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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나라 48. 관조

48. 관조

by 정완기

48. 관조(觀照)



말갈족(靺鞨族)은 송화강(松花江) 우측과 흑수(黑水)에 걸친 넓은 삼림지대를 터전으로 삼았다. 수해(樹海)로 뒤덮인 땅에서 수렵(狩獵) 위주로 살았다. 일정한 지역 안을 끊임없이 도는 게 반복되는 삶이라 모임과 흩어짐이 습성화되었다.

부(部)마다 최고 통치자로 대막불이 있었다. 그 밑에 있는 추장들은 병립 상태로 각기 부족을 다스렸다. 그런 추장들은 3년마다 형식적이나마 대막불을 추대하는 행사를 가졌다.

말갈 7부는 크게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서로 간에 이질성이 매우 커서 다른 종족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남쪽의 3부인 속말부, 백돌부, 백산부는 인구가 많고 말과 습속이 고구려와 비슷했다.

말갈족은 오랜 세월을 두고 전체적인 통합 왕조를 이루지 못했다. 그 때문에 고구려에 종속 상태로 있었지만 사람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속임수를 쓰길 싫어하는 편이었다.

양신은 일 년 가까이 말갈 땅에서 방향 감각을 잃은 사람처럼 유랑을 했다. 부모가 여선의 조부에게 목숨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말갈 땅엔 왜 왔는지조차 생각을 못할 지경이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숲 속을 떠돌았다. 나무 열매를 따먹고 때론 주민들의 음식을 얻어먹으며 마음을 추스르며 그들의 삶을 관찰하게 되었다.

말갈인은 숲 속에서 사는 만큼 외지인에 대한 경계심보다 호기심이 더 컸다. 그들이 양신을 보는 눈길은 관찰자와 같았는데 그것은 양신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다.

양신은 이런 데서 자리를 잡고 살아도 좋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먼저 속말부로 눈을 돌렸다. 대막불인 돌지계는 반 고구려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안전에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속말부를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백산부는 두만강 하류와 동해(東海)에 면했고 남쪽의 신라와 왜국으로 이어졌다. 반면 서쪽의 백돌부는 대평원에 면해 돌궐족과 가까운 위치였다. 앞으로 교역을 하는데 지리적으로 유리해서 근거지로 삼을 만하다는 판단이었다.

말갈족 3부는 전반적으로 식량이 부족한 편이었다. 때문에 고구려는 물론 신라와 교역을 해서 해결을 해야만 했다. 양신은 3부가 고구려 모르게 신라와 교류는 물론 유대감이 강한 사실도 알게 되었다.

신라는 하슬라를 발판으로 북쪽으로 영역을 넓힐 수가 있었던 것은 백산부와 협조를 얻어 가능했다. 관계로 구축됨으로써 특히 고구려의 철산지를 노린 진흥왕은 백산부의 지원으로 황초령과 마운령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우게 되었다.

금년으로 28세가 된 양신은 짧은 인생임에도 삶의 굴곡이 컸다. 때문에 많은 경험을 쌓게 되어 또래들로선 추종을 불허할 지닌 강점이 컸다. 앞으로 교역을 하자면 따르는 무리가 필요했다. 그 문제를 해결할 겸 속말부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검술 지도를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차츰 백산부와 백돌부까지 영역을 넓혀나갈 생각을 했다.

이미 가을은 깊어져 가고 있었다.

양신은 속말부의 대막불이 거처하는 대읍(大邑)으로 향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자신을 따라붙는 사람들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들은 측면과 후면에서 몸을 드러내지 않고 숲 속에서 움직였다. 고요한 숲 속은 갑자기 긴장감이 감돌았고 한순간 양신의 밀두도가 허공을 후렸다. 이어 통째로 베어진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져 나갔다.

일촉즉발의 분위기 속에 한 사내가 숲 속에서 몸을 드러내었다.

"허가 없이 대목을 벤 자는 형벌을 받게 됨을 알고 있는가?"

양신이 고구려 말로 대답하자 사내도 고구려 말을 썼다.

"나무를 베면 어떤 형벌을 받게 되오?"

"너는 30년이 넘을 나무를 베었다. 그에 해당할 형벌이 있다."

"나무를 베었다고 해서 형벌을 받는 건 너무 심하지 않소?"

"삼호족은 나무도 사람처럼 중하게 여긴다."

"어떤 형벌을 받게 됩니까?"

"베어진 나무의 나이테만큼 매를 맞아야 한다."

사내는 대답하고 양신의 얼굴을 찬찬히 보는 눈길이 되었다.

"내가 처음 보는 자인데 타관 사람이라면 어디서 왔는가?"

"본래는 고구려인이나 지금은 아니오."

"그게 무슨 소린가?"

"제 나라에선 쫓겨난 사람이라 그런 대답을 하게 되오."

"제 나라에서 쫓겨났다면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여기서 살 곳을 찾아 떠돌고 있는 중이요."

"여기서 왜 살 마음을 먹는가?"

"저는 살만한 땅이란 생각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사내는 위협하던 태도를 바꾸고 양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아름드리나무를 단숨에 베어낸 괴력에 압도되어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혹시 이곳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가?"

"없습니다만 전에 속말부의 대막불님을 한번 뵌 적이 있소."

양신의 대답에 사내는 크게 놀라는 기색이 되었다.

