돈을 버는 데는 장사만 한 게 없다고 들었습니다."
"왕자님은 장사를 해 본 경험도 없는데 잘 되겠소?"
"그러므로 상좌평님에게 장사 일을 배우고자 합니다."
"내게서 장사 일을 배우겠다고?"
"상좌평께선 백제에서 가장 큰 선단을 보유하고 계십니다. 그런 분 밑에서 장사를 배워야 큰돈을 벌 수가 있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의자는 요즘에 목돈의 선단이 중원 땅으로 출항을 거의 중단 상태에 빠진 걸로 알고 있었다. 전에는 철제품 농기구를 장강(長江) 이남으로 가져가서 거래를 했으나 가잠성을 잃어 더는 할 수가 없었다. 그로 인해 지금까진 장강 이북에만 철제품을 공급해 왔던 고구려가 대신 장강의 이남까지 파고들 수 있게 된 걸로 알려졌다.
목돈은 의자가 장사를 하겠다는 건 다른 뜻이 있을 것으로 봤다.
"왕자님이 장사를 하려면 위사좌평 직은 어찌하려고 그러시오?"
"상좌평께서도 직위에 계시면서 장사를 관할하시지 않습니까?"
의자의 반문에 목돈은 맹랑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부왕에 대한 불만이 커서 그러는 걸로 여겼다. 거기다 국왕의 의중이 새상 왕자 쪽으로 돌았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그런다고 생각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의자를 처치할 임무를 지닌 자신은 그걸 쉽게 해결할 수가 있게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왕자님, 앞으론 되도록 자주 만납시다."
"저는 상좌평께서 허락을 하신 것으로 알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 대신 태자책봉을 포기하겠다는 말은 다신 꺼내지 마오."
"헛된 꿈을 일찍 버리는 게 좋을 일인데 왜 그러십니까?"
"나는 왕자님의 책봉을 위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요."
"말씀은 고마우시나 병관좌평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왕자님은 혹시 내가 병관좌평과 가까운 사이로 보진 않소?"
"가깝지가 않으신 건 세상이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다만 새상이 곧 태자에 책봉된다는 소문이 사비성에 돌아서 저는 포기하는 겁니다."
"사진은 외손자를 보위를 올렸다가 양위를 받아낼 자요."
목돈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오자 의자는 크게 놀라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나 목돈 또한 사진과 다를 게 없는 자로 보고 물었다.
"내신좌평께선 새상의 책봉을 막을 방도가 없지 않으십니까?"
"책봉을 막는데 앞장을 설 사람은 나밖에 없고, 그에 대비를 하고자 사진에게 접근을 했소. 왕자님은 나만 믿으면 되오."
목돈이 사진과 접촉이 있음을 스스럼없게 밝히자 의자는 대답했다.
"제가 어찌 상좌평님을 돕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의자는 목돈이 자기 입으로 사진과 만났음을 확인시켜 주자 내심 경악을 금치 못하며 자신도 빨리 대비책을 세워야 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왕자님은 폐하의 명을 받들고 왔다고 하지 않았소?"
"예, 폐하께선 곧 신라를 칠 전역을 일으킬 계획이십니다."
목돈은 내심 당치도 않아서 코웃음을 쳤다. 가뜩이나 대외 교역이 어려워져 힘든 판인데 병력 동원의 짐까지 지우려고 든다면 더욱 그냥 놔둘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었다.
"늑로현 침공에 실패한 지가 얼마 안 되는데 또 전역을?"
목돈은 들릴락 말락 중얼거렸고 의자는 변명처럼 대답했다.
"철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자면 어쩔 수가 없는 일입니다."
의자는 낯만 찡그릴 뿐 대답을 않는 목돈에게 재차 말했다.
"상좌평께선 반대하실 것이나 이번 상황은 크게 다릅니다."
"상황이 어떻게 달라졌다는 말이요?"
"신라의 남부 철산지를 손에 넣을 기회를 잡게 되었습니다."
"신라의 남부 철산지를?! 거길 어떻게 손댈 수가 있단 말이요?"
목돈이 반신반의만 하자 의자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번 전역은 아국만의 단독 출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국만의 단독이 아니라면?"
"왜국과 합동 작전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왕자님, 왜국과 합동 작전을 펼친다고 했소?"
의자는 전역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었고 목돈이 물었다.
"왕자님, 그러면 임나부 거수인 구미가 임나국을 세우고자 왜국의 우마코와 결탁을 해 신라를 침공하게 되었다는 말이요?"
"그렇습니다. 백제도 동참하게 되었고, 왜국은 이미 병력 동원령이 내려져 축자주로 이동할 준비로 들어갔습니다."
목돈은 우마코가 백제를 둘로 나눌 음모를 꾸미고 한편으론 임나국을 세우려는 것에 비상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상좌평님은 이번 전역에서도 큰 역할을 해주셔야 하겠습니다."
의자의 말에 목돈은 대답을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백제는 철정 공급 문제를 시급히 해결해야 만했다. 때문에 새로 나라를 세우려는 자신에게도 크게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상좌평님의 선단은 왜국 군의 수송 업무를 맡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게 되면 우마코와 관계도 자연스럽게 개선이 될 걸로 생각됩니다."
"일단 병관좌평과 상의를 해보기로 하겠소."
의자는 목돈의 대답을 듣고 왕궁으로 들어가서 부왕을 만났다.
"폐하, 긴급히 보고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긴급한 보고라니 무엇이냐?"
"왜국의 우마코가 아국을 상대로 큰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우마코가 무슨 음모를 또 꾸민단 말이냐?"
"아국을 두 개로 쪼개 놓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습니다."
"아국을 두 개로 쪼개 놓다니 그게 무슨 소린가?"
"백제를 남북으로 나누어 두 개의 나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의자의 대답에 무왕은 아연실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마코의 아국에 대한 해코지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모르겠다."
"폐하, 그 일에 가담한 자들을 말씀드려야 하겠습니다."
"그 일에 가담한 자들이 대체 누구란 말이냐?"
"상좌평과 병관좌평입니다."
"목돈은 그럴만한 자이나 사진까지라니 믿을 수가 없구나?"
"소자는 목돈을 만나서 확인을 했습니다."
"뭘 확인을 했다는 말인가?"
"목돈은 제 입으로 병관좌평을 만나고 있음을 밝혔습니다."
"사사건건 부딪히는 앙숙인데 손을 잡았다? 우마코는 능히 그럴만한 자로 보고 있지만 너는 이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소자는 신라 임나부의 거수인 구미라는 사람과 통하고 있습니다."
"네가 어떻게 그쪽 사람과 통하게 되었단 말인가?"
"구미는 임나국을 세우게 소자에게 도와줄 것을 청해 왔습니다. 도움을 주는 대가로 백제는 철산지를 넘겨받기로 되었습니다."
"철 때문에 협조 체제를 구축하게 되었단 말이로군?"
무왕은 사진도 목돈의 야심을 잘 알기에 설득이 가능했을 걸로 봤다.
"우마코에게 먼저 말려든 쪽은 병관좌평이란 말이로군?"
"그렇습니다. 병관좌평은 목돈을 설득했습니다. 백제를 남북으로 쪼개면 목돈과 함께 나라를 세울 수가 있음에 협력 관계를 맺었습니다."
무왕은 부지불식간에 중얼거리게 되었다.
"사신은 새상을 태자로 봉하면 다음은 짐을 노릴 것이다!"
의자는 부왕의 말에 자신의 뜻을 밝히기로 했다.
"폐하, 소자는 새상을 지극히 아껴왔습니다.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할지 큰 고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종묘사직이 무너지게 될 판이라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무왕은 사건의 시말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게 되자 가슴이 답답했다.
"큰 일이로다! 짐은 앞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폐하, 이 일은 소자가 책임을 지고 처리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네가 책임을 지고 처리를 하겠다고?"
"소자는 새상에게 악영향이 미치지 않을 한도 내서 처리하겠습니다."
"새상에게 악영향을 끼치지 않을 한도 내서 하겠다?"
"소자는 목돈만을 처치하는 걸로 끝을 내겠습니다."
"그 말은 병관좌평은 손대지 않겠다는 뜻인가?"
"병관좌평은 폐하께서 처리하실 일로 생각됩니다."