"그대가 대막불님을 뵌 적이 있다고? 무슨 일로?"

"저는 을지문덕 합하의 호위무사였습니다. 대수 전이 터지기 전에 순무를 수행했던 때요. 추이성에서 을지문덕 합하와 말갈 7부의 대막불님들이 회동을 했을 때 뵙게 되었소."

"아니!? 그렇다면 혹시 양신이란 사람이 아니오?"

"그렇소. 장수님의 존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내 이름은 걸마루요."

"그러시면 속말부의 막불님이 되시지 않습니까?"

양신은 묻고 무릎을 꿇었다.

걸마루(乞麻婁)는 속말부의 대막불인 돌지계의 아들이었다. 양신이 칼집에 칼을 도로 꽂자 걸마루는 앞으로 다가들더니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주변에서 활로 양신을 겨누었던 병사들도 일제히 몸을 드러냈다. 모두는 양신의 괴력적인 검술에 매료된 표정들이었다.

"양신님을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나로선 기쁘기 그지없소."

양신은 상대의 태도가 이상해서 주저하듯 물었다.

"막불님은 혹시 절 알고 계십니까?"

"나도 대수 전 때 아버님을 따라 추이성에 갔었소."

"그렇습니까?"

"속말부에선 양신님을 모를 사람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왜 그렇게 많다는 말씀입니까?"

"방금 전에 보인 검술로 나는 대번에 양신님이 아닐까 했소. 검술 실력이 뛰어난 양신님은 삼호족 젊은이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요."

걸마루의 말에 수십 명의 병력들은 와하는 소릴 내며 호응을 했다.

"양신님이 유명한 점은 또 있소."

"막불님, 또 무엇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양신님은 고구려 왕제의 후궁을 끌고 중원 땅으로 간 사람이요. 삼호족 사람들에겐 그보다 통쾌한 일은 없다는 생각들이요. 그 일로 양신님은 여기서 영웅 대접을 받게 될 것이요!"

걸마루의 말에 병사들은 또다시 열광적인 환호성을 올렸다. 양신도 그제야 전반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면서 조금 마음이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양신님은 이곳엔 무슨 일로 오셨소?"

"살만한 곳을 찾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말씀이 진정이면 우린 대환영이요."

"감사합니다. 막불님은 제게 존대를 붙이지 마십시오."

"내가 양신님에게 존대를 붙이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아오?"

"어떻게 된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병사들에게 욕을 먹게 되므로 그러오."

"막불님이 왜 욕을 먹는다는 말씀입니까?"

"양신님은 삼호족 사람들의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어줬을 뿐만 아니라 나보다 두 살 위인 연장자요. 거기다 영웅이니 그래야 하지 않겠소?"

양신은 자신에 대한 말갈인의 감정이 그처럼 우호적일 줄은 몰랐다.

"걸마루님, 전 이데 마음이 크게 놓이게 됩니다."

"양신님, 나와 함께 갑시다."

걸마루가 잡아끄는 대로 양신은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대읍의 변두리에 이르렀다. 변두리인 데도 말갈족 특유의 움집 같은 집들이 많은 제법 큼직한 마을이었다.

집들은 모두가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로 지붕을 덮었고 벽은 땅 속에 절반쯤이 파묻혀서 허리께 이를 정도인 움집들이었다.

일행은 그중에서 가장 큰 집 앞에 멈추었다.

걸마루는 양신을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말했다.

"술상을 차려서 들여라."

조금 있다 부엌에선 구수한 냄새를 풍겨서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었다. 조금 있다 두 여인이 술상을 들고 들어왔다. 상에는 술병과 먹음직하게 끌인 생선국이 담긴 큰 그릇이 놓여 있었다.

걸마루는 그릇에 술부터 가득 따라 양신에게 권했다.

"양신님, 드십시오. 음식이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소?"

"고맙습니다."

"나는 앞으로 양신님을 형님으로 모시고 싶은 마음이요."

"막불님, 초면에 무슨 말씀이오?"

"양신님이 삼호족과 함께 살아간다면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하겠소."

양신은 상대의 파격적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때문에 더욱 관찰하는 눈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상대를 제대로 알기 위해선 말과 행동을 잘 살펴야만 했다. 그러면서 느낀 점은 순수한 구석도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걸마루는 벌컥벌컥 들이켜듯 술을 단숨에 마시곤 했다.

"양신님, 어서 술그릇을 비우시오."

"아, 그러겠습니다."

양신은 몹시 시장기를 느껴 연신 국을 떠 마시기만 했다.

"이렇게 맛있는 국은 처음 먹어 봅니다."

걸마루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대며 대답했다.

"가물치와 속말부의 소문난 된장을 풀어 끓인 국이요."

"속말부의 된장은 참 맛이 좋군요?"

두 사람은 그런 말을 나누면서 서로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하려는 눈길이었다. 양신은 상대가 자신에게 매우 중요한 사람으로 보면서도 주량이 매우 센 게 마음에 걸렸다.

"양신님은 속말부에서 고구려인으로 살지 않기를 바라겠소."

"고구려인으로 살지 않기를 바란다니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요?"

"삼호족은 세상에서 고구려를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그렇소."

"그런데 고구려를 왜 싫어합니까?"

"고구려는 대수 전에 허덕이다 겨우 벗어난 주제가 아니요? 그런데 또다시 삼호족을 깔보는 못된 행태가 다시 도졌으니 그럴 수밖에 없소."

양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궁금한 점을 또 묻게 되었다.

"걸마루님은 어떻게 날 미행하게 되셨소?"

"근래에 와서 고구려는 우리에게 경계심을 일으키는 대상이 되었소."

"고구려가 왜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말씀입니까?"

"고구려는 첩자들을 수시로 속말부 영역에 침투를 시키고 있소. 때문에 양신님도 첩자로 온 게 아닐까 해서 의심을 했던 것이요."

양신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고구려가 그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대 수전 때 삼호족의 병력 지원을 받아 겨우 버텨낸 처지임에도 고구려는 전쟁이 끝나자 삼호족과 교류를 줄여 소원한 관계를 만들었소."

"나는 더 이상 병력 지원을 받을 필요가 그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양신이 의문을 제기하자 걸마루는 분개한 음성이 되었다.

"고마움을 모르는 것에 그치질 않고 괴롭히려고 들기까지 하오."

"어떤 괴롭힘을 가하고 있단 말씀입니까?"

"이번엔 인력 지원과 토산품 공출을 요구하고 있소."

"토산품은 그렇다 치고 인력 요구는 왜 하는 것일까요?"

"전쟁 통에 야철소가 전부 파괴되어 철정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소. 복구에 투입할 인력을 요구하면서 우리에겐 철정 공급을 일체 끊었소."

"그 얘길 듣고 보니 나도 괘심 하단 생각이 듭니다."

"고구려는 지금 다시 내부적인 갈등이 격화되기 시작했소."

"내부 갈등이 다시 격화된 이유는 뭘로 보고 계십니까?"

"왕실의 세력 강화된 반면에 연맹체는 와해 상태로 빠져들었소."

"연맹체가 와해 상태로 빠져들었다면 그 이유는 뭘로 보십니까?"

"고구려는 겨우 살아났다지만 요동 지역은 쑥대밭이 되었소."

"그건 누구나가 다 아는 일인데 그 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까?"

"여타 부가 받은 타격은 이만저만 크지가 않은데 왕실이 받는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소. 다시 말하면 왕실은 병력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반면에 여타 부들은 그렇지가 못하오. 때문에 힘이 커진 왕실은 여타 부를 압박하고 통제를 강화시키게 되어 그렇게 되었소."

양신은 그 사정을 알만한데 걸마루가 또 다른 말을 꺼냈다.

"고구려는 전체적으로 또 다른 어려움에 빠져 있소."

"또 다른 어려움에 빠졌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대외교역이 극도로 위축되어 여간 큰 어려움을 겪지 않소."

"대외교역이 위축된 이유는 무엇으로 보십니까?"

"한 마디로 여타 부의 교역 상단은 거의 해체된 지경이요."

"여타 부의 상단들이 해체된 지경이라니 왜 그렇게 되었단 말입니까?"

"그 이유는 왕실이 막 나가고 있는 데서 찾아야만 하겠소."

"왕실이 막 나가다니 그건 어떻게 하기에 그렇습니까?"

"지금 여타 부의 주성마다 왕실이 파견한 욕살들이 주재하고 있소."

"욕살이란 게 대체 뭡니까?"

"욕살은 우태의 임무를 대행하는 왕실의 총독이라고 하오. 왕권을 강화시켜 중앙 통치를 도모하려는데 그 목적이 있소."

양신은 아연 놀라며 사태가 이만저만 심각하지가 않다고 판단했다.

"욕살들을 둔 결과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는지 궁금합니다."

"내부 분열에 그치지 않고 더 심각한 악화 상태를 빚게 되었소."

"더 심각한 악화 상태는 어떤 것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욕살들은 사욕을 채우려고 저마다 세금을 늘리는데 경쟁을 하고 있소. 그로 인해 백성들이 받는 고통이 여간 심하지 않아 고향을 등지고 떠나오. 신라와 백제 땅으로 흘러드는 숫자가 어마어마하단 소문이요."

양신은 더욱 마음이 편치가 않는데 걸마루는 말을 이었다.

"고구려 왕실은 불안해진 내부 사정을 수습할 필요성이 커졌소. 그러나 그걸 다스릴 방법이 없자 백성들의 불만과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려는 엉뚱하게 삼호족에 대한 트집을 잡는 일이요. 그 이유는 대수 전 때 삼호족이 고구려를 적극 돕지 않았다는 핑계를 대면서 특히 속말부에 응징을 가할 구실을 찾으려고 들고 있소."

양신은 궁금증이 풀리고 수긍도 가는 터라 물었다.

"고구려는 삼호족에 실제적으로 어떤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까?"

"삼호족 중 속말부는 인총이 가장 많고 세력이 크지 않소? 삼호족을 약화시켜 없애려고 들고 있소. 속말부를 손에 넣으면 삼호족 전체를 통제하고 억누를 수가 있다는 판단에 철제품 공급을 일체 끊어 버렸소."

양신은 그 사정을 알만하나 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대수 전 때 말갈족이 많은 무기를 손에 넣은 점이었다. 말갈 병사들은 전쟁터에서 수거한 무기들을 빼돌려 보유량이 많아졌다. 그걸 회수할 수가 없어 줄이게 만들려는 목적이었다.