"목돈을 처리할 방법은 있느냐?"
"병관좌평과 목돈 사이에 합의된 사항 중 일 순위는 소자의 목숨을 빼앗는 것입니다. 소자는 그 역할을 맡은 목돈부터 처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처리를 해야만 합니다."
"짐은 너만 믿겠다. 그러면 신라 침공 계획을 들어보자."
"그 일은 구미와 의논이 더 이뤄져야 말씀을 드릴 수가 있겠습니다."
"알겠다. 먼저 목돈 부자를 처리하는 일에 차질이 없기를 바란다."
무왕은 전에 진도를 축출할 때 의자가 보였던 수완을 믿기에 마음을 놓았다. 그런데 이튿날 목돈 쪽에서 의자에게 만날 것을 청해 왔다. 의자는 목돈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왕자님은 중요한 전역을 앞두고 가장 먼저 이 몸과 상의를 해 주었소. 매우 고맙게 여겨 출정을 주도할 왕자님을 적극 지원하겠소. 성공을 거둘 수 있게 만들어주기 바라오."
"상좌평께선 번번이 절 도와주시니 감격할 뿐입니다."
"폐하께선 전역에 병력을 얼마나 동원시킬 계획이오?"
"최소한 1만 명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그 정도의 병력만으로 되겠소?"
"근래 신라와 전쟁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셨고 병력 손실이 상당히 컸습니다. 그러므로 또다시 전국을 기울일 대병력의 동원은 매우 어렵겠습니다. 그러나 철산지의 확보라는 절체절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역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목돈은 병력 동원은 뒷전이고 국왕과 의자를 먼저 없앨 계획이 더 급했다. 때문에 무슨 요구든 다 들어주겠다는 말만 하게 되었다.
"왕자님, 최선을 다 할 약속드리겠으니 염려는 놓으시오."
의자는 목돈을 솔깃해질 말을 또 꺼냈다.
"폐하께선 궁궐 수비병도 절반을 출동시킬 계획이십니다. 총력 합심을 하지 않고는 왕실도 6가들도 미래가 없어질 것입니다."
"나는 모처럼 왕자님과 의기투합을 하게 되어 감격할 따름이요. 어떤 난관도 위험도 감수를 할 각오요. 모든 게 왕자님을 위함이요."
목돈은 그런 말을 하면서 약간 측은한 눈길을 의자에게 보냈다.
"상좌평께서 수락해 주셨으니 곧 폐하께 보고를 하겠습니다."
의자가 몸을 일으키는데 목돈이 입을 열었다.
"왕자님, 나도 한 가지 부탁을 드릴 게 있소."
"무슨 부탁입니까?"
"나는 이 일로 병관좌평을 다시 만나 의논을 해야만 하오. 병력동원에 차질을 빚게 만들지 않으려면 사진의 뜻을 파악하고 그의 비위를 맞춰둬야 협력을 이끌어내기가 쉽기 때문이요."
목돈은 대놓고 사진을 만나겠다는 말에 의자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다만 태자 책봉 포기하겠다는 말을 사진에게 알렸는지가 궁금했다.
"병관좌평은 제가 책봉을 포기한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아직 하질 않았소."
의자는 좀 의아해하며 실망을 했다. 하긴 두 사람은 그런 일엔 관심도 없을 것이었다. 그보다 목돈은 자신을 먼저 죽이는 게 급할 것이었다. 때문에 자신은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서 벗어나는 게 급했다. 목돈의 집을 나와 궁궐로 들어가서 부왕에게 보고했다.
"폐하, 소자는 상좌평을 만나고 왔습니다."
"무슨 다른 사정이 생긴 것은 없느냐?"
"폐하, 다른 사정은 없고 목돈의 거사를 유도할 일만 남았습니다."
의자는 그때부터 국왕과 한동안 상의를 했다. 국왕은 나이를 먹으면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정사를 보는 데도 지쳐 있기 때문에 의자에게 더욱 의지를 하며 모든 일을 전부 맡기기로 했다.
"폐하, 내일은 병관좌평을 불러서 한번 만나보시는 게 좋겠습니다."