"고구려는 삼호족을 압박하는데 철정을 이용하려고 들 것 같습니다."

"그렇소. 우린 철정이 곧 고갈되게 되어서 무기들을 녹여서 도구를 만들어 쓸 정도로 어려움이 매우 크오. 고구려는 거기다 삼호족 내에서 속말부에 대한 반감을 키워 고립되게 만들려고 갖은 획책을 다 쓰오."

"속말부는 무슨 대책을 세운 게 있습니까?"

양신의 질문에 걸마루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우린 신라와 유대를 강화해 철제품을 공급받을 계획이요."

"신라에서 철제품을 공급받다니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그 때문에 삼호족은 전체가 신라와 교류를 강화시키려고 하오."

양신은 내심 놀라며 회의적인 눈길인데 걸마루는 자신감을 보였다.

"원래 신라와 교류가 많은 쪽은 백산부였소. 신라 역시 삼호족 전체를 상대로 적극적인 접근 해오고 있으므로 기대가 크오."

"신라가 삼호족에 접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삼호족과 고구려 관계가 전 같지 않게 악화된 걸 알기 때문이요."

"고구려가 사실을 알면 더욱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양신은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전과 같지 않게 거부감이나 우려감을 표하지 않고 담담히 듣게 되는 자신에 대한 묘한 감정이 일었다.

"걸마루님은 백산부가 고구려에 대한 적대 의식은 오래된 일이라고 하셨는데 그 이유에 대해 아는 점이 더 없으십니까?"

"백산부는 고구려에 멸망을 당한 옛 옥저국의 후예들이요."

"백산부가 고구려에 멸망당한 옥저국 후예인 게 사실입니까?"

양신은 뜻밖에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자 왠지 모르게 백산부가 남다른 연민의 대상이 되고 관심도 커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엄격하게 말을 한다면 백산부는 삼호족이 아니요."

"그건 처음 알게 된 사실인데 실은 나도 같은 처지입니다."

"양신님이 같은 처지라니 그건 무슨 말씀이요?"

"고구려 땅에 있는 내 고향인 다갈촌은 옛 갈사국의 왕도였소. 갈사국 역시 고구려에 나라가 망한 나라인데 나는 갈사국 왕족입니다."

양신의 대답에 걸마루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양신님은 어딘지 범상치가 않은 기개가 있다고 보았는데 갈사국의 왕손이라니 새삼 다시 보게 되오. 참으로 잘 오셨소."

걸마루는 양신에게서 동류의식 같은 것을 느끼며 더욱 호감이 갔다. 기분이 좋은 듯 술잔을 더욱 기울였다. 양신이 갈사국 왕손임을 밝힌 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가 없지도 않았다.

"양신님, 앞으로 이 집을 거처로 삼고 살면 어떻겠소?"

"그렇게 해주시겠습니까? 염치 불구로 신세를 지겠습니다. 그보다 먼저 저는 대막불님을 만나 뵈었으면 합니다,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양신님은 무엇 때문에 대막불님은 만나려고 하오?"

"그건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생각을 한번 해 봐야 하겠소."

걸마루의 뜻밖인 대답에 양신은 되묻게 되었다.

"무슨 생각을 해 봐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나는 양신님을 형님으로 모시려고 할 만큼 좋아하고 있소."

"나로선 과분하기 짝이 없을 일입니다만."

"나는 양신님이 사는데 조금도 불편이 없게 보살피겠소. 함께 술을 마시며 세상을 즐겨나가면 되는데 대막불님을 만나서 뭘 하겠소?"

양신은 황당한 대답을 듣고 좀 허탈해지는 기분이었다. 상대는 술이 센 편인 데다 너무 즐기는 편이라 꺼리게 되었다. 그러나 자신에겐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에 기분을 맞출 수밖에 없었다.

"양신님, 어서 드오. 세상에 술처럼 좋은 게 또 있겠소?"

"나는 술이 좀 약한 편이라서."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늘게 마련이요."

걸마루는 그릇에 술을 가득 부어 연방 마시며 양신에게도 마시길 권했다. 양신은 자꾸 술그릇을 비워내는 상대에게 사양만 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 조금씩 마실 수밖에 없었다.

양신은 조금씩 마셔도 가랑비에 옷이 젖듯 취해가고 있었다. 걸마루는 양신의 얼굴이 불콰해진 것을 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양신은 더 먹긴 큰 고역이나 상대의 비위를 어느 정도 맞추고자 마셨다.

걸마루는 자작으로 연방 술을 따라 마시면서 양신이 술을 별로 즐기지 않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양신은 술자리가 빨리 끝나기를 바라고 있지만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난감했다.

양신은 이런 술자리가 자주 있게 된다면 큰 부담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와 교류를 원하는 처지라 마음이 무거웠다. 유력자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신은 대막불을 한번 만나고 싶은데 걸마루가 그걸 막으려는 것 같아 걱정이었다. 매사가 왜 이렇게 자신의 뜻대로 되는 게 없다는 실망감을 누르며 입을 열었다.

"걸마루님, 나는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이 있소."

양신이 불쑥 꺼낸 말에 걸마루가 반문했다.

"나 역시 그 점을 매우 궁금하게 여기오."

"속말부를 근거지로 삼아 중원 땅은 물론 동돌궐, 한삼국을 상대로 교역을 하고 싶은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소?"

걸마루는 의외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양신님은 뭣 때문에 고달픈 일을 하려고 하오? 사는 건 걱정 마오."

걸마루의 대답에 양신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양신은 자신이 하려는 일은 많은 사람들의 협조를 필요로 했다. 그런데 교류는 서로 입장과 생각이 어우러져야 가능한데 중요하게 여길 상대의 반응에 실망감이 컸다. 그동안 말갈족 땅을 두루 거치면서 그들의 삶을 살피고 파악을 하는데 힘을 써 왔다. 그러면서 조금씩 열리게 된 혜안과 관점에서 보면 걸마루는 싹수가 노란 상대에 지나지 않았다.

걸마루도 나름대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자신은 술을 너무 좋아해 청춘 모주꾼 소릴 듣고 있었다. 때문에 부친에겐 크게 기대에 못 미치는 자식으로 인정을 못 받을뿐더러 아랫것들에게도 윗사람 대접을 못 받고 있었다. 그런 판에 출현한 양신은 자신에겐 어떤 구원으로 여길 만했다. 많은 사람들의 우상인 양신과 가까운 사이가 된다면 자신의 위상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반면 양신은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자신의 앞날은 자신의 몫인데 남에게 의지하려는 건 어리석다는 생각이었다. 일찌감치 오산을 벗어던지는 게 현명하므로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 더 이상 걸마루에게 연연하지 말자고 마음을 정했다.

걸마루는 여인들에 또다시 술병을 들일 것을 명령했다. 그 순간 양신은 괴성 같은 포효를 내지르고 몸을 벌떡 일으켰다. 빈 술그릇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벽에다 마구 발길질을 가했다. 벽이 무너지고 중앙의 기둥마저 어그러져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

집안에선 여인들이 비명을 터뜨렸고 술에 취한 걸마루도 너무도 놀라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래도 미친 행태를 그치질 않는 양신은 무너져 내린 지붕에 아래 깔리게 되었다.

걸마루는 놀라 벌렁거리는 가슴을 안고 집으로 향했다. 너무도 큰 경악감에 단번에 술이 깰 정도로 가슴이 진정되지가 않았다.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 킨 뒤 그대로 쓰러져 코를 골았다.

이튿날 해가 뜨자 지붕이 무너진 집 앞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수군대는 가운데 어제 양신을 내려왔던 병사들이 나타났다. 한 여인이 무너진 집속에 사람이 있음을 알려서 무너진 지붕을 치웠다.

양신은 병사들에 의해서 밖으로 나올 수가 있었다.

"나는 이만 여길 떠나겠소."

그 말을 들은 한 군관이 공손하게 말했다.

"이렇게 떠나시면 안 됩니다."

"나를 막을 셈이요?"

양신의 반문에 군관은 당황히 손 사례를 쳤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뭐요?"

"대막불님께서도 이런 사단이 벌어진 걸 알게 되셨습니다."

군관의 대답에 양신은 난처해지면서도 한편으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 군관의 다음 말을 기다리게 되었다.

"양신님이 무사하심을 대막불께 보고하고 명을 받아야 합니다."

양신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군관은 즉시 그 자리를 떠나 어디로 향했다. 얼마 후 군관은 걸마루와 함께 다시 나타났다. 걸마루는 많은 사람들을 의식하듯 헛웃음을 연방 터뜨리면서 느긋한 자세로 천연덕스럽게 양신에게 인사를 건넸다.

"양신님, 잘 주무셨소?"

양신은 미안하면서도 좀 어이가 없어 느긋한 태도로 대답했다.

"오래간만에 한번 푹 잘 잤소."

걸마루는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이고 양신의 팔을 잡고 끌었다. 양신은 그냥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로부터 상당한 거리를 두게 되자 걸마루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양신님은 어젯밤에 내게 무슨 반감이 있었던 게 아니오?"

"걸마루님, 무슨 당치도 않을 말씀을 다 하시오?"

"내가 한 말이 당치도 않다니요?"

"나는 원래 술이 약한 데다 술만 먹으면 열불이 치밀어 그랬소."

"열불이 치밀다니?"

"걸마루님도 내 처지를 잘 알지 않소? 아내와 자식을 잃은 내 울분이 어떤 것인지 아실 것이요. 그게 술만 먹으면 터지게 되오."

양신의 대답에 걸마루는 이해가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람들 앞으로 나서더니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는 저분이 누구인지 잘 알 것이요."

그 말에 사람들은 모두 고개들을 끄덕였다.

"양신님은 어제 나와 술을 마셨소. 그러데 술만 먹으면 도지는 병이 있소. 고구려 왕에게 아내와 자식을 빼앗긴 울분 때문에 생긴 병이요."

사람들은 이해와 울분을 느끼는 표정들이 되었다.

"그리들 알았으면 그만들 돌아가오."

걸마루는 사람들을 흩어지게 만든 뒤 양신에게 돌아왔다.

"양신님은 여길 떠나겠다는 말씀을 하신 게 사실이요?"

"그렇소."

"왜 떠나려고 하오?"

"나는 깊은 병이 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소."

"대체 무슨 병이 있기에 그러오?"

"어제 보지 않으셨소? 술만 취하면 미치는 병이 도지게 되오."