"짐이 병관좌평을 만나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
"폐하, 소자에 대한 불만을 터뜨려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그 자의 속을 떠보란 말이냐?"
"소자가 목돈에게 한 말을 병관좌평도 아는지 알고 싶습니다."
"너는 무슨 말을 목돈에게 했기에 그러느냐?"
"소자는 태자 책봉을 포기하겠다는 말을 했습니다."
"책봉을 포기한다고? 그런 말을 어찌 함부로 할 수가 있느냐?"
국왕은 겉으론 펄쩍 뛰는 태도를 보였지만 속마음은 착잡했다. 왕비가 새상의 책봉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앞으로의 일이 어떻게 될지 몰라 난감했다.
"소자는 오직 폐하의 안전만을 바라는 마음입니다."
국왕은 의자의 처지를 이해하므로 고개만 끄덕였다. 장자로 태어나서 견디기 힘든 좌절감 속에서도 살아가는 게 눈물겹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슴이 찡하나 태자 포기가 진심일지는 의문이었다.
의자도 부왕의 복잡한 심경을 읽고 있었다. 때문에 부왕만을 바라보는 마음은 이미 접고 있었다. 새상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선 더욱 치밀한 계획을 세워서 대처를 해나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큰 장애물인 사진과 목돈부터 제거를 해놓고 볼 일이었다.
무왕은 의자가 매사에 사려가 깊고 침착한 만큼 내면에는 무서움을 숨기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진이야 어떻게 되건 간에 새상에 대한 걱정이 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목돈을 처치하면 그 자를 따를 세력의 반발도 생각해야 한다."
"폐하, 목돈의 부하들은 소자의 편입니다."
"목돈의 부하들이 어떻게 네 편이 될 수가 있느냐?"
의자는 부왕의 질문에 답변했다.
"폐하, 소자는 오래전부터 대비책을 세워두었습니다."
"어떤 대비책을 세웠단 말이냐?"
"진도를 축출할 때 압수한 선박들이 있지 않습니까? 폐하께선 그때 배들을 소자가 소유하게 해 주셨습니다. 소자는 선박들을 목돈에게 용선료를 받고 임대를 해서 오늘까지 거기서 나오는 돈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그 돈의 절반을 목돈이 모르게 선원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때문에 목돈의 선원들은 전부가 소자의 편이 되었습니다."
무왕은 무슨 말인지 알만해서 물었다.
"그러면 병관좌평은 어찌할 생각이냐?"
"새상을 생각해서 역시 피해가 가지 않을 방법을 찾고자 합니다."
국왕은 다시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이튿날 의자는 목돈을 찾아갔다. 그런데 목돈이 불만스럽게 말했다.
"폐하께선 병관좌평에게 전역을 혼자서 주도하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들었소. 그런 말씀을 하셨다면 내겐 물러서라는 뜻이 아니겠소?"
"상좌평께선 왜 그런 생각을 하십니까?"
"나는 앞으로 들러리 역할이나 하게 되는 걸 원치 않소."
"폐하께서 병관좌평에게 하신 말씀은 장인에 대한 예우 차원에 불과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상좌평께선 앞으로 하시기에 따라 주역도 되시고 들러리가 될 수도 있음을 유념해 주셨으면 합니다."
의자는 일침을 놓고 표정이 바뀌는 목돈에게 다른 말을 꺼냈다.
"저는 어제 폐하께 주청을 드린 게 있습니다."
"왕자님은 어떤 주청을 드렸다는 말씀이요?"
"목등 방장을 좌장에 임명해 주실 것을 주청 했습니다."
의자의 대답에 목돈은 아연 감격하는 표정이 되었다.
"왕자님, 그 말씀 정말이오?"
"상좌평께선 늘 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질 않으시는군요?"
"아니오. 나는 앞으로 왕자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따르겠소."
목돈은 아들이 야전군의 총지휘를 맡게 되면 날개를 달게 될 일이라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의자가 그렇게 목적은 사진과 목돈 간의 경쟁심을 부추기려는 데 있었다.