"술만 취하면 미치는 병이란 게 무슨 소리요?"

"술을 두고 광성지약이란 말들을 하오."

"그래서 술을 두고 광성지약이란 말을 하오."

"나는 어젯밤에 미쳤지만 아침엔 회복이 되었소."

"무너진 지붕 밑에선 왜 꿈쩍도 하질 않고 있었소?"

"그 이유는 걸마루님을 기다리기 위함이었소."

"왜 날 기다렸다는 말이요?"

"걸마루님은 내가 앞으로 살 집을 내주었소. 광성지약 때문이라고 해도 집을 부숴놓는 것은 너무도 과도한 짓이었소."

"날 기다렸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요?"

"걸마루님이 여기에 나타면 계속 살 작정이었소. 그렇지 않으면 떠날 마음을 먹었소. 그런데 병사들이 무너진 지붕 밑에서 날 끌어냈소. 그때 나는 주변부터 살폈지만 걸마루님이 보이질 않아 떠나겠다고 했소."

양신의 대답을 듣고 걸마루는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나는 양신님이 오늘 저녁에 대막불님을 뵙게 해 드리려고 하오."

"내가 대막불님을 뵙게 해 주시겠다니 걸마루님은 왜 생각을 바꿨소?"

"솔직히 말하면 나도 어제 일로 크게 깨달은 바가 없지도 않았소."

"걸마루님은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는 말씀이요?"

"나는 아버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지 못하던 자식이었소."

걸마루의 대답에 양신은 이해가 되어 동정심도 일었다.

"나는 어제 일어났던 일들을 아버님께 말씀을 드리고 용서를 빌었소. 지난 일들도 반성하며 앞으론 술을 삼가기로 맹세를 드렸소."

양신은 그 말을 듣고 내심 미안하면서도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걸마루님, 나도 어젯밤 일을 깊이 반성하고 용서를 빌겠소."

"아버님께선 날 깨우치게 만든 양신님을 고맙게 여기고 계시오. 내가 양신님을 형으로 모시겠다는 뜻도 흔쾌히 받아들이겠다고 하셨소."

양신은 그런 말을 하는 걸마루의 두 손을 힘 있게 잡았다.

돌지계는 저녁 식사 자리에 아들과 함께 양신을 초대했다. 고령에 건강도 좋지 않아 앉아 있기도 힘겨우나 양신에 대한 관심이 커서 이모저모로 살피는 눈길이었다.

"나는 자네에 관한 모든 일들은 전부 들어서 잘 알게 되었다. 고구려에선 물론 수국과 동돌궐에서 겪은 일들과 활약상을 듣고 초인적인 데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는 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저는 무슨 생각을 해본 게 없고 슬프다는 생각만 들 뿐입니다."

"슬프다?"

"슬픔은 제게 유일한 친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슬픔을 친구로 여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온존 한 것은 슬픔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에게 온전한 것은 슬픔밖에 없다?"

"슬픔에서 위안 같은 것을 받아서 그렇습니다. 슬픔은 제 자신을 다듬어주고 키워준다는 생각도 들어 진정한 친구로 여깁니다."

돌지계는 양신의 말을 들을수록 엄숙하고 경건해지는 마음이었다.

"자네는 불함산에선 벼락도 맞았다지?"

"예, 그래서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되었습니다."

"자네의 조상은 갈사국의 왕실이었다지?"

"그건 근래에 알게 되었습니다."

"양신은 불함산에서 숨어 사는 동안에 뭘 했는가?"

"검술 수련도 하고 틈틈이 책을 읽는 공부도 했습니다."

돌지계는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는 말에 큰 흥미를 느꼈다.

"책을 읽었다면 어떤 책을 읽었는가?"

"경서를 중심으로 역사와 지리서 등속을 읽었습니다."

"그중에서 자네가 중점을 두고 읽은 책은 어떤 것이었나?"

"특히 관심이 커서 화식열전을 여러 번 읽었습니다."

돌지계는 사기(史記) 중 화식열전(貨殖列傳)임을 의외로 여겼다.

"화식열전에 관심이 큰 이유는 무엇인가?"

"앞으로 교역에 종사할 마음을 먹고 있어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돌지계는 아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어 좀 더 묻기로 했다.

"자네가 속말부를 근거지로 삼아 한삼국은 물론 수국과 동돌궐에 걸쳐 교역을 해보려는 포부를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럴 예정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재화를 중요시한다. 한 나라도 마찬가지로 창고에 재화를 축적해야 국력을 키울 수가 있네. 양신은 장사를 하는 데도 어떤 원칙이 있다면 무엇으로 생각을 하는가?"

"장사도 어떤 원칙이 필요합니다. 물화는 물처럼 흐르는 속성이 있으므로 그 원리에 따라야 합니다. 취급할 물화를 잘 선택하고 사고파는 시기를 잘 잡아서 유통시킬 때만 큰 이익을 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옳은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재화가 늘고 삶이 풍족해지면 명예와 사치에 빠져들게 된다. 많은 재화를 축적하면 또 다른 야망을 품게도 된다. 양신은 그 점에 대해선 어떤 생각을 하는가?"

"저는 사치는 배격합니다."

"그럴 걸로 본다. 자네가 장사에서 가장 앞세울 원칙은 무엇인가?"