한편 사진은 목등이 좌장이 되는 것에 큰 불만을 품었다. 새상을 태자에 앉히기까진 목돈의 협조가 필요하지만 목등이 야전군을 맡게 되면 목돈 쪽으로 힘이 쏠리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튿날 목돈 부자는 크게 반발할 일이 생겼다. 그 이유는 국왕이 신라 공격군의 지휘를 좌장이 아닌 의자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거기다 의자는 두 명의 부장(副將)을 발탁했는데 하나는 심복인 윤충이고 또 하나는 계백이었다.
의자는 목돈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사위인 계백을 발탁한 것이었다. 그러나 목등은 사이가 좋지 않은 매부가 의자의 밑으로 들어가는 걸 불만으로 여겨서 부친에게 울분을 터뜨렸다.
"아버님, 소자가 좌장인 게 맞습니까? 이번처럼 중요한 전역에서 좌장이 야전군을 지휘하지 못한다면 그런 자리는 내 던지겠습니다."
"의자는 네가 공훈을 세우는 게 싫어 그러지만 내일이면 제거된다."
"폐하가 소자를 배제시킨 데는 아버님에 대한 불만 때문입니다. 내일 연회장에서 병관좌평은 폐하께 새상 왕자를 태자에 책봉시켜 줄 것을 정식으로 주청하게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목돈도 알고 있지만 그게 의자가 지어낸 소문임은 몰랐다. 의자는 목등에겐 좌장직을 사진에겐 태자 책봉을 미끼로 던졌다. 그것으로 두 사람의 경쟁심을 키울 고도의 술수가 먹혀든 것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는 의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척해야 한다."
"소자는 참을 수가 없는데 어찌 좋은 척을 하겠습니까?"
"네가 좌장에 오른 것만도 우리는 목표의 절반 이상을 달성했다. 더 큰 것을 얻기 위해선 작은 것에 연연해선 안 됨을 알라."
목등은 부친의 말이 한 나라를 얻는 것으로 알아 입을 다물었다.
국왕은 병력 동원을 위해 애를 쓰는 6가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강변에서 연회를 베풀기로 했다. 한편 목돈과 사진은 연회장에서 국왕과 의자를 처치할 거사를 일으키기로 되었다.
강변엔 장막이 쳐지고 새상은 왕궁 수비병 5백으로 호위를 맡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적인 병력 지휘권은 사진에게 있었다. 목돈은 7백여 선원을 태운 선단을 백강 하구에서 대기시켰다. 선단은 밤새 상류로 거슬러 올라 연회장과 가까운 곳에 은밀히 상륙을 하게 되었다.
"막상 거사가 성공되면 나는 사진보다 우위에 서게 될 것이다."
"아버님, 사진보다 더 우위에 선다는 건 무슨 뜻입니까?"
목돈은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았다.
연회장의 호위를 맡은 왕궁 수비병 5백 명은 사진의 편이었다. 그러나 목돈이 동원할 7백여 선원들은 무예도 능해 우위를 점할 수가 있었다. 국왕과 의자를 비롯해 좌평들을 전부 처치하는 게 끝나면 상황은 달라지게 되었다. 목돈은 우위인 전력으로 왕궁 수비병마저 제압한 뒤 사진과 새상도 처치해 버릴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면 나라를 쪼개지 않고도 백제의 왕좌를 자신이 차지하는 대망의 꿈을 이루게 되었다.
"소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아버님도 같은 생각이셨군요?"
"아무튼 간에 내일은 모든 게 결판이 나게 되었다."
목돈의 가슴은 야망의 불길이 훨훨 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왕위 찬탈이란 압박감은 가슴을 벌렁거리게 만들어 손으로 가만히 눌러야 했다.
"너는 대사의 중요성을 생각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 두어라."
"아버님, 소자를 믿으시고 염려는 놓으십시오."
목등은 밖으로 물러나왔다. 그런데 흥분되는 심경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갑자기 호기를 부리고 싶어 심복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술좌석을 베풀고 술이 거나해지자 자기도 모르게 큰 소리를 탕탕 치게 되었다.
"나는 이번 전역에서 출병을 못한다. 그러나 그걸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다. 왜냐하면 좌장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한 나라의 옥좌를 탐낸다."
목등의 말에 부하들은 술이 확 깰 만큼 놀랐다. 술에 취해 헛소리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위험한 말을 마구 내뱉을 땐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도 드는데 목등은 끝내 거사 계획까지 털어놓았다.
부하들은 목돈 부자가 국왕을 시해하고 국가를 전복시킬 거사를 꾸미고 있음을 걸 알게 되자 수런거렸다. 목등도 뒤늦게 말실수를 깨닫고 수습을 하고자 부친이 왕위에 오르면 모두 높은 자리에 앉게 만들겠다고 했다. 심복들은 마음이 끌리면서도 성공할 가망성이 있을지는 의문인데 그 자리엔 목등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흑치료도 있었다.
흑치료는 술자리가 파하자 곧장 의자를 찾아가서 보고했다.
"걱정 말라. 그럴 줄 알고 이미 대비책을 세워뒀다."
의자는 대답하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왕자님, 어떤 대비책을 세우셨습니까?"
"지금 백강의 하구에선 목돈의 선단이 대기하고 있다. 밤새 선단은 강을 거슬러 올라온 뒤 연회장 가까운 곳에 비밀리에 상륙하게 된다."
"왕자님, 목돈의 선원들은 무예가 강한 자들이라 제압이 힘듭니다."
"충돌은 없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왕자님, 충돌이 없을 것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목돈의 선단을 이끄는 마립을 이미 내 사람을 만들어 놨다."
마립(馬岦)은 목등으로부터 연회장을 덮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러나 오래전부터 의자와 내통하고 있는 그는 도리어 연회장에서 목돈의 음모와 죄상을 털어놓게 되었다.
흑치료는 놀랍고 기가 막히는데 의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흑치료는 지금부터 탄현으로 나가서 마립과 협력하라."
의자는 그런 지시를 내리고 무슨 귓속말도 했다.
이튿날 백강(白江) 변엔 연회장의 차일들이 쳐졌다. 정오께쯤 국왕이 행차했고 목돈을 비롯한 좌평들과 자리를 잡았다. 장막 둘레는 새상이 지휘하는 왕궁 수비병 5백 명이 호위했다.
국왕과 좌평들은 술잔을 기울이며 자못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눴다. 자리는 점점 흥겨움이 더해 가는 속에 국왕은 긴장감을 떨치지 못했다. 태연자약을 가장한 얼굴엔 겨우 미소를 짓고 있지만 눈길은 연방 의자와 목돈 쪽을 살피게 되었다.
목돈은 7백 명의 선원들이 들이닥칠 시간이 되자 긴장감을 느꼈다. 그런데 뜻밖에도 흑치료가 마립을 데리고 나타나 국왕 앞에 섰다.
"폐하, 상좌평 목돈이 모반을 일으켰음을 보고 드립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목돈이 모반을 일으켰다니?"
국왕의 반문에 목돈은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저 놈이 무슨 뜬금없는 말을 지껄이는가?"
"목동은 어제 심복들을 모아놓고 오늘의 거사를 밝혔습니다. 신은 차마 그 내용을 말하기가 어려우므로 본인에게 직접 하문을 하소서."
흑치료의 말에 몸을 벌떡 일으킨 목등은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쳤다. 그러나 윤충이 거느린 10여 명의 군관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붙잡아 포박을 한 뒤 도로 끌고 왔다.
국왕은 목돈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명령을 내렸다.
"반역자 목돈은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목돈은 윤충이 장막 밖으로 끌어내려 하자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 제가 반역자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이런 뻔뻔스런 놈."
국왕의 호통에 사색이 된 목돈은 이번엔 사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진은 안색이 창백해진 채 안절부절못하다 다급하게 외쳤다.
"수비병은 뭣들하고 있느냐?"
사진의 애매모호한 명령에 수비병들은 하나 같이 꿈쩍도 하질 않았다. 그러자 국왕은 발을 구르면서 외쳤다.
"반역을 도모한 목돈의 목을 얼른 베어라."
국왕의 호통에 목돈은 사진을 향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병관좌평, 내겐 죄가 없음을 밝혀 주시오."
목돈의 말에 당황한 사진은 황급히 반문했다.
"목돈, 네가 죄가 없다니 무슨 생통 맞을 소릴 지껄이는가?"