"저는 거래에서 쌍방이 함께 이익을 내는 데 우선을 두겠습니다."

"그래야 지속이 가능한데 그러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되겠나?"

"중요한 것은 신용입니다. 그건 상대를 배려하는 데서 나옵니다."

돌지계는 양신이 하는 말을 들을수록 크게 매료되었다.

"재능이 있으면 부유해지고 없으면 가난해진다고 한다. 군자는 부유해지면 덕을 즐기나 소인은 힘을 휘두른다. 군자임에 틀림이 없는 자네가 장사를 하려는 목적은 어떤 야망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대막불님, 소생에겐 야망이란 분에 넘칠 일입니다."

양신은 대답하며 약간 당황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삼호족의 땅은 산물이 적은데 교역이 잘 될 수가 있겠는가?"

"산물이 풍족하지 않아도 교역은 가능합니다. 저는 동돌궐에서 잠시 상단에 몸을 담은 적이 있습니다. 산물이 풍족하지 않기는 거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나는 산물은 각처마다 다르고 가격도 천차만별이라 값이 싼 곳의 물화를 비싼 데로 옮기는 교역을 하렵니다."

"그게 중계 교역임을 나도 알고 있다."

돌지계는 대화를 나눌수록 양신 대한 호기심이 커지고 큰 야망을 품은 자라는 확신이 섰다. 그러나 심한 피곤 기를 느껴 그만 자리를 파하고 이튿날 양신을 다시 불러 단 둘만의 자리를 가졌다.

"나는 오래 살 것 같지가 않다."

그런 말을 하고 도로 자리에 누워서 말을 이었다.

"고구려인은 삼호족을 미개인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걸 삼호족의 심성이 소박하다는 반증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인은 나무도 잘 베고 돌도 잘 깨듯 파괴성이 강하지만 그걸 부끄럽게 여길 줄은 모른다. 그런데 양신은 다르다고 봐서 마음에 든다."

양신은 돌지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까닭을 모르게 긴장이 되었다. 을지문덕은 돌지계를 학식이 있고 자의식이 너무 강해 다루기가 힘들다고 했는데 자신은 대할수록 속이 깊은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네가 이곳에 온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련다."

"대막불님, 무슨 의미를 부여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을지문덕은 자넬 수제자로 자랑했다. 자네는 그 자와의 인연이 짧게 끝난 걸 다행으로 여긴다. 왜냐하면 교활함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돌지계는 그런 말을 이어나갔다.

"을지문덕은 남들의 힘을 널리 모으고 잘 이끌어내어 제 것처럼 쓰는 재주가 있어 그걸로 자신의 힘을 두 배로 쓸 수가 있었다. 자네는 그런 재주를 지닌다면 한 나라를 세울만한 사람이다."

양신은 내심 놀라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양신, 나는 평생을 두고 품었던 소망이 있었다. 그것은 삼호족의 통합 왕조를 세우는 꿈이었다. 그러나 이젠 늙고 병마저 들어 꿈을 접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걸 양신에게 기대를 걸어보려고 한다."

양신은 너무도 뜻밖인 말에 흠칫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삼호족은 아직도 읍락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원인인 자꾸만 나뉘는 속성 때문이다. 오랜 삶의 터전인 환경에서 비롯된 습성인데 이젠 스스로가 깰 수가 없게 될 만큼 굳어져 버렸다."

돌지계는 말하고 양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상태가 앞으로도 지속되면 삼호족은 이 땅에서도 역사 속에서도 흔적도 없게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양신은 비로소 입을 열었다.

"저는 고구려의 연맹체가 지속되는 걸 바람직하지 않게 여깁니다. 때문에 삼호족도 하루속히 통합 왕조를 이루게 되길 바랍니다."

양신의 대답에 돌지계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나는 이제 타 종족이라도 삼호족의 대업을 이룩하길 바라고 있다."

"타 종족이라도 이룩하길 바라신다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건 진심이다. 나는 삼호족의 대업을 양신이 이뤄줬으면 한다."

돌지계의 표정이 너무도 엄숙해서 양신은 숨이 막혀 들었다.

"대막불님, 제가 무슨 능력을 지녔다고 그러십니까?"

양신은 얼결에 반문을 하고 속으론 무서움마저 느꼈다.

"양신은 불함산에서 벼락을 맞고 살았다. 하늘이 자네를 살려 둔 것은 맡겨야 할 큰 사명이 있다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이고 있다."

돌지계는 양신을 더욱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양신, 자네가 교역을 하려는 것은 재물을 축적하는 데 있다. 재물은 나라를 세우는 데 기본적인 요건 중에 하나다. 나는 자네가 그런 야망을 품고 여기에 온 걸로 보고 있다. 속말부에서 뜻을 이루기 바란다."

양신은 자기도 모르게 묻게 되었다.

"대막불님의 그 말씀 진정이십니까?"

"그렇다. 삼호족과 한삼국인은 모두 삼신족의 후예이다. 한삼국인 끼린 형제지간이나 삼호족과는 4 촌간이다. 삼신족이 최초로 세운 나라는 단군조선이다. 단군 조선의 임금은 단군으로 불렀다. 그런데 삼신족의 후예인 한삼국은 임금을 왕으로 부른다. 왕은 중원의 한족들이 쓰는 명칭인데 그런 것부터 물들어가서 나중엔 동화되고 말 것이다."