"사진, 그댄 우마코의 사주를 받고 모반을 일으킨 장본인이 아닌가? 날 끌어들였지만 모든 게 끝이 났으니 사실을 전부 털어놔라."
"저놈이 애무한 죄를 뒤집어씌우네. 난 이 자리에 더 못 있겠다."
사진은 그런 말을 던지고 새상을 확 잡아끌더니 황급하게 끌고 그 자리를 떠버렸다. 국왕은 그 모양을 못 본체 하고 흑치료에게 물었다.
"네가 데려온 자는 누구인가?"
마립이 대신 입을 열었다.
"폐하, 신의 이름은 마립으로 목돈의 상단을 이끄는 행수입니다."
그렇게 대답한 마립은 우마코의 사주를 받고 사진과 목돈이 모반을 일으킨 것, 거사가 성공되면 백제를 남북으로 쪼개 두 사람은 각기 새 왕조를 열게 된 것, 자신은 목돈의 지시를 받고 선원들을 이끌고 연회장을 덮치는 임무를 부여받게 된 것 등 모든 걸 소상하게 밝혔다.
다른 좌평들은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하는데 국왕이 명령을 내렸다.
"윤충, 이 자리에서 목돈 부자의 목을 쳐라."
목돈은 체념을 한 듯 모든 사람들이 들으란 듯 국왕을 향해 말했다.
"서동은 보위에 추대될 때 한 약속을 지키지 않은 자이다!"
"짐이 무슨 약속을 안 지켰단 말인가?"
"10년만 보위를 지키다 8가 중 한 명에게 양위하기로 약속했다. 그대가 그 약속을 지켰다면 나는 모반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목돈 부자는 목이 베어지고 말았다. 남은 좌평들은 몸들을 떨며 서로 눈길만 나누는 가운데 국왕은 더 이상 말을 않고 몸을 일으켜 왕궁으로 돌아갔다.
의자는 모든 계획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전부터 생각을 해두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지필묵을 챙겨 놓고 붓을 들어 종이에 글을 써 내려갔다.
--백제국 왕자 의자는 덕만공주님께 글월을 올립니다. 의자는 낳아 주신 어머님의 얼굴도 큰 이모님을 뵌 적이 없습니다. 의자는 백제 국왕의 장자로 태어났지만 아직 태자 책봉을 못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외가가 신라이기 때문입니다. 의자는 태자 책봉을 결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큰 이모님도 보위에 오르시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소문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러나 큰 이모님과 저는 결코 포기해선 안 될 일입니다. 큰 이모님은 신라에서 의자는 백제에 기필코 보위를 이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자면 큰 이모님과 의자는 서로가 도와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그 일을 위해 이런 때 의자는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전하겠습니다. 임나부의 거수 구미는 백제와 왜국이 신라를 침공해서 가락국을 부활시켜 주면 옛 가락국의 철산지 중 속함, 기잠, 용책 3곳을 백제에 넘겨주게 되었습니다. 왜국의 우마코는 출병을 결정했고 백제도 공동 전선을 펴게 됩니다. 백제가 동조한 이유는 철산지 때문입니다. 철산지는 한 나라의 존속을 좌우할 만큼 중요합니다. 의자는 신라 침공군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역에서 군공을 세우면 태자 책봉이 가능해집니다. 그러나 의자는 신라가 위기에 처하는 걸 원치 않습니다. 신라 내부에선 내물계의 대세(大世)란 자가 구미와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킬 것입니다. 두 사람은 외국의 침공에 합세해 낙동강 서쪽을 차지한 뒤 각자 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신라는 대내외적으로 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에 의자는 출병하면 신라를 돕겠습니다. 큰 이모님과 평화 공존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 그 대신 큰 이모님은 철산지 3곳을 백제에 넘겨주실 것을 청합니다. 그렇게 되면 백제는 가잠성 공취를 영원히 포기하겠습니다. 의자는 큰 이모님이 제안을 받아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갑신(甲申) 추(秋) 의자 올림
이튿날 의자는 흑치료로 하여금 서신을 지니고 신라로 떠나게 했다. 서라벌로 가서 덕만 공주에게 서신을 전하고 답장을 받아오는 임무를 부여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