"한족에게 물이 든 것 중 가장 잘못된 것은 어떤 걸로 보십니까?"

"한족의 지배층은 도덕군자를 입에 달고 산다. 그걸 뒤집어보면 거짓만이 남는다. 백성들을 고분고분하게 부려먹을 교활한 수단인데 한삼국인은 그런 교활성에 물이 들었다. 그렇지만 삼호족은 물들지 않고 고유의 것을 지니고 있다. 나는 양신도 그런 면에서 순수한 사람이다. 나는 단언하건대 고구려는 곧 망하게 될 걸로 본다. 그렇게 되면 삼신족은 흑수로부터 발해에 이르는 넓은 터전을 잃게 땅은 된다. 어쩔 것인가? 이 땅을 지켜내기 위해 양신이 삼호족을 이끌고 고구려를 대신할 나라를 세워주기 바란다. 그렇지 못하면 삼신족도 없어질 절박한 심경으로 당부를 하는 것이다."

"대막불님으로부터 제가 그런 말씀을 듣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양신, 한 나라를 세운다는 건 매우 어렵고 기적이나 다름이 없는 일이다. 간절한 마음과 노력의 뒷받침이 있어도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양신은 숙명으로 알고 세워주기 바란다."

양신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대막불님, 저는 그보다 먼저 교역에 나설 상단부터 꾸려야 하겠습니다. 상단을 꾸리자면 대원들이 필요합니다. 대원들은 무예를 지녀야 하기 때문에 검술도장을 열어 젊은이들에게 검술을 지도하겠습니다. 그래야 문생들 중에서 대원들을 선발할 수가 있습니다."

양신은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

"즉시 도장을 여는 일부터 도와주겠다."

"대막불님, 저는 사전에 보장을 받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떤 보장을 받고 싶은가?"

"저는 자유롭게 활동하고 저의 재물을 축적하렵니다."

"원하는 바를 허락하고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

"대막불님의 뜻에 따라 저는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 얘기는 누구에게도 비밀이다. 걸마루를 잘 부탁한다."

돌지계는 이튿날부터 큰 창고 건물을 도장으로 쓰게 해 주었다. 양신이 갈사무문(葛思武門)이란 현판을 붙여놓자 그 소문이 나서 속말부의 젊은이들이 각 처에서 몰려들기 시작했다.

양신은 문생들에게 검술을 지도하면서 생각한 바가 있었다. 그것은 체계적이고 통합적인 지도가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이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불함산에서 자신이 개발한 여러 기술을 기본으로 해서 검술을 교본을 만들고 불함도기(不咸刀技)로 명명했다.

문생들 중에선 걸마루의 사촌 동생인 걸사비우(乞四比羽)를 주목했다. 검술 연마도 열심인 데다 매사에 솔선수범의 태도를 보여서 귀감이 되고 문생들을 잘 통솔해서 마음에 들었다.

한 해가 다 갈 무렵에 도장은 체계가 잡히고 활기를 띠었다. 양신은 백산부에도 도장을 열 생각인데 돌지계가 갑자기 타계를 했다. 대막불의 장례를 치르고 추장들은 걸마루를 새 대막불로 추대했다. 걸마루가 무난히 추대를 받은 이유는 도장을 세운 양신을 적극 도와준 덕분이었다.

그럴 때 백산부 대막불인 수노(峀魯)가 사람을 보내 자기네도 검술도장을 열어 줄 것을 청했다. 그런데 걸마루의 반대에 부딪혀 할 수가 없자 양신은 그때부터 속말부에 더 있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양신은 걸마루를 만나 상의를 했다. 이젠 서로가 말을 놓기가 어려워져 존대를 썼다.

"형님은 무슨 일로 날 보자고 하셨소?"

"상단을 꾸리기 전에 중원 땅을 한번 다녀올 생각이요."

"중원 땅에서 무슨 일을 하실 게 있어 그러시오?"

"교역을 하자면 자본이 있어야 하고 물화를 확보하자면 중원 땅에 거래처를 만들어야 하오. 나는 중원 땅의 구려촌에 맡겨둔 재화가 좀 있소. 그걸 회수하고 동돌궐 쪽 사정도 살필 겸 다녀오려고 하오."

"형님이 이곳을 비우는 동안에 도장은 어떻게 하려고 하오?"

"도장은 걸사비우를 사범으로 삼아 맡기면 잘 꾸려나갈 것이요."

"걸사비우가 잘해 나갈지가 걱정입니다."

"내가 얼마간 여길 떠나 있으려는 덴 또 다른 이유도 있소."

"또 다른 이유란 무엇이요?"

"나는 대막불로부터 분에 넘칠 큰 대접을 받는데 그게 대막불에게 좋지 않을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므로 초기엔 내가 잠시 떠나 있겠소."

걸마루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었다.

"형님과 서로 연락을 취하자면 어떻게 해야 되겠소?"

"파루를 데려가려고 하오. 파루가 왔다 갔다 하게 될 것이요. 대막불님이 건재해야 내 앞날도 있겠소. 부디 건강하시오."

"나는 형님 말씀을 선친의 말씀처럼 여기며 끝까지 따르겠소."

며칠 뒤 양신은 파루와 함께 길을 떠났다. 착잡한 심경이나 자신의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